역사를 주름잡은 대정치가나 문학가들도 일개인으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에 불과함을 알 때 힘이 빠진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것이 재밌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나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렇다고 약점이 알려진 역사적 인물들을 규탄한다거나 그러지도 않습니다.그저 "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새삼스럽게 왜 난리야..." 하는 정도로 넘어가는 편이죠.
흔히 문학은 철학이나 기타 인문사회과학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속설이 있는데, 실제로 읽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읽는 재미를 맛보지 못함은 물론 심하면 지루하고 신경질까지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러시아의 리얼리즘 소설은 특히 그렇습니다.러시아사상사의 큰 축인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 그리고 러시아 정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깔려있어서 그 복잡한 정글 속을 헤매다가 지치기 일쑤지요.거기다 러시아의 그 길다란 지명과 인명도 헛갈립니다.
소설 자체가 어려우면 그 작가의 생애를 읽어본 후 다시 본 작품에 도전하는 경로를 밟는 것도 괜찮습니다.소설 읽기도 벅찬데 러시아 사상사까지 읽으란 말이냐 하면서 볼멘 소리를 할 사람도 있겠지만 차라리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런 편이 더 낫습니다.특히 그 사조를 대표하는 인물 몇몇을 골라 집중연구하는 편을 권합니다.그런 면에서 서구파의 대표인 투르게네프와 슬라브주의자의 대표인 도스토예프스키를 예로 들어보지요.
투르게네프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개인적으로 만나서 사이가 나빠진 경우입니다.투르게네프는 세련된 지성인이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부드럽다거나 세련미를 갖췄다거나 하는 칭찬을 해줄 수는 없는 인물이었습니다.그래도 투르게네프는 한때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돈도 꿔주고 했는데 도스토예프스키 입장에서는 여하튼 투르게네프는 재수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나 봅니다.게다가 투르게네프는 사상적으로도 용납하기 힘든 서구주의자란 말이지요.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들이 잘 쓰는 수법을 동원합니다.자기 소설에서 투르게네프를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그려서 망신을 주자고 작정하는 것이죠.
네챠예프 사건을 소재로 한 정치소설 <악령>에 나오는 카르마지노프가 바로 투르게네프를 희화화한 인물입니다.용모라든가 행동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여 제대로 망신을 주었지요. 폭풍우를 만나자 "나는 외아들이니 꼭 구해주시오!" 하고 선원에게 애걸복걸하는 장면을 집어넣은 것은 좀 지나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결국 이 소설은 투르게네프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관계를 최악으로 몰고 갑니다.그래도 도스토예프스키 말년에 두 사람은 화해합니다.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푸시킨 추도연설에 참석한 투르게네프가 연설내용이 좋다고 칭찬하며 악수를 청한 것이 계기입니다.몇 달 안 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죽고 (1880년) 투르게네프도 3년 후 사망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는 여러 사람이 손을 댔습니다.그중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에드워드 카의 것입니다.학문분과를 엄밀히 나누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은 왜 역사학자, 그것도 혁명사가인 카가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를 쓰느냐고 의아해 하기도 하겠지만 카는 정치사나 외교사만이 아니라 사상사에도 조예가 깊으니 러시아사상사를 바탕에 깔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를 파헤치는 전기를 쓴 것이지요. 뭐라 시비 걸 것은 아닙니다.그외에도 그는 <낭만의 망명객>에서 헤르첸,바쿠닌,오가료프의 생애를 깊이있게 파헤쳤고, 여기서 더 나아가 바쿠닌에 대해선 아예 <바쿠닌 평전>까지 손을 댔습니다.모두 전기문학적인 면에서 봐도 일급의 작품들입니다.
러시아 혁명사와 소련공산당의 전문가로 카와 쌍벽을 겨눈 학자가 레오나드 샤피로입니다.샤피로가 더 반공색채가 강하지요.그런데도 그의 대표작인 <소련공산당사>는 박정희 때까지 금서라서 번역이 안 되었습니다.5공 들어서 외국의 명저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번역본이 나오는데 그 묵직한 분량은 대단했지요.나는 헌책방에서 이 번역본(양흥모 번역 문학예술사 펴냄 1982)을 구입하고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릅니다.그 뒤로 카의 러시아 혁명 관련서적들도 구입해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카와 샤피로가 서로를 의식하면서 소련에 관한 연구서들을 집필했는지에 촛점을 두고 다시 연구해볼 걸 하는 아쉬움도 듭니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샤피로가 투르게네프를 연구하여 두툼한 전기를 썼다는 사실입니다.번역본이 몇 년 전 나왔을 때 저자이름을 보고 어...이 샤피로가 그 샤피로인가 하고 확인해 봤는데 맞았습니다.레오나드 샤피로. 원래 카는 전기작가로도 명성이 있으니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를 쓴 것이 당연하지만 샤피로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었나 하고 놀랐습니다.알고 봤더니 샤피로는 투르게네프를 비롯한 러시아문학 전반에도 정통해 있었더군요.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를 쓴 사람은 많고 번역도 많이 되어있지만 투르게네프 전기는 그렇게 이렇다 할 만한 명저가 번역되지는 않았습니다.그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샤피로가 쓴 전기가 최근에 번역된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겠지요.도스토예프스키와 투르게네프의 신경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카와 샤피로의 저술을 통해 두 소설가의 생애를 비교함으로써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러시아사상사의 그 도도한 양대산맥인 서구파와 슬라브파의 갈등도...
카와 샤피로의 전문영역은 역시 러시아 및 소련사입니다.도스토예프스키와 투르게네프 전기는 그 분야를 연구하다 탄생시킨 알찬 부산물이라고 해도 되겠지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카와 샤피로의 러시아 및 소련사 관련 업적은 구하기가 힘듭니다.번역본으로는 샤피로의 <소련공산당사>도 절판되었고, 카의 <볼셰비키 혁명>(전 3권 중 제 1권의 번역. 화다출판사)도 절판되었습니다(나남출판사에서 나온 <러시아 혁명사>는 10권으로 된 러시아 혁명사를 카가 만년에 요약한 것임).그래서 지금 구할 수 있는 이 두 거물의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투르게네프 전기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어울리기 힘들었던 두 거장 도스토예프스키와 투르게네프의 생애를 공부하면서 그들의 소설을 곱씹어 읽는 것도 또다른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소설가인 이 두 사나이의 전기를 쓴 저자들이 문학계통이 아니라 정치외교 및 혁명사가라는 점을 되새기면서, 실력 있는 학자는 학문분과를 넘나드는 저술을 남긴다는 사실도 아울러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