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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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를 살아 있는 존재로 보는 관점과 기계로 보는 관점 사이의 갈등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베르트 마이어의 다음 시를 읽어보자.

 

바로 지금

돌 하나가 깜짝 놀랐다.

나를 보는 순간

죽은 척

나를 피해버렸다.

 

이제, 이 시를 미국 철학자 켄 윌버의 글과 대조해보자.

 

그대와 그대의 노리개인 돌멩이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똑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점뿐이다.

 

  .......마이어의 시가 인격의 생동감과 어린아이 같은 경이감을 활성화시킨다면, 윌버의 글은 듣는 이로 하여금 몸의 영역에서 벗어나 정신의 영역으로, 냉소적 영리함 속으로 들어가게 만든다.(80~81)

 

각자 관지觀地에 따라 다른 느낌을 가지기 마련이다. 나는 노이베르트 마이어의 시를 읽고 우울증 환자 모습을 떠올렸다. 이어서 지구가 인간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고통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번져갔다. 이것은 필경 직업의 영향이다. 자기부정을 공포·불안의 방어기제로 발동시키는 질병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수긍이 가능하다.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우르개 감수성이 우스개 감수성 전면에 놓여 있는 내 내면 풍경화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노이베르트 마이어를 모른다. 켄 윌버는 (꿰뚫어) 안다. 뜨르르한 평판을 지닌 그의 책을 선물 받아 읽다가 돌연 접었다. 이후 다른 사람들의 찬사에 아랑곳없이 나는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와 원효를 비교한 글이 있다기에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행여나 해서 끝까지 읽고는 켄 윌버의 그 책처럼 돌연 접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의 웅혼한(?) 사상은 치명적인 독침을 지닌다. 그 독침에 발라진 맹독의 핵심이 위 본문에 드러나 있다.

 

나는 현저하게 반인간중심주의적 태도를 견지해온 사람이고, 누구보다 낭·풀 본성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사람임에도, 고백하건대 여전히 인간 편에서 사유하고 실천하는 끈질긴 관성을 지녔다. ·풀의 영에 가 닿는 현실적인 문제와 씨름할 때 도구적 접근에 아직도 끌려 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맹성무인지경을 헤맨다. 이 고백과 반성에 입각해 보면 확실히 인간은 모성살해를 자행하면서도 한없이 뜯어가려고 포악질 해대는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전 글(5. 과학 너머)의 마지막 문장이 이 감수성을 향해 낭·풀은 말을 걸어온다.”였다.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감수성을 갖춘 인간이 기다리고 있으면 낭·풀이 먼저 다가온다는 태도가 담긴 말이다. 장구한 역사로 보면 그렇다 싶지만 오늘 현실에서 보면 당연히 인간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 인간은 살해자며 수탈자다. 참회와 감사를 담아 고통의 언어를 앙청하고 경청해야 한다. ·풀의 고통에 책임에 있으므로 치유서약부터 하는 것이 도리다.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5백세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지마다 인간의 소원 또는 탐욕을 담은 수많은 연등이 걸렸다. 불교는 회화나무를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상징으로 여긴다고 들었다. 가격별 다른 색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연등과 피안의 길이 무슨 관련 있을까. 엊그제 그 앞에 예를 갖추어 섰는데 반짝이는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동전이다. 몇 푼 안 되는 저 동전을 수피 틈새에 끼워 넣은 인간은 대체 무엇을 달라고 빌었을까.

 

돌아서다 문득 나 또한 이 풍경 속에 자리 차지하고 있는 파렴치한에 지나지 않는구나!” 탄식을 터뜨린다. 자연을 수단으로 삼는 한 그 어떤 고매한 사상도 몽매다. 이른바 생명이란 이른바 생명에서 흘러나온 일종의 적응방식일 뿐이라는 진리에 무지한 한 어떤 심오한 철학도 과오다. 돌이든 풀이든, 달이든 나무든 인간의 변방인 존재란 없다. 이들을 극진히 모시는 일이 아니라 인과율이나 거대인격신만을 신봉하는 과학과 고등종교가 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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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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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산업적인 다양한 문화권에는 약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식물 치료사들이 있는데, 문화나 대륙, 시대에 상관없이 그들의 경험을 아주 비슷하게 설명한다.......대다수는 약초에 대한 지식이 이성의 훈련이나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비일상적인경험들, 구체적으로 말해 꿈이나 환상, 식물 또는 다른 신성한 존재들과 직접 소통을 통해 식물의 의학적 효능에 대한 개인적이고도 문화적인 지식을 얻었다고 했다........이런 설명이 미신이나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폄하는 형편없이 근시안적일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과학적이지 않기까지 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환상이나 꿈을 통해 얻은 식물의 약효에 대한 지식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약효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55, 60)

 

기독교가 타종교에는 다 -ism을 붙이면서 제 이름에만 -ity를 붙이듯 양의사는 자신이 보편의사라고 생각해서 그냥 의사라고 한다. 이치로 보면 보편의사란 없다. 보편의학이 없으니 당연하다. 모든 의학은 각기 민속의학일 뿐이다. 서양의학이 서양과학을 등에 업고 지구를 점령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보편의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럽 또는 미국의 민속의학이 제국주의와 더불어 지구를 식민화했을 따름이다.

 

동아시아에는 수천 년의 전통을 지닌 민속의학이 있다. 한국은 이를 한의학이라 부른다. 중국은 중의학 또는 국의학이라 부른다. 조선-우리가 북한이라 부르는-은 고려의학이라 부른다. 자신의 전통의학에 그나마 가장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곳은 조선이다. 한국은 의료체계 안에 끼어는 주지만 실제 대우는 한의사를 침쟁이라고 부르는 동네 할아버지 수준에 머문다. 한의대에서 6(예과 2, 본과 4) 동안 교육 받고, 국가고시 합격해 보건복지부장관이 주는 면허를 취득하고서야 한의사가 된다는 사실을 동네 할아버지는 모른다. 양의사는 알면서도 한의학을 민간요법과 구분하지 않는다. 한의학이 무슨 과학이냐고 비아냥거린다. 서양의학은 그렇다면 과학일까? 서양의학이 과학이라는 말은 조··동 언론이라는 말과 영판 닮았다. 특히나 서양정신의학은 거의 찌라시나 다름없다.

 

저토록 과학에 목을 매니 그래 과학이라 인정하자. 그럴 때 나는 민간요법 쓰는 침쟁이다. 과학의 성채 아산병원에서 3년 동안 치료받아도 요지부동이던 역류식도염을 나는 민간요법과 침으로 1개월 만에 고쳤다. 60대 초반이던 환자가 지금 70대 초반인데 그 동안 재발하지 않았으니 이만하면 완치 아닌가. 이럴 때 나는 민간요법 하는 침쟁이로서 과학 하는 양의사를 비아냥거리고 싶은 생각 없다. 딱해서 말이다.

 

서양의학이 과학의 이름으로 비일상적인경험들을 완전히 폐기한 것과 달리 동아시아 전통의학은 이런 앎의 원리를 남겨 놓았다. 이를테면 과학주의와 신비주의 경계에 자리하는 셈이다. 유학의 동아시아 합리성이 신비주의를 대폭 걷어냈지만 여러 낭·풀의 네트워킹에 기대고 있는 한, 신비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 복합처방 한약의 이런 특성을 음shade라 표현한 것은 깊은 암시를 준다. 음은 일상적인 경험으로 포착할 수 없다. 비록 꿈이나 환상, 식물 또는 다른 신성한 존재들과 직접 소통을 대놓고 거론하지는 않지만, 이 말은 진실을 규명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서양과학과 다른 수승한 방편, 그러니까 신비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깊숙이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환상이나 꿈을 통해 얻은 식물의 약효에 대한 지식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약효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즐거운 일이긴 해도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과학과 신비가 동급이면 뭐 구태여 비일상적인경험들을 거쳐 낭·풀을 알아갈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신비가 전해주는 낭·풀의 진실과 진리는 과학이 알지 못하는 무엇이어야 한다. 분석으로는 가 닿지 못할 반야의 지식, 네트워킹에서 솟아나는 창발이 없다면 신비니 영이니 운위할 이유가 없다.

 

현실적인 관심사는 어떻게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느냐다. 진심으로 원할 때 신비가 매끈하게 순순히 열리기에는 현대인이 너무나 영적으로 형해가 된 상태다. 너무나 영적으로 형해가 되었다는 것은 낭·풀의 진실과 진리에서 이탈해 극단적인 동물성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영성을 말할 때 흔히 떠올리는 초월적 인격성은 초월적 동물성의 끝판 왕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문명 이래 잊고 있다. 영성은 그런 관념적 수직성·계층성으로 조작해서 생기는 우월감이 아니다. 진정한 영성은 구체적·물적인 삶을 수평으로 평등하게 번지도록 할 때 조성되는 연대감이다. 이것이 낭·풀의 본성이다. ·풀의 본성이 진짜배기 영성이다. 진짜배기 영성이 일어나는 시공을 우리는 신비세계라 한다. 신비세계가 그 문을 열어줄 인간에게는 낭·풀의 본성인 modularity, networking, collective intelligence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이 감수성을 향해 낭·풀은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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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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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속에 내포된 의미를 과학계는 일반적으로 무시한다. 수학과 같은 과학 시스템이 증명할 수 없고 때로는 상세하게 설명할 수도 없는 가정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 관찰자의 가정에 따라 관찰 내용이 달라진다는 점, 그러므로 특히 그 시스템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기초를 이루는 가정들을 상세하게 설명하려면 그 시스템의 바깥 또는 전혀 다른 시스템 속에 서보아야 한다는 점을 무시한다. 서구문화에는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과학의 기초가 되는 가정들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합법적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과학자들과 서구문명, 공교육 기관의 교과과정 등)이 우주의 작용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유일한 시스템이라 고집하기 때문이다.(53~54)

 

문명 인간은 언어로 존재한다. 언어가 문명의 사유와 행동, 그러니까 경험을 결정짓는다.”(51) 과학도 언어 안에 있다. 과학의 기본 토대인 수학도 언어 안에 있다. 수학을 가장 중립적이며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수의 인과적·기계적 엄격성이다. 그 엄격성은 가정에 기반을 둔 체계에서만 통하는 진리다. 체계내적 진리는 세계 전체 진리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이 우주의 작용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유일한 시스템이라 고집하는 것은 환원주의다. 과학이 환원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언어 자체가 은유며 환유라는 진실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은유도 환유도 수사rhetoric. 수사를 받들고 엄숙 떠는 과학주의는 스스로 어른이라고 착각하는 어린아이다. 어른아이가 참주로 군림하는 언어의 제국이 인간세상은 물론 지구 생태계 전체를 식민지 삼아 살해와 수탈을 자행하고 있다. 살해와 수탈을 막으려면 제국의 유일 공용어를 일개 방언으로 강등해야 한다. 다양한 언어의 네트워킹을 복원해 공용어 시스템을 넘어서야 한다. 나아가 인간 언어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언어를 넘어서면 문명을 넘어선다. 문명을 넘어서야 낭·풀의 진리에 가 닿을 수 있다. ·풀의 진리에 가 닿지 못하면 인류는 대멸종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대멸종 위기 앞에 선 인간은 낭·풀의 진리에 부합하는 종말론적 정치윤리학을 정립해야 한다. 이 정치윤리학은 북미 원주민이 이로쿼이정신으로 구현한 바다. 미국이 껍데기만 흉내 냄으로써 오늘날 세계가 요 모양이다. 이로쿼이정신은 낭·풀의 진리를 따른 것이다: modularity. networking. collective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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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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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지성을 갖춘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믿음에서 비롯한 우리 내면의 상처. 무감각하고 무심한 자연 속에서 인간은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상처.......이런 상처는 인식론적 오류가 빚어낸 불가피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42~43)

 

상처받았다는 표현은 생각 없는 언론이 돈을 노리고 너무 자주 많이 유포하는 바람에 싸구려가 돼버린 대표적인 말이다. 별것 아닌데 대박!”이라 하고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데 완전!”이라 하듯, 툭툭 털고 지나갈 일도 상처라 하고 아무도 주지 않았는데 받았다고 한다. 이런 호들갑이나 엄살은 각자도생을 강요하는 분리문명이 일으킨 질병이자 방어기제다.

 

질병이자 방어기제인 상처는 인간이 교감의 객체 아닌 인식의 대상으로 야생을 소외시킨 결과 나타난 결핍[부분의 오류]이며 편향[형식논리의 오류]이다. 부분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면 내 경계를 부수고 전체세계로 배어들어야 한다. 형식논리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면 모순을 끌어안고 역설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말도 어렵지만 실행은 더 어렵다. 잘못된 인식의 결과를 어떻게 그 인식으로 전복할 수 있겠나. 설혹 이 진실을 깨달았다손 치더라도 깨달음만으로는 구현도 구사도 어림없다. 가슴이 깨뜨려져야 가능하다. 깨뜨려진 가슴이라야 영을 다시 담을 수 있다.

 

가슴은 그러면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까? 깨뜨리기에 충분한 낭·풀을 가슴 위에 놓으면 된다. 그저 정성을 기울인다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가닿고 배우고 신뢰하고 말 건네어 마침내 전체상을 그리며 이야기 짓는다는 말이다. 이런 상상서사는 인간 의식을 변형시켜 다른 차원에 이르도록 함으로써 영의 휘장을 여는 송영이다. 노래든 주문이든 모놀로그든 꿈이든 굿이든 의례든 상상서사가 각자 인연 따라 다르게 진동해서 깨뜨리면 가슴은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활짝 영 세계로 열린다. 결곡한 정신 아닌 신나는 자기 거점 지우기가 영을 감동시킨다.

 

신나게 자기 거점을 지우는 것은 상처 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거기 다시 상처를 내는 것이다. 발본·근원적 동종치료다. 분리의 상처를 치유하려 합일의 작은상처를 기꺼이 스스로 입히는 것이다. 그 작은 상처가 영의 네트워킹에 배어들고 배어나는 무문관이다. 내가 내 인연을 따라 가장 신나게 상처 낼 수 있는 방편을 구사할 일생일대 때가 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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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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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는.......영혼의 정수를 교류하거나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나눌 때 몸속으로 흘러드는 그 즐거운 느낌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많은 생명체와 경험했던 적이 분명히 있었다. 이런 교감은 지구상에서 인류가 누려온 삶의 역사적인 경험 중에서 아주 일상적인 부분에 속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일상의 일부를 구성하는 이런 정서적 교감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 결과 이런 경험을 표현할 일반적인 언어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22~23)

 

할아버지는 앞으로 몸을 기울인 채손을 컵 모양으로 오므려 반짝이는 수면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잠시 후 반짝이는 물을 내 입술 가까이 대어주면서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얘야, 이 물 마셔본 적 있니?”

  비스듬한 내 시선에 할아버지의 두 눈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벌렸다.......물은 아주 달콤하고 시원했다. 몸이 그것을 반기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할아버지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맛이 좋지?” 할아버지의 물음에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할아버지와 나는 다시 연못가에 누었고, 그 무언가가 다시 할아버지 몸에서 내 안으로 흘러들었다.......

  인류 전체는 물론이고 인간 개개인에게 야생의 물로 회귀하는 이 여행은 매우 긴 여정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오래 전에 생긴 우리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법부터 찾아야 한다.(19~20)

 

지난 65년 내 삶을 포용하고 분발시킨 것은 야생의 풍경과 소리와 냄새와 맛, 그리고 살갗 느낌들이었다. 1950년대 중반 강원도 평창 오대산 자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까지 살았던 몸과 마음에 야생은 생각보다 깊고 넓게 배어들었다. 30년 동안 내 곁을 지키셨던 할머니 말씀과 내 기억을 따라 야생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나는 생후 6개월 만에 걷고 한 달 뒤에는 뛰었다. 거기서부터 내 야생 참여적 삶이 시작되었다. 사람에게 치대거나 조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업어준대도 마다했기 때문에 처녀 포대기를 새것인 채로 조카한테 주었다. 아침에 씻기고 먹여만 놓으면 나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산골마을이기 때문에 논은 거의 없고 몇 십 걸음 밖은 바로 숲과 시내로 이어진 비탈 밭이 있었다. 밭에서 거기 심어진 식물들을 먼저 만났다. 나는 그 식물들의 생김새, 색깔, 서로비비며 내는 소리, 냄새, 만질 때 느껴지는 촉감에 늘 처음처럼 매료되었다. 옥수수, , , 수수, 들깨, 고추, 감자, 오이, 호박.......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밭을 한 바퀴 돌았다. 내 말소리를 듣고 할머니께서 누가 왔느냐고 큰 소리로 묻기 일쑤였다. 순례가 끝나면 나는 커다란 돌배나무와 인사를 나누고 서쪽 언덕길을 내려갔다.

 

거기에는 버덩(강원도 사투리로는 버당이라 했는데 사전적 의미와는 조금 달리 내 버당은 우거진 평지 숲이었다.)이 펼쳐져 있었다. 버덩은 어른 눈에는 대수롭지 않지만 아기 눈에는 한없이 넓고 안온한 천국이었다. 온갖 낭·풀에 휘감겨 나는 걷고 달리고 앉고 눕고 말하고 흥얼거렸다. 찔레를 꺾어 먹거나 해당화 꽃잎을 따먹기도 했다. 관목 가지 위에 앙증맞게 놓인 새둥지를 보고 깡충깡충 뛰기도 했다. 봄 연두, 여름 초록, 가을 빨강, 겨울 하양에 감싸인 나는 그야말로 움직이는 낭·풀이었다.

 

버덩의 서북쪽으로는 냇물이 흘렀다.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오대천 지류 가운데 하나다. 그 물은 마시기도 하고 세수도 하고 헤엄도 치고 고기도 잡고 물수제비도 뜨고 썰매도 타고 겨울 끄트머리 떠내려가는 커다란 얼음판을 타기도 하는 풍요 그 자체의 넘실거림이었다. 어린 시절에 꾼 꿈들의 많은 부분이 바로 여기를 무대로 삼았다.

 

동쪽에 우뚝 솟은 산은 가파르기도 할 뿐만 아니라 큰 나무들이 많아 어둑한 숲을 이룬다. 게다가 멧돼지, 늑대, 심지어 호랑이 같은 산짐승 이야기들도 간직한 풍경이라 아기에게 버덩처럼 친숙해지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특별한 에피소드들이 추억의 매듭을 만들어준 공간이었다. 예컨대 잣, 개암, 머루, 다래, 매자, 산사나무 열매(강원도 사투리로 애광이라 한다.)을 따먹으려면 깊은 숲으로 가야 했다. 눈 내리는 날 활강썰매를 타려면 높은 숲으로 가야 했다. 할머니께서 산나물을 채취하실 때 따라가려면 먼 숲으로 가야 했다. 무엇보다 그 산이 품은 특별한 야생은 바로 호랑이굴이라는 이름의 우묵한 바위절벽에 있었다. 백두대간 수호신인 큰 호랑이가 그 굴에 올라가 구멍 끝으로 강릉 앞바다를 보고 나서 우리 집 앞마당을 지나 월정사를 거쳐 백두산으로 간다는 전설 때문에 자부심 어린 공포와 더불어 신비로운 동경을 간직하게 했으니 말이다.

 

우리 집 밭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6번국도가 흐른다. 북쪽으로 곧장 가면 월정사가 나오고 동쪽으로 꺾어져 오대산을 넘으면 6번국도 동해안 기점인 연곡이 나온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1965년 가을에 그 6번국도 남쪽 길을 따라 서울로 떠났다. 야생의 상실과 향수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문명과 그 일부인 인간을 마주한 서울 생활이 내게 준 타격은 실로 다대했다. 그 타격은 우울증을 내 삶의 기조로 자리 잡게 했다. 내 삶은 실패와 방황으로 누덕누덕해졌다. 그때마다 죽음의 늪에서 나를 건져낸 것은 야생의 기운과 언어였다. 무엇보다 내게 배어든 낭·풀의 생명 솔루션이 나를 살아남게 한 이치principle로 작동했다. 그 이치가 바로 영spirit이다. 온전한 충일이 온전한 간신艱辛이라는 영의 구사驅使가 나를 치유하고 소생시켰다.

 

간신은 뭔가? 겨우겨우 (살아간다는 것이). 이게 축복일까? 그렇다. 단연. ·풀의 영에는 잉여가 없다. 잉여는 불안과 탐욕과 무지의 현현三毒이다. 3독은 야생과 교감하고 유대하지 못하는 분리/단절의 소산이다. 분리/단절에서 합치不二而不一로 회귀하려면 매순간 충일하게 겨우겨우 살아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치유의 법, 그러니까 낭·풀의 솔루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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