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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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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지성을 갖춘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믿음에서 비롯한 우리 내면의 상처. 무감각하고 무심한 자연 속에서 인간은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상처.......이런 상처는 인식론적 오류가 빚어낸 불가피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42~43쪽)
“상처받았다”는 표현은 생각 없는 언론이 돈을 노리고 너무 자주 많이 유포하는 바람에 싸구려가 돼버린 대표적인 말이다. 별것 아닌데 “대박!”이라 하고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데 “완전!”이라 하듯, 툭툭 털고 지나갈 일도 “상처”라 하고 아무도 주지 않았는데 “받았다”고 한다. 이런 호들갑이나 엄살은 각자도생을 강요하는 분리문명이 일으킨 질병이자 방어기제다.
질병이자 방어기제인 상처는 인간이 교감의 객체 아닌 인식의 대상으로 야생을 소외시킨 결과 나타난 결핍[부분의 오류]이며 편향[형식논리의 오류]이다. 부분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면 내 경계를 부수고 전체세계로 배어들어야 한다. 형식논리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면 모순을 끌어안고 역설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말도 어렵지만 실행은 더 어렵다. 잘못된 인식의 결과를 어떻게 그 인식으로 전복할 수 있겠나. 설혹 이 진실을 깨달았다손 치더라도 깨달음만으로는 구현도 구사도 어림없다. 가슴이 깨뜨려져야 가능하다. 깨뜨려진 가슴이라야 영을 다시 담을 수 있다.
가슴은 그러면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까? 깨뜨리기에 충분한 낭·풀을 가슴 위에 놓으면 된다. 그저 정성을 기울인다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가닿고 배우고 신뢰하고 말 건네어 마침내 전체상을 그리며 이야기 짓는다는 말이다. 이런 상상서사는 인간 의식을 변형시켜 다른 차원에 이르도록 함으로써 영의 휘장을 여는 송영이다. 노래든 주문이든 모놀로그든 꿈이든 굿이든 의례든 상상서사가 각자 인연 따라 다르게 진동해서 깨뜨리면 가슴은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활짝 영 세계로 열린다. 결곡한 정신 아닌 신나는 자기 거점 지우기가 영을 감동시킨다.
신나게 자기 거점을 지우는 것은 상처 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거기 다시 상처를 내는 것이다. 발본·근원적 동종치료다. 분리의 ‘큰’ 상처를 치유하려 합일의 ‘작은’ 상처를 기꺼이 스스로 입히는 것이다. 그 작은 상처가 영의 네트워킹에 배어들고 배어나는 무문관이다. 내가 내 인연을 따라 가장 신나게 상처 낼 수 있는 방편을 구사할 일생일대 때가 차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