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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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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비산업적인 다양한 문화권에는 약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식물 치료사들이 있는데, 문화나 대륙, 시대에 상관없이 그들의 경험을 아주 비슷하게 설명한다.......대다수는 약초에 대한 지식이 이성의 훈련이나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비일상적인’ 경험들, 구체적으로 말해 꿈이나 환상, 식물 또는 다른 신성한 존재들과 직접 소통을 통해 식물의 의학적 효능에 대한 개인적이고도 문화적인 지식을 얻었다고 했다........이런 설명이 미신이나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폄하는 형편없이 근시안적일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과학적이지 않기까지 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환상이나 꿈을 통해 얻은 식물의 약효에 대한 지식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약효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55, 60쪽)
기독교가 타종교에는 다 -ism을 붙이면서 제 이름에만 -ity를 붙이듯 양의사는 자신이 보편의사라고 생각해서 그냥 ‘의사’라고 한다. 이치로 보면 보편의사란 없다. 보편의학이 없으니 당연하다. 모든 의학은 각기 민속의학일 뿐이다. 서양의학이 서양과학을 등에 업고 지구를 점령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보편의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럽 또는 미국의 민속의학이 제국주의와 더불어 지구를 식민화했을 따름이다.
동아시아에는 수천 년의 전통을 지닌 민속의학이 있다. 한국은 이를 한의학이라 부른다. 중국은 중의학 또는 국의학이라 부른다. 조선-우리가 북한이라 부르는-은 고려의학이라 부른다. 자신의 전통의학에 그나마 가장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곳은 조선이다. 한국은 의료체계 안에 끼어는 주지만 실제 대우는 한의사를 “침쟁이”라고 부르는 동네 할아버지 수준에 머문다. 한의대에서 6년(예과 2년, 본과 4년) 동안 교육 받고, 국가고시 합격해 보건복지부장관이 주는 면허를 취득하고서야 한의사가 된다는 사실을 동네 할아버지는 모른다. 양의사는 알면서도 한의학을 민간요법과 구분하지 않는다. 한의학이 무슨 과학이냐고 비아냥거린다. 서양의학은 그렇다면 과학일까? 서양의학이 과학이라는 말은 조·중·동 언론이라는 말과 영판 닮았다. 특히나 서양정신의학은 거의 ‘찌라시’나 다름없다.
저토록 과학에 목을 매니 그래 과학이라 인정하자. 그럴 때 나는 민간요법 쓰는 침쟁이다. 과학의 성채 아산병원에서 3년 동안 치료받아도 요지부동이던 역류식도염을 나는 민간요법과 침으로 1개월 만에 고쳤다. 60대 초반이던 환자가 지금 70대 초반인데 그 동안 재발하지 않았으니 이만하면 완치 아닌가. 이럴 때 나는 민간요법 하는 침쟁이로서 과학 하는 양의사를 비아냥거리고 싶은 생각 없다. 딱해서 말이다.
서양의학이 과학의 이름으로 ‘비일상적인’ 경험들을 완전히 폐기한 것과 달리 동아시아 전통의학은 이런 앎의 원리를 남겨 놓았다. 이를테면 과학주의와 신비주의 경계에 자리하는 셈이다. 유학의 동아시아 합리성이 신비주의를 대폭 걷어냈지만 여러 낭·풀의 네트워킹에 기대고 있는 한, 신비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 복합처방 한약의 이런 특성을 음蔭shade라 표현한 것은 깊은 암시를 준다. 음은 일상적인 경험으로 포착할 수 없다. 비록 꿈이나 환상, 식물 또는 다른 신성한 존재들과 직접 소통을 대놓고 거론하지는 않지만, 이 말은 진실을 규명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서양과학과 다른 수승한 방편, 그러니까 신비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깊숙이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환상이나 꿈을 통해 얻은 식물의 약효에 대한 지식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약효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즐거운 일이긴 해도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과학과 신비가 동급이면 뭐 구태여 ‘비일상적인’ 경험들을 거쳐 낭·풀을 알아갈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신비가 전해주는 낭·풀의 진실과 진리는 과학이 알지 못하는 무엇이어야 한다. 분석으로는 가 닿지 못할 반야의 지식, 네트워킹에서 솟아나는 창발이 없다면 신비니 영이니 운위할 이유가 없다.
현실적인 관심사는 어떻게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느냐다. 진심으로 원할 때 신비가 매끈하게 순순히 열리기에는 현대인이 너무나 영적으로 형해가 된 상태다. 너무나 영적으로 형해가 되었다는 것은 낭·풀의 진실과 진리에서 이탈해 극단적인 동물성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영성을 말할 때 흔히 떠올리는 초월적 인격성은 초월적 동물성의 ‘끝판 왕’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문명 이래 잊고 있다. 영성은 그런 관념적 수직성·계층성으로 조작해서 생기는 우월감이 아니다. 진정한 영성은 구체적·물적인 삶을 수평으로 평등하게 번지도록 할 때 조성되는 연대감이다. 이것이 낭·풀의 본성이다. 낭·풀의 본성이 진짜배기 영성이다. 진짜배기 영성이 일어나는 시공을 우리는 신비세계라 한다. 신비세계가 그 문을 열어줄 인간에게는 낭·풀의 본성인 modularity, networking, collective intelligence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이 감수성을 향해 낭·풀은 말을 걸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