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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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문명을 떠받치는 뼈대는 세 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식량공급체계, 상하수도체계가 그 둘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바로 보건의료체계입니다. 그렇다면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 문명은 이런 요건, 특히 보건의료 부분의 요건을 만족시켜 왔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그럼에도 제국주의 역사를 통해 이식된 서구식 보건의료체계의 핵심 주체 대다수와 일부 국민들은 한의학을 의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의학을 부정하는 그 분들은 ‘양’의사를 의사라고 부릅니다. 그 명칭은 서양의학이 보편의학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보편의학은 없습니다. 서양의학은 ‘어떤’ 의학일 따름입니다. 양약은 ‘어떤’ 약일 따름입니다. 그 분들의 확신은 서구 문명의 홀로 주체적 독선에 귀의한 데서 비롯하였습니다. 다른 문화권의 역사를 인류학이라 이름 한 것과 맥락이 같습니다. 그런 인지 도식에서 나온 이름이 보완, 대체의학입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오만한 표현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그들이 주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인류학의 대상인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문명을 부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논리대로 따지자면 서양의학이 한의학의 보완, 대체의학인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전도된 식민지적 의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양의학과 한의학은 상-하, 주류-비주류, 심지어 참-거짓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국민보건의료체계 자체는 물론 시장 점유, 의료인 처우, 소비자 의식 등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이 자학 현상은 우울증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울증 치료 하면 신경정신과 양의사와 프로작을 떠올립니다. 한의사와 사역산四逆散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거의,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울증 환우들이 실제로 신경정신과에 가서 어떻게 심리상담 치료를 받는지, 항우울제가 어떤 진단 과정을 거쳐 처방되는지, 그 약이 효과가 없으면 어떤 의학 논리로 전방되는지, 얼마나 많은 환우들이 병의원과 상담소를 떠돌며 헤매는지 안다면 상황은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255-256쪽)


독립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해주지만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상태를 유지 온존시키는 제이차세계대전 이후 제국의 식민지주의 전략을 신식민지주의neocolonialism라 합니다. 이런 전략이 노리는 것은 자기착취의 위장된 본질입니다. 자기착취는 다시 자발성의 위장된 본질을 지닙니다. 신식민지주의 중첩적 질곡 아래 허우적대고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신식민지주의가 만들어낸 세계체계의 부조리 현상에 질병과 의학이 예외일 리 없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 바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과 존엄을 부정하는 마음의 질병입니다. 물론 이 자기부정의 배후에는 결백한 어머니, 정의로운 민주공화국이 앉아 있습니다. 저들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맑은 물에 두 손을 씻었습니다.


이 잔혹한 풍경에 제국의 은총이 구원으로 등장합니다. 은총의 옥함 속에는 프로작과 토건 치료(정신분석, 인지행동치료 등), 그리고 폐쇄병동이 들어 있습니다. 자비가 더 너른 오지랖을 펼치면 그 마름들이 들고 나타나는 ‘인문치료’나 ‘즉문즉설’에도 대박의 기회가 열립니다. 가해자가 가호의 옷을 입고서 피해자의 마지막 피톨까지 착취해가는 형국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우울증을 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일이 그러므로 치료의 큰 시작입니다. 자발적 자기착취 체제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 없이 치료에 임하는 것은 신식민지주의 부역 행위입니다. 범죄 지식을 의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범죄 행동을 의료라 할 수 없습니다. 이 허위와 탐욕을 놓지 않아서 ‘선생님’ 대우를 받는 자들에게 화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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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6장 본문입니다.


子曰 鬼神之爲德 其盛矣乎.

자왈 귀신지위덕 기성의호.

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 

시지이불견 청지이불문 체물이불가유. 

使天下之人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사천하지인제명성복 이승제사 양양호여재기상 여재기좌우.

詩曰 神之格思 不可度思 矧可射思.

시왈 신지격사 불가탁사 신지사사. 

夫微之顯 誠之不可揜 如此夫.

부미지현 성지불가엄 여차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귀신의 덕 됨이 성하도다.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재계하고 깨끗이 하여 옷을 잘 차려입고서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양양하게 그 위에 있는 것 같고 그 좌우에 있는 것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신의 이름을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싫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저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2. 느닷없이 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 귀신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냥 이해하는 그 귀신 이미지를 애써 벗겨낼 일 없다고 생각합니다. 움츠러들고 펼쳐지는 세계 운동으로 합리화하여 설명하는 주자 식 이해가 오히려 별나 보입니다. 그런 의미의 귀신이라면 거기에 무슨 덕이 있을 것이며, 거기다 대고 제사는 또 뭣 하러 지내는 것일까요?


오감에 잡히지는 않으면서 분명하고 적확하게 일어나는 사물의 운행을 인지할 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경외감을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격적 이미지로 떠올리면 바로 그게 귀신이 됩니다. 인간 지식과 지혜로 감당 안 되는 우주의 이치가 신비 영역으로 ‘모셔지는’ 것은 공자 시절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거기에 경건함을 부여한다고 대뜸 미신 운운하는 짓이야말로 방자한 행태입니다. 물론 이는 뭐든지 귀신 역사役事라고 보는 신비주의 종교나 퇴마 신앙과는 다릅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겸허함이 신인동형론신이나 신들에 대해 인간과 유사한 존재인 것처럼 말하는 신에 대한 하나의 관점 일반적으로 표현된 문화현상 수준에서 적절하게 머무르는 게 옳겠지요. 


3. 그러면 중용을 논하는 자리에서 귀신 이야기는 왜 나온 것일까요? 아마도 핵심은 맨 마지막 문장일 것입니다.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 중용의 요체인데 그런 이치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현상이 바로 귀신이다, 이런 맥락입니다. 그것을 귀신 현상으로 묘사한 말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시지이불견 청지이불문 체물이불가유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입니다.


그러므로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의 뜻은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의 뜻과 함께 이해되어야 합니다. 미미한 것의 나타남, 곧 미지현微之顯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 곧 성지불가엄誠之不可揜이 대구對句라는 사실은 누가 봐도 자연스럽습니다. 미微: 성誠, 현顯: 불가엄不可揜,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드러나고 가릴/덮을 수 없는 것의 짝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미함과 정성스러움의 짝입니다. 그 둘은 어떤 의미에서 짝일까요?


우리는 이 대구가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는 문장의 역접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보아도 보이지 않아 미미하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아 벗어남/어긋남이 없으니 내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타나고 가려지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여기 성誠은 성실함, 정성스러움이라는 덕성이라기보다 벗어나지/어긋나지 않는다는 역동적,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미微는 용庸이 되고 성誠은 중中이 됩니다. 중용中庸의 다른 묘사가 바로 성미誠微입니다!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권력화하지 않고, 이득을 챙기지 않고 겸손히 ‘평범한’ 소통을 이루는 일에서 늘 벗어나지 않음이 중용이고 성미입니다. 그 성미의 덕이 성盛하여 만인이 재계하고 깨끗이 하여 옷을 잘 차려입고서 제사로 받드니 도처에 그 대동의 기운이 깃드는[곧 양양호여재기상 여재기좌우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것입니다.


4. 그렇습니다. 핵심은 귀신이 아닙니다. 드러나지 않는 올곧은 소통의 실천으로 대동세상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바로 중용이다, 이게 핵심입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그 안목으로 보면 오늘 이 땅에 준동하는 ‘특별한’ 소인배의 작태란 참으로 가소로운 잡귀 놀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른 길 가도 자랑하지 않는 것이 중용, 그러니까 성미인데 대한민국의 ‘갑’들은 거꾸로 그른 길 가는 것을 대놓고 자랑합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4대강사업, 자원외교 따위 협잡을 회고록에 올려 떠벌이고, 강연하러 돌아다니는 전직 대통령이 그 전형입니다. 세월호사건, 중동독감대란, 역사교과서 획일화 협잡,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 야합을 벌이고도, 그래서 총선에 참패하고도 겸허와 민의를 이야기하는 현직 대통령이 그 모범입니다. 저들은 그것이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안다면 모름지기 의로운 고난이라 신앙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최고 헌법기관이 이렇게 전형이 되어주고 모범을 보여주니 그 수하들은 파안대소하며 검찰에 출두하고 자식 잃어 울부짖는 부모 앞에서 득의만면 인증 샷 올리는 것입니다. 똘똘 뭉쳐 인면수심을 자랑하는 ‘갑’들의 반중용이 도를 넘고 있는 이 때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귀신일랑 다름 아닌 필부필부匹夫匹婦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아닐는지요. 그 귀신들, 화산으로 폭발할 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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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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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재된 억압은 그 무엇보다 감정을 은폐합니다. 이런 은폐체제는 두 가지 동력으로 굴러갑니다.

  하나는 감정을 신체 언어로 우회시키는 것입니다. 예컨대 ‘슬프다’는 감정을 ‘폐부를 찌른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만 우회가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랫사람, 특히 여성의 감정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통속적 유교 사회의 지배 이익을 유지하고 확대재생산하는 정치적 도구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도구가 바로 문자입니다. 입말과 다른 글말을 사용하는 지배층의 소통 차단 전략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민중의 감정을 생생한 입말로 표현한 것이 내구력을 갖춘 사회 동원력으로 나타나려면 입말과 일치하는 글말로 옮겨져야 합니다. 입말은 소문이지만 글말은 격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간파한 지배층이 입말과 글말을 철두철미하게 갈라놓았습니다. 조선 500년 역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이 입말 글말 분리 통치사입니다. 구태여 조선에 국한한 이유는 입말 글말 일치를 이룬 세종의 혁명이 결국은 물거품이 되어버린 사실 때문입니다.

  이렇듯 입말과 글말의 불일치는 우리가 감정 에너지를 왜곡 없이 드러내고 건강하게 수습하는 서사 능력의 공유 가능성을 원천봉쇄해 버렸습니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적 차원에서 억압을 풀어내어 생명의 물길을 쉼 없이 흐르게 하는 일이 가로막히자 나타난 병리 현상이 화병, 즉 한국형 우울증입니다. 결국 화병은 매우 사회정치적 개념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우울증을 앓는 한국인은 사회정치적 억압을 개인의 인격과 삶으로 짊어진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에서 우울증을 말하려면 서구적 지평을 넘어서는 고유한 문화목록어inventory가 필요합니다.(253-254쪽)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마음의 상처는 몸에 각인됩니다. 내재화된 상처는 유발사건을 무의식 상태에서 재연하는 한편 관련된 신체의 감각을 마비시키거나 반대로 과민하게 만듭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감정의 결들은 다양성을 잃고 상처감정 중심으로 단순하게 재편됩니다. 심각하게는 접히고 구겨진 감정이 흑백 스펙트럼에 사로잡힌 채 한평생 계속되기도 합니다.


치료란 그러므로 말의 복원입니다. 말을 복원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표현하도록 펼쳐놓는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표현하려면 살아 숨 쉬는 입말을 구사해야 합니다. 살아 숨 쉬는 입말이 빚어내는 이야기는 서사를 남깁니다. 남겨진 서사는 글말을 통해 서사공동체를 이룹니다. 서사공동체는 소통으로 삶을 공유합니다. 진정으로 삶을 공유하는 서사공동체에는 마음병이 틈입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급격하게 서사공동체성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소통을 앞장서서 가로막는 장본인이 권력의 중심입니다. 살아 숨 쉬지 않는 요령부득의 입말과 의미가 전도된 출처불명의 글말이 뒤죽박죽 섞인 언어를 공식으로 산포합니다. 자본과 종교는 그것을 과장하고 미화합니다. 거짓의 독을 먹은 시민이 그 앞에서 쓰러지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울증 앓는 중년 여성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를테면 독서중독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로 읽는 책은 비문학 인문 이론서였습니다. 접히고 구겨진 감정의 결을 되살리기 위해 잠시 그런 책을 내려놓고 문학, 특히 시를 읽어보라고 조언했습니다. 김선우, 문태준, 고영민 같은 시인을 추천해주었습니다. 그가 다시 찾아와 제게 시 한 편을 내밀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 아니 시어 하나에 영혼이 움찔거리는 경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오줌을 누다

한 방울

오줌 방울의 느낌


물은 빠져나가니까

몸에 갇히지 않으니까

어디서든 기어코 흐르니까


가두는 자가 아니라

흐르고 빠져나가는

저 역할이 마음에 든다······· 중얼거리며


물로 태어나리라

처음은 비


입술로 스며 그대 몸속

어루만져 속속들이 살린 후

마침내 그대를 빠져나가는


김선우의 최근 시집 『녹턴』에 실린 <한 방울>이란 시입니다. 저 또한 과연 김선우다, 했습니다. 바로 뒤이어 그가 ‘아래’의 얼얼한 통증을 호소합니다. 그가 ‘아래’라고 표현한 것은 부끄러움 탓도 있지만 정확히 질 부위인지 항문 부위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성학대의 알아차림이 전해주는 몸 신호였습니다. 시의 울림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몸, 특히 그 부위와 대화하라 일러주었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방치해서 미안하다. 여태껏 견뎌주어서 고맙다. 이제 함께 이야기해보자.’ 말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간곡히 질문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질문이야말로 말을 복원하는 일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서사공동체가 되어 스스로 치료를 완성해갑니다. 그의 길이 우리사회 아픈 사람 모두에게 이어지는 꿈을 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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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5장 본문입니다.


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 詩曰 妻子好合 如鼓瑟琴 兄弟旣翕 和樂且耽 宜爾室家 樂爾帑. 子曰 父母其順矣乎.

군자지도 비여행원필자이 비여등고필자비. 시왈 처자호합 여고슬금 형제기흡 화락차탐 의이실가 낙이처노. 자왈 부모기순의호.


군자의 도는 비유컨대 먼 길 가는 일도 가까운 데서 시작하고 높은 곳 오르는 일도 낮은 데서 시작하는 것과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처자가 화합하니 거문고 타는 듯하네. 형제가 어울리니 익히 즐겁구나. 온 가정이 기쁘고 온 가족이 즐겁도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가 아마 (중용의 이치를) 따랐을 게다.”


2. 군자의 도, 즉 중용은 마법도 신비도 아닙니다. 마치 지금 여기서 내디디는 첫 발자국에서 시작하여 꾸준히 가다 보면 어느덧 천리 밖에 당도하듯, 낮은 자락에서 출발하여 땀 흘리며 오르다 보면 아득한 산꼭대기에 다다르듯, 그렇게 중용은 실천되는 것입니다.


중용은 과정입니다. 중용은 굽이굽이 흐르는 강입니다. 너절해 보이는 일상사 갈래 갈래마다 스며드는 빛줄기입니다. 문득 깨닫는 인식론적 격절 경험으로는 중용을 말할 자격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저자를 떠난 면벽 용맹정진으로는 어림없는 게 중용 실천입니다.


평범한 가정의 처자, 형제가 이루는 소통에서 하루하루 중용을 찾을 수 없다면 아무리 고귀한 가치인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입니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일구어내는 사소한 행복의 고갱이 속에 중용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중용이 아닙니다.


3. 공자께서 또 한 번 정곡을 찌르십니다. “가정이 평화로운 것을 보니 아마도 그 부모가 중용의 이치를 따른 모양이로구나!” 부모의 일상적 실천이 길이 되고 강이 되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 전체의 평화가 이룩되는 도리를 천명한 만고의 명언입니다.


허다한 고수들이 순順을 안락함, 순조로움 등으로 이해했지만 우리는 그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 읽으면 부모의 안락함과 순조로움이 결과적 상태가 됩니다. 그것은 이 장 전체 문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앞 장과 비교해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여기 부모는 제14장 부부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중용 실천의 발원지이자 모든 사회, 국가, 나아가 전 인류의 요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부모의 순 역시 동사입니다. 중용의 도리를 ‘따른’ 원인적 실천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본 장의 앞부분 비유 문장과 뒷부분 인용 문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4. 중용 실천의 발원지가 부부/부모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음미하겠습니다. 한 개인이 아닌 두 사람, 그것도 평등한 여성과 남성, 더군다나 부부/부모가 빚어내는 ‘관통과 흡수’가 중용의 요체라는 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귀중한 통찰은 바로 중용 자체가 공동체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중용은 그러므로 개인적 덕목이라는 굴레를 벗어야 합니다. 개별적 명상과 웰 빙의 감옥에서 놓여나야 합니다. 사회적 실천 개념으로 제자리를 찾아야 제대로 된 중용 길이 열립니다. 


사회는 다름 아닌 부모형제, 그러니까 가족에서 출발합니다. 가족의 중용으로써 사회국가의 중용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치는 이러하거니와 현실은 어떤가요. 한 해에 100편 이상 제작되는 드라마의 주요 갈등 유발 요인은 가족 간의 무조건적인 사랑, 아니 반인륜적 애착, 그러니까 반중용입니다. 자식이라면, 부모라면 범죄를 저질러도 싸고도는 맹목적 애지중지가 지겹도록 변주되는 것이 대한민국 드라마의 핵심이자 대한민국의 핵심입니다. 가족 사랑이 세상의 요람이듯 가족 집착이 세상의 무덤입니다.


가족의 유사품, 그러니까 온갖 종류의 패거리가 상하좌우로 포진해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학교 출신이냐, 고향이 어디냐, 무슨 당이냐, 무슨 종교를 믿느냐·······. 이것은 고전적 패거리입니다. 요즘은 배우, 가수, 개그맨, 아나운서, 운동선수도 엄청난 패거리입니다. 이 모든 패거리의 원조는 아득히 올라가면 진골이고 근세로 내려오면 서인 노론입니다. 물론 이 둘은 본질이 같은 집단입니다. 그들이 바로 조선을 일제에 팔아먹은 친일파입니다. 이 친일파는 1400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갑중 갑 패거리로 군림합니다. 이들이 세월호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중동독감대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역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다시 팔아먹었습니다. 이들은 중용의 공동체성 그 정확한 반대 지점에 서 있습니다.



결국 중용의 공동체적 실천은 평범한, 그래서 버려진 사람들의 낮은 연대, 슬픔의 연대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던 어르신들, 밀양 송전탑 할머니들, 강정마을 주민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그리고 세월호사건 유족들. 이름 없이, 소리 없이 이들 곁에 앉아 있는 씨알(본디 아래 아로 쓴 알)[민중民衆]. 멀리서 두 손 모으고 눈시울 붉히는 ‘소시민’들. 이들이 공동체 중용의 화신입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중용은 여전히 근본적radical입니다. 급진적radica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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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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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녹여냈다고 해서 그 다음 삶이 온통 기쁨이 된다면 그것은 치유가 아닙니다. 허황된 마법입니다. 병도 치료도 삶, 그 도저한 현실의 일부입니다. 현실 한 가운데서 병들고, 현실 한 가운데서 치료됩니다. 마침내 현실 한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214쪽)


마음병을 치료하는 것은 내면을 정화하는 것과 다릅니다. 격정을 풀어 평상심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정화의 맥락이 없지는 않으나 마음병 치료의 핵심은 도리어 삶의 타자적 조건에 유연하게 섞여들 수 있는 불순물 상태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본질상 상호작용인 운동입니다. 상호작용이란 서로 섞여들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서로 섞여들지 않는, 그래서 청정한 순물질의 마음을 경지로 여기는 가르침을 흔히 소승이라 하지만 이는 휴먼스케일 바깥 이야기이므로 당최 수레 자체가 아닙니다. 수레는 구름 아닌 땅 위에서 구르는 물건입니다. 땅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현실은 언제 어디서나 경계사건의 시공입니다. 경계사건은 불순물들이 일으키는 변화입니다. 변화가 치료입니다.


지난 4월 20일 『안녕, 우울증』리뷰58 <모국어 치유(2)>에서 말씀드렸던 ‘마흔네 살 싱그러운 처녀’의 결혼식이 30일 오후에 치러졌습니다. 그 동안 기억할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이 참석했고, 주례도 여러 번 섰지만, 결혼식에서 울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사랑했던 남자가 결혼식 직전 일방적으로 배신하고 파혼 선언을 해버려 엄청난 고통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몸부림쳐야 했던 그의 곁에 제가 있었기에 남다른 감회가 든 것이었습니다. 참혹한 슬픔의 순간들이 아프게 되살아났습니다. 기나긴 발효기간 뒤 전개된 눈부신 사태가 감격스러웠습니다. 한의원 진료실에 앉아 그가 흘린 눈물, 자분자분 풀어놓던 이야기 속 그 어디에 이런 변화의 싹이 심어져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변화는 현실에서만 일어납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변화만이 참된 변화입니다. 참된 변화는 진실의 전체성, 그러니까 비대칭적 대칭성을 향해 부단히 나아갑니다. 비대칭적 대칭성의 진실은 슬픔 뒤에 기쁨을 일으키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기쁨 뒤에 슬픔도 일으켜 건강한 감당이 일어나도록 이끕니다. 슬픔만 있는 현실이 없듯 기쁨만 있는 현실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나긴 슬픔의 날을 지나왔다고 해서 저 마흔네 살 아름다운 신부가 살아갈 날들에 기쁨만 깃들기 바라는 것은 그저 수사修辭로 머물러 족합니다. 슬픔이 밀려오면 인격을 다해 맞아들이고 인격을 다해 흘려보내는 그이기를 빌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벌써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축하의 술잔을 오래 나눈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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