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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내재된 억압은 그 무엇보다 감정을 은폐합니다. 이런 은폐체제는 두 가지 동력으로 굴러갑니다.
하나는 감정을 신체 언어로 우회시키는 것입니다. 예컨대 ‘슬프다’는 감정을 ‘폐부를 찌른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만 우회가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랫사람, 특히 여성의 감정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통속적 유교 사회의 지배 이익을 유지하고 확대재생산하는 정치적 도구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도구가 바로 문자입니다. 입말과 다른 글말을 사용하는 지배층의 소통 차단 전략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민중의 감정을 생생한 입말로 표현한 것이 내구력을 갖춘 사회 동원력으로 나타나려면 입말과 일치하는 글말로 옮겨져야 합니다. 입말은 소문이지만 글말은 격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간파한 지배층이 입말과 글말을 철두철미하게 갈라놓았습니다. 조선 500년 역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이 입말 글말 분리 통치사입니다. 구태여 조선에 국한한 이유는 입말 글말 일치를 이룬 세종의 혁명이 결국은 물거품이 되어버린 사실 때문입니다.
이렇듯 입말과 글말의 불일치는 우리가 감정 에너지를 왜곡 없이 드러내고 건강하게 수습하는 서사 능력의 공유 가능성을 원천봉쇄해 버렸습니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적 차원에서 억압을 풀어내어 생명의 물길을 쉼 없이 흐르게 하는 일이 가로막히자 나타난 병리 현상이 화병, 즉 한국형 우울증입니다. 결국 화병은 매우 사회정치적 개념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우울증을 앓는 한국인은 사회정치적 억압을 개인의 인격과 삶으로 짊어진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에서 우울증을 말하려면 서구적 지평을 넘어서는 고유한 문화목록어inventory가 필요합니다.(253-254쪽)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마음의 상처는 몸에 각인됩니다. 내재화된 상처는 유발사건을 무의식 상태에서 재연하는 한편 관련된 신체의 감각을 마비시키거나 반대로 과민하게 만듭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감정의 결들은 다양성을 잃고 상처감정 중심으로 단순하게 재편됩니다. 심각하게는 접히고 구겨진 감정이 흑백 스펙트럼에 사로잡힌 채 한평생 계속되기도 합니다.
치료란 그러므로 말의 복원입니다. 말을 복원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표현하도록 펼쳐놓는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표현하려면 살아 숨 쉬는 입말을 구사해야 합니다. 살아 숨 쉬는 입말이 빚어내는 이야기는 서사를 남깁니다. 남겨진 서사는 글말을 통해 서사공동체를 이룹니다. 서사공동체는 소통으로 삶을 공유합니다. 진정으로 삶을 공유하는 서사공동체에는 마음병이 틈입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급격하게 서사공동체성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소통을 앞장서서 가로막는 장본인이 권력의 중심입니다. 살아 숨 쉬지 않는 요령부득의 입말과 의미가 전도된 출처불명의 글말이 뒤죽박죽 섞인 언어를 공식으로 산포합니다. 자본과 종교는 그것을 과장하고 미화합니다. 거짓의 독을 먹은 시민이 그 앞에서 쓰러지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울증 앓는 중년 여성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를테면 독서중독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로 읽는 책은 비문학 인문 이론서였습니다. 접히고 구겨진 감정의 결을 되살리기 위해 잠시 그런 책을 내려놓고 문학, 특히 시를 읽어보라고 조언했습니다. 김선우, 문태준, 고영민 같은 시인을 추천해주었습니다. 그가 다시 찾아와 제게 시 한 편을 내밀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 아니 시어 하나에 영혼이 움찔거리는 경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오줌을 누다
한 방울
오줌 방울의 느낌
물은 빠져나가니까
몸에 갇히지 않으니까
어디서든 기어코 흐르니까
가두는 자가 아니라
흐르고 빠져나가는
저 역할이 마음에 든다······· 중얼거리며
물로 태어나리라
처음은 비
입술로 스며 그대 몸속
어루만져 속속들이 살린 후
마침내 그대를 빠져나가는
김선우의 최근 시집 『녹턴』에 실린 <한 방울>이란 시입니다. 저 또한 과연 김선우다, 했습니다. 바로 뒤이어 그가 ‘아래’의 얼얼한 통증을 호소합니다. 그가 ‘아래’라고 표현한 것은 부끄러움 탓도 있지만 정확히 질 부위인지 항문 부위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성학대의 알아차림이 전해주는 몸 신호였습니다. 시의 울림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몸, 특히 그 부위와 대화하라 일러주었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방치해서 미안하다. 여태껏 견뎌주어서 고맙다. 이제 함께 이야기해보자.’ 말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간곡히 질문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질문이야말로 말을 복원하는 일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서사공동체가 되어 스스로 치료를 완성해갑니다. 그의 길이 우리사회 아픈 사람 모두에게 이어지는 꿈을 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