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5장 본문입니다.
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 詩曰 妻子好合 如鼓瑟琴 兄弟旣翕 和樂且耽 宜爾室家 樂爾妻帑. 子曰 父母其順矣乎.
군자지도 비여행원필자이 비여등고필자비. 시왈 처자호합 여고슬금 형제기흡 화락차탐 의이실가 낙이처노. 자왈 부모기순의호.
군자의 도는 비유컨대 먼 길 가는 일도 가까운 데서 시작하고 높은 곳 오르는 일도 낮은 데서 시작하는 것과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처자가 화합하니 거문고 타는 듯하네. 형제가 어울리니 익히 즐겁구나. 온 가정이 기쁘고 온 가족이 즐겁도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가 아마 (중용의 이치를) 따랐을 게다.”
2. 군자의 도, 즉 중용은 마법도 신비도 아닙니다. 마치 지금 여기서 내디디는 첫 발자국에서 시작하여 꾸준히 가다 보면 어느덧 천리 밖에 당도하듯, 낮은 자락에서 출발하여 땀 흘리며 오르다 보면 아득한 산꼭대기에 다다르듯, 그렇게 중용은 실천되는 것입니다.
중용은 과정입니다. 중용은 굽이굽이 흐르는 강입니다. 너절해 보이는 일상사 갈래 갈래마다 스며드는 빛줄기입니다. 문득 깨닫는 인식론적 격절 경험으로는 중용을 말할 자격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저자를 떠난 면벽 용맹정진으로는 어림없는 게 중용 실천입니다.
평범한 가정의 처자, 형제가 이루는 소통에서 하루하루 중용을 찾을 수 없다면 아무리 고귀한 가치인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입니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일구어내는 사소한 행복의 고갱이 속에 중용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중용이 아닙니다.
3. 공자께서 또 한 번 정곡을 찌르십니다. “가정이 평화로운 것을 보니 아마도 그 부모가 중용의 이치를 따른 모양이로구나!” 부모의 일상적 실천이 길이 되고 강이 되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 전체의 평화가 이룩되는 도리를 천명한 만고의 명언입니다.
허다한 고수들이 순順을 안락함, 순조로움 등으로 이해했지만 우리는 그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 읽으면 부모의 안락함과 순조로움이 결과적 상태가 됩니다. 그것은 이 장 전체 문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앞 장과 비교해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여기 부모는 제14장 부부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중용 실천의 발원지이자 모든 사회, 국가, 나아가 전 인류의 요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부모의 순 역시 동사입니다. 중용의 도리를 ‘따른’ 원인적 실천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본 장의 앞부분 비유 문장과 뒷부분 인용 문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4. 중용 실천의 발원지가 부부/부모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음미하겠습니다. 한 개인이 아닌 두 사람, 그것도 평등한 여성과 남성, 더군다나 부부/부모가 빚어내는 ‘관통과 흡수’가 중용의 요체라는 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귀중한 통찰은 바로 중용 자체가 공동체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중용은 그러므로 개인적 덕목이라는 굴레를 벗어야 합니다. 개별적 명상과 웰 빙의 감옥에서 놓여나야 합니다. 사회적 실천 개념으로 제자리를 찾아야 제대로 된 중용 길이 열립니다.
사회는 다름 아닌 부모형제, 그러니까 가족에서 출발합니다. 가족의 중용으로써 사회국가의 중용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치는 이러하거니와 현실은 어떤가요. 한 해에 100편 이상 제작되는 드라마의 주요 갈등 유발 요인은 가족 간의 무조건적인 사랑, 아니 반인륜적 애착, 그러니까 반중용입니다. 자식이라면, 부모라면 범죄를 저질러도 싸고도는 맹목적 애지중지가 지겹도록 변주되는 것이 대한민국 드라마의 핵심이자 대한민국의 핵심입니다. 가족 사랑이 세상의 요람이듯 가족 집착이 세상의 무덤입니다.
가족의 유사품, 그러니까 온갖 종류의 패거리가 상하좌우로 포진해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학교 출신이냐, 고향이 어디냐, 무슨 당이냐, 무슨 종교를 믿느냐·······. 이것은 고전적 패거리입니다. 요즘은 배우, 가수, 개그맨, 아나운서, 운동선수도 엄청난 패거리입니다. 이 모든 패거리의 원조는 아득히 올라가면 진골이고 근세로 내려오면 서인 노론입니다. 물론 이 둘은 본질이 같은 집단입니다. 그들이 바로 조선을 일제에 팔아먹은 친일파입니다. 이 친일파는 1400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갑중 갑 패거리로 군림합니다. 이들이 세월호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중동독감대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역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다시 팔아먹었습니다. 이들은 중용의 공동체성 그 정확한 반대 지점에 서 있습니다.

결국 중용의 공동체적 실천은 평범한, 그래서 버려진 사람들의 낮은 연대, 슬픔의 연대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던 어르신들, 밀양 송전탑 할머니들, 강정마을 주민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그리고 세월호사건 유족들. 이름 없이, 소리 없이 이들 곁에 앉아 있는 씨알(본디 아래 아로 쓴 알)[민중民衆]. 멀리서 두 손 모으고 눈시울 붉히는 ‘소시민’들. 이들이 공동체 중용의 화신입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중용은 여전히 근본적radical입니다. 급진적radical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