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6장 본문입니다.


子曰 鬼神之爲德 其盛矣乎.

자왈 귀신지위덕 기성의호.

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 

시지이불견 청지이불문 체물이불가유. 

使天下之人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사천하지인제명성복 이승제사 양양호여재기상 여재기좌우.

詩曰 神之格思 不可度思 矧可射思.

시왈 신지격사 불가탁사 신지사사. 

夫微之顯 誠之不可揜 如此夫.

부미지현 성지불가엄 여차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귀신의 덕 됨이 성하도다.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재계하고 깨끗이 하여 옷을 잘 차려입고서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양양하게 그 위에 있는 것 같고 그 좌우에 있는 것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신의 이름을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싫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저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2. 느닷없이 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 귀신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냥 이해하는 그 귀신 이미지를 애써 벗겨낼 일 없다고 생각합니다. 움츠러들고 펼쳐지는 세계 운동으로 합리화하여 설명하는 주자 식 이해가 오히려 별나 보입니다. 그런 의미의 귀신이라면 거기에 무슨 덕이 있을 것이며, 거기다 대고 제사는 또 뭣 하러 지내는 것일까요?


오감에 잡히지는 않으면서 분명하고 적확하게 일어나는 사물의 운행을 인지할 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경외감을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격적 이미지로 떠올리면 바로 그게 귀신이 됩니다. 인간 지식과 지혜로 감당 안 되는 우주의 이치가 신비 영역으로 ‘모셔지는’ 것은 공자 시절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거기에 경건함을 부여한다고 대뜸 미신 운운하는 짓이야말로 방자한 행태입니다. 물론 이는 뭐든지 귀신 역사役事라고 보는 신비주의 종교나 퇴마 신앙과는 다릅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겸허함이 신인동형론신이나 신들에 대해 인간과 유사한 존재인 것처럼 말하는 신에 대한 하나의 관점 일반적으로 표현된 문화현상 수준에서 적절하게 머무르는 게 옳겠지요. 


3. 그러면 중용을 논하는 자리에서 귀신 이야기는 왜 나온 것일까요? 아마도 핵심은 맨 마지막 문장일 것입니다.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 중용의 요체인데 그런 이치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현상이 바로 귀신이다, 이런 맥락입니다. 그것을 귀신 현상으로 묘사한 말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시지이불견 청지이불문 체물이불가유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입니다.


그러므로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의 뜻은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의 뜻과 함께 이해되어야 합니다. 미미한 것의 나타남, 곧 미지현微之顯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 곧 성지불가엄誠之不可揜이 대구對句라는 사실은 누가 봐도 자연스럽습니다. 미微: 성誠, 현顯: 불가엄不可揜,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드러나고 가릴/덮을 수 없는 것의 짝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미함과 정성스러움의 짝입니다. 그 둘은 어떤 의미에서 짝일까요?


우리는 이 대구가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는 문장의 역접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보아도 보이지 않아 미미하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아 벗어남/어긋남이 없으니 내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타나고 가려지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여기 성誠은 성실함, 정성스러움이라는 덕성이라기보다 벗어나지/어긋나지 않는다는 역동적,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미微는 용庸이 되고 성誠은 중中이 됩니다. 중용中庸의 다른 묘사가 바로 성미誠微입니다!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권력화하지 않고, 이득을 챙기지 않고 겸손히 ‘평범한’ 소통을 이루는 일에서 늘 벗어나지 않음이 중용이고 성미입니다. 그 성미의 덕이 성盛하여 만인이 재계하고 깨끗이 하여 옷을 잘 차려입고서 제사로 받드니 도처에 그 대동의 기운이 깃드는[곧 양양호여재기상 여재기좌우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것입니다.


4. 그렇습니다. 핵심은 귀신이 아닙니다. 드러나지 않는 올곧은 소통의 실천으로 대동세상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바로 중용이다, 이게 핵심입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그 안목으로 보면 오늘 이 땅에 준동하는 ‘특별한’ 소인배의 작태란 참으로 가소로운 잡귀 놀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른 길 가도 자랑하지 않는 것이 중용, 그러니까 성미인데 대한민국의 ‘갑’들은 거꾸로 그른 길 가는 것을 대놓고 자랑합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4대강사업, 자원외교 따위 협잡을 회고록에 올려 떠벌이고, 강연하러 돌아다니는 전직 대통령이 그 전형입니다. 세월호사건, 중동독감대란, 역사교과서 획일화 협잡,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 야합을 벌이고도, 그래서 총선에 참패하고도 겸허와 민의를 이야기하는 현직 대통령이 그 모범입니다. 저들은 그것이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안다면 모름지기 의로운 고난이라 신앙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최고 헌법기관이 이렇게 전형이 되어주고 모범을 보여주니 그 수하들은 파안대소하며 검찰에 출두하고 자식 잃어 울부짖는 부모 앞에서 득의만면 인증 샷 올리는 것입니다. 똘똘 뭉쳐 인면수심을 자랑하는 ‘갑’들의 반중용이 도를 넘고 있는 이 때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귀신일랑 다름 아닌 필부필부匹夫匹婦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아닐는지요. 그 귀신들, 화산으로 폭발할 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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