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 TED상 수상자가 제안하는 더 나은 삶에 이르는 12단계
카렌 암스트롱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자비롭게 살아오지 못했으며 심지어 종교의 이름으로 인류의 고통을 가중시키기도 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한다.


* 도덕과 종교의 중심에 자비를 회복할 것

* 폭력과 증오와 경멸을 낳는 그 어떤 경전의 해석도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옛 원칙으로 돌아갈 것

* 젊은이들에게 다른 전통과 종교와 문화를 정확하고도 경의가 담긴 정보로써 전달할 것

* 문화적·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도록 장려할 것

* 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겪는 고통을 올바른 정보에 터해 공감하도록 장려할 것(14쪽)


오늘 인류 대부분이 서구가 주도한 문명에 제압당한 채 그려내는 수많은 삶의 풍경화, 그 제목은 “무자비” 단 하나뿐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헬 조선’으로 회자되는 대한민국의 지배집단 벌인 협잡만 하더라도 무자비의 극단이니 말이다. 거기에 부역하는 통속한 주류종교의 영성 없는 훤화 또한 무자비를 자비로 둔갑시켜 살포하는 ‘개소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도덕과 종교의 중심에 자비를 누락시키며, 폭력과 증오와 경멸을 낳는 경전 해석을 정통으로 인정하며, 젊은이들에게 다른 전통과 문화를 부정확하고도 적의가 담김 정보로써 전달하며, 문화적·종교적 획일성을 강요하며, 모든 인간이 겪는 고통을 그른 정보에 터해 무감하도록 강요하는 세상이다.


일요일(12일) 오후 서울시청 지하 시민청 갤러리에 갔다. 세월호 엄마들의 뜨개 전시가 있기 때문이다. 마침 엄마들과 만나는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 셋이 나왔다. 4반의 웅기 엄마, 6반의 영만 엄마, 순범 엄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이들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색채는 단순했고 어둠의 색체는 복잡했다. 이들을 어둠으로 몰아넣는 무자비 행태는 참으로 무작스러운 것이었다.


빨갱이다, 시체 팔이다, 세금 도둑이다·······이미 진부한 욕이다. 울면 운다고 욕한다. 웃으면 웃는다고 욕한다. 외치면 외친다고 욕한다. 침묵하면 침묵한다고 욕한다. 움직이면 움직인다고 욕한다. 가만있으면 가만있다고 욕한다. 손톱 색칠했다고 욕한다. 머리 염색했다고 욕한다.·······대체 뭘 어쩌란 것인가.


엄마들은 이런 무자비의 질곡 속에서 뜨개를 배우기 시작했다. 뜨개 한 땀에 눈물 한 방울이 응결되어 무자비의 폭력을 뚫고 자비를 인간 세상에 다시 꺼내놓을 수 있었다. 애통과 환희가 하나로 드러나는 순간을 저 뜨개에 고스란히 새겨 넣을 수 있었다. 권력이 재벌이 언론이 종교가 무참히 버린 세월호 엄마들이 이 무자비한 세상을 다시 자비의 세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본디 버린 자들이 버려놓은 세상을 바로잡는 것은 버려진 사람들이다. 버려짐으로써 새로이 열린 인식론적 지평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부터 먼저 바꾼다. 자신의 삶을 바꾼 사람들에게 거칠 것은 없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을 버린 자의 심장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들의 깊은 살갗을 만진다. 정토는 불교에 있지 않다. 하느님나라는 기독교에 있지 않다. 세월호 엄마들의 발길과 손끝에 있다. 직접 가서 만져보면 느낄 수 있다.






* 마지막 사진은 신해욱 시인이 찍어 트위터에 올린 것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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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3 2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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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4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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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 TED상 수상자가 제안하는 더 나은 삶에 이르는 12단계
카렌 암스트롱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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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육십 년 동안의 삶은 네게서 비롯하여 나를 스치고 네게로 돌아가는 삶이었다. 식물적 생명력과 감각으로 우울을 견뎌온 청록 빛 바다였다. 남은 날들은 내게서 비롯하여 네게로 번져가는 삶을 살고 싶다. 주홍 빛 땅을 꿈꾼다. 하필 이 각성의 변곡점에서 만난 책이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다. 주의를 기울이고 사색하며 통독했다. 책의 내용이 심오하거나 치밀해서라기보다 변화할 나의 삶을 위하여 음미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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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소소하고 미미하게 소소하고 미미한 것에 배어드는 마음 짓에 심취하는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무엇이든 작은 것에 이슥한 눈길 두고 챙겨본다. 책도 그렇다. 광화문 교보에서 홀연 눈에 들어온 『개소리에 대하여』는 단연 작다. 제목을 보는 순간 왜 작은지, 왜 작아서 육중한지 알아차렸다. 대뜸 집어 들고 냉큼 사버렸다. 읽은 뒤 기민한 내 행위를 충분히 지지해줄만한 책이라고 판단 내렸다.


1. 대한민국은 개판민국이다. 개소리가 말아먹은 최하위 국가품격을 지닌 복마전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전대미문의 복마전을 거짓말하는 마귀가 장악한 곳이라고 착각해왔다. 박근혜 떨거지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개소리쟁이’다. 참과 거짓의 구분을 전제하고 말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과 거짓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먹는 주둥이만 있고 싸는 똥구멍은 없는 진드기와 같이 오로지 돈 된다면 뭐든 닥치는 대로 떠드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짓거리에 마땅한 대응책을 찾지 못한 우리에게 작아서 육중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 이 책의 빛나는 가치다.


0. 개소리 하나를 놓고 치밀하게 입 댄 저자, 이 조그만 크기로도 60쪽에 지나지 않는 것을 책으로 낸 프린스턴대학, 존경스럽다. 정유년 벽두 시인 유홍준이 말 이전의 말을 내게 비수로 날린 직후, 철학자 해리 G. 프랭크퍼트는 개소리 공안 하나로 내 삶이 터한 개소리에 표창을 날렸다. 올해는 아무래도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지고 일어서지 못할 벌을 받을 것만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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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기간 동안 유홍준의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를 주의 깊게 읽었다. 둘 다 시중 서점에서 구입하기 어려워 딸아이가 다니는 대학의 도서관에서 대출해왔다. 엊그제 이 시집들을 돌려보냈다.


사실 한겨레신문 토요판에 지난 일 년 동안 실렸던 시들의 마지막을 장식한 <주석 없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유홍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주석 없이>와 “나는 무식하다. 나는 지식이 아닌 본능, 직관으로 시를 쓴다는 것이 참 좋다.”로 끝나는 <유홍준, 나의 시를 말한다>가 내게 준 충격, 그로 말미암아 벼락처럼 찾아든 성찰의 기회란 가히 축복이랄 만한 것이었다.


아, 아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답시고 여태 내가 떠들어댄 말은 너무나도 가볍고 쉽고 장황한 주석이었구나.


150명이나 되는 정신병 입원환자를 홀로 돌보며 한 달에 그가 받는 돈이 딸랑 120만원이다. 2006년 이후 그의 시집이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와 무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리라. <깊은 밥그릇>은 말한다.


못쓰게 된 밥그릇에 모이를 담아

병아리를 기른다 병아리가

대가리를 망치처럼 끄덕이며 모이를 쫀다

부리가 밥그릇 속에 빠져 보이지 않는다

더 깊이 주둥이를 먹이에 박으려고

앞으로 기울어진 몸

발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깊은 밥그릇은, 병아리를 죽인다


유홍준의 밥그릇은 얼마나 깊은 걸까? 시인의 깊은 밥그릇이 시를 죽이고 있는 걸까? 시인은 그렇게 벙어리가 된 걸까? <오월>은 말한다.


벙어리가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조잘조잘 먹는다

까딱까딱 먹는다


벙어리의 어린 딸이 살구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있다 조잘거리고 있다


벙어리가 다시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시 종달새를 먹는다


보리밭 위로 날아가는

어린 딸을

밀짚모자 쓴 벙어리가 고개 한껏 쳐들어 바라보고 있다


깊은 밥그릇에 빠져 벙어리가 된 시인은 날아가는 시를 고개 한껏 쳐들어 바라보기 위해 제 삶에 언어를 먹이고 또 먹인다. 벙어리 된 시인은 시를 쓰지 않고 먹는다.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기억이며 반응이다. 유홍준은 말한다.


시를 써오면서 내가 끝까지 버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물고기 잡는 능력, 산나물 캐는 능력이다. 나는 이 능력이 끝까지 내 몸에 남아 있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 안 하고 산비탈로 강여울로 헤매 다닌다. 머리가 아니라,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시와 삶을 기억하고 반응하기를 바란다.


물고기는 먹으려고 잡는다. 산나물도 먹으려고 캔다. 먹어야 기억이고 먹어야 반응이다. 유홍준에게 먹는 행위는 다른 모든 행위를 은유이게 하는 원관념이다. 먹으려고 깊은 밥그릇에 빠져 죽으면 그의 시가 태어난다. 아니 주검의 한 모퉁이에 시는 사리로 응결된다. 먹은 뒤의 삶에서 머리가, 지식이 만들어내는 시란 그에겐 없다. <아직 더 먼길을>은 말한다.


얼어 죽은 여자를 본다


붉은 입과

다 감지 못한 눈동자에 허연 얼음이 박혀 있다


그녀의 입에서

지독한 안개가 흘러나온다

오직, 맨발만이


아직 더 먼길을 가겠다는 듯이

댓입처럼 새파랗게 살아 있다


나의 밥그릇은 얼마나 깊은 걸까? 醫者의 깊은 밥그릇이 의학을 죽이고 있는 걸까? 내 밥그릇의 깊음에는 유홍준에게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향락·편의·여유 따위의 호림 때문에 내 의학이 죽임당하는 것이 아닐까? <빵 속에 쥐가,>는 말한다.


빵 속에 쥐가 들어 있다

빵은 버리고 쥐만 먹는다

아이들이 주머니 속에 쥐를 기른다

주머니 속에 쥐를 넣고 학교에 간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쥐꿈을 꾸고

쥐는 아이들의 두상을 파먹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쥐에게 제 발가락을 먹이고

여기저기 쥐 이빨 자국이 있는 아이들은

눈동자의 흰자위가 사라져간다

하수구를 좋아하고 부패한 음식을 찾고

골방에 틀어박힌다 야행성이 되어간다

어두울수록 그들은 편안해진다 어둠 속에서

자라나는 이빨을 어쩌지 못해 서로를 물고 뜯는다

바퀴 아래 갈린 쥐의 주검 위에 주검이 덧달라붙고

가랑이 속으로 쥐가 들어간 여자는 교성을 질러댄다

복통을 호소하는 아이의 배를 가르면 열세 마리의

빨간 쥐새끼가 옹그리고 있다


그렇다. 종달새를 먹고 종달새가 되어 날아가는 아이와 빵 속의 쥐를 먹고 쥐가 되어, 자라나는 이빨을 어쩌지 못해 물고 뜯는 아이는 다르다. 종달새 아이는 죽어서도 댓잎처럼 새파랗게 살아 있는 발로 더 먼길을 간다. 쥐 아이는 다만 주검 위에 주검으로 덧달라붙을 따름이다. 내가 먹은 것은, 먹고 있는 것은, 먹을 것은 쥐가 아닐까? 통렬하다. 질병을 응시하고 생명에 가 닿아야 할 醫者로서 나는 <흘러내리는 얼굴>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머리 위에 심지를 돋우고 살았네

몸의 중심에 구원과 교만의 심지를 박고 살았네


네가 나의 머리에 불을 붙여주었을 때,


生이 어디서부터 타들어가는지 알았네

내 몸에 옹이가 있었지만

불을 밀어내지 못했네 옹이 근처에서

불은 더 맹렬해졌네 옹이가 지르는 비명을 들었네


네가 내 머리에

불을 붙여주었을 때,

나의 이마, 나의 눈, 나의 입술이 녹아내렸네


어깨 위로 얼굴이,

뜨거워 만질 수 없는 얼굴이 흘러내렸네


60갑자 내세워온 구원과 교만의 얼굴이 녹아서 흘러내려야 비로소 生이 어디서부터 타들어가는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生이 어디서부터 타들어가는지 알 수 있어야 生을 어디서부터 보듬어야 할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生을 어디서부터 보듬어야 할지 알고 나서야 이렇게 <시인의 말>을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동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아이 하나가 다가온다.


동그랗게 말아쥔 아이의 손아귀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얘야, 그 손


풀어


매미 놓아주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한단다.


이 말을 하는 데는 <주석 없이>가 제시하는 전제가 필수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너는 주석 없이 이해됐다

내 온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쳤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 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버리는 나를 이해해다오


가시와 가시 사이

탱자꽃 필 때


나는 너를 이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


내 앞에 마음병으로 삶이 무너진 네가 앉는다. 나는 너를 전반부 없이, 주석 없이 치유한다. 네 고통의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고통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 만에 너를 모두 치유해버린다. 고통과 고통 사이 탱자 꽃 필 때 나는 너를 치유하는 데 1초가 걸린다. 이 ‘직방의 세계’가 내가 살아야 할 세계다. 이 몸의 말이 내가 ‘먹어야’ 할 말이다. 몸의 말을 먹는 醫者가 내 마지막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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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2-0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얘야, 그 손
풀어
매미 놓아주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한단다

우리가 살면서 놓지 않으면 평생 우는 소리를 들으며, 우는 손으로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놓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bari_che 2017-02-04 10:16   좋아요 0 | URL
차마 놓지 못하는 그것 놓을 기회를 맞고
그 기회를 살리는 사람이 지복의 사람일 테지요.
지복은 필경 고통이란 이름을 지닐 것이고
고통의 심연에 정좌하고 있는 어둠,
그 맑은 어둠이 바로 우울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