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기간 동안 유홍준의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를 주의 깊게 읽었다. 둘 다 시중 서점에서 구입하기 어려워 딸아이가 다니는 대학의 도서관에서 대출해왔다. 엊그제 이 시집들을 돌려보냈다.


사실 한겨레신문 토요판에 지난 일 년 동안 실렸던 시들의 마지막을 장식한 <주석 없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유홍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주석 없이>와 “나는 무식하다. 나는 지식이 아닌 본능, 직관으로 시를 쓴다는 것이 참 좋다.”로 끝나는 <유홍준, 나의 시를 말한다>가 내게 준 충격, 그로 말미암아 벼락처럼 찾아든 성찰의 기회란 가히 축복이랄 만한 것이었다.


아, 아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답시고 여태 내가 떠들어댄 말은 너무나도 가볍고 쉽고 장황한 주석이었구나.


150명이나 되는 정신병 입원환자를 홀로 돌보며 한 달에 그가 받는 돈이 딸랑 120만원이다. 2006년 이후 그의 시집이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와 무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리라. <깊은 밥그릇>은 말한다.


못쓰게 된 밥그릇에 모이를 담아

병아리를 기른다 병아리가

대가리를 망치처럼 끄덕이며 모이를 쫀다

부리가 밥그릇 속에 빠져 보이지 않는다

더 깊이 주둥이를 먹이에 박으려고

앞으로 기울어진 몸

발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깊은 밥그릇은, 병아리를 죽인다


유홍준의 밥그릇은 얼마나 깊은 걸까? 시인의 깊은 밥그릇이 시를 죽이고 있는 걸까? 시인은 그렇게 벙어리가 된 걸까? <오월>은 말한다.


벙어리가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조잘조잘 먹는다

까딱까딱 먹는다


벙어리의 어린 딸이 살구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있다 조잘거리고 있다


벙어리가 다시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시 종달새를 먹는다


보리밭 위로 날아가는

어린 딸을

밀짚모자 쓴 벙어리가 고개 한껏 쳐들어 바라보고 있다


깊은 밥그릇에 빠져 벙어리가 된 시인은 날아가는 시를 고개 한껏 쳐들어 바라보기 위해 제 삶에 언어를 먹이고 또 먹인다. 벙어리 된 시인은 시를 쓰지 않고 먹는다.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기억이며 반응이다. 유홍준은 말한다.


시를 써오면서 내가 끝까지 버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물고기 잡는 능력, 산나물 캐는 능력이다. 나는 이 능력이 끝까지 내 몸에 남아 있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 안 하고 산비탈로 강여울로 헤매 다닌다. 머리가 아니라,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시와 삶을 기억하고 반응하기를 바란다.


물고기는 먹으려고 잡는다. 산나물도 먹으려고 캔다. 먹어야 기억이고 먹어야 반응이다. 유홍준에게 먹는 행위는 다른 모든 행위를 은유이게 하는 원관념이다. 먹으려고 깊은 밥그릇에 빠져 죽으면 그의 시가 태어난다. 아니 주검의 한 모퉁이에 시는 사리로 응결된다. 먹은 뒤의 삶에서 머리가, 지식이 만들어내는 시란 그에겐 없다. <아직 더 먼길을>은 말한다.


얼어 죽은 여자를 본다


붉은 입과

다 감지 못한 눈동자에 허연 얼음이 박혀 있다


그녀의 입에서

지독한 안개가 흘러나온다

오직, 맨발만이


아직 더 먼길을 가겠다는 듯이

댓입처럼 새파랗게 살아 있다


나의 밥그릇은 얼마나 깊은 걸까? 醫者의 깊은 밥그릇이 의학을 죽이고 있는 걸까? 내 밥그릇의 깊음에는 유홍준에게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향락·편의·여유 따위의 호림 때문에 내 의학이 죽임당하는 것이 아닐까? <빵 속에 쥐가,>는 말한다.


빵 속에 쥐가 들어 있다

빵은 버리고 쥐만 먹는다

아이들이 주머니 속에 쥐를 기른다

주머니 속에 쥐를 넣고 학교에 간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쥐꿈을 꾸고

쥐는 아이들의 두상을 파먹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쥐에게 제 발가락을 먹이고

여기저기 쥐 이빨 자국이 있는 아이들은

눈동자의 흰자위가 사라져간다

하수구를 좋아하고 부패한 음식을 찾고

골방에 틀어박힌다 야행성이 되어간다

어두울수록 그들은 편안해진다 어둠 속에서

자라나는 이빨을 어쩌지 못해 서로를 물고 뜯는다

바퀴 아래 갈린 쥐의 주검 위에 주검이 덧달라붙고

가랑이 속으로 쥐가 들어간 여자는 교성을 질러댄다

복통을 호소하는 아이의 배를 가르면 열세 마리의

빨간 쥐새끼가 옹그리고 있다


그렇다. 종달새를 먹고 종달새가 되어 날아가는 아이와 빵 속의 쥐를 먹고 쥐가 되어, 자라나는 이빨을 어쩌지 못해 물고 뜯는 아이는 다르다. 종달새 아이는 죽어서도 댓잎처럼 새파랗게 살아 있는 발로 더 먼길을 간다. 쥐 아이는 다만 주검 위에 주검으로 덧달라붙을 따름이다. 내가 먹은 것은, 먹고 있는 것은, 먹을 것은 쥐가 아닐까? 통렬하다. 질병을 응시하고 생명에 가 닿아야 할 醫者로서 나는 <흘러내리는 얼굴>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머리 위에 심지를 돋우고 살았네

몸의 중심에 구원과 교만의 심지를 박고 살았네


네가 나의 머리에 불을 붙여주었을 때,


生이 어디서부터 타들어가는지 알았네

내 몸에 옹이가 있었지만

불을 밀어내지 못했네 옹이 근처에서

불은 더 맹렬해졌네 옹이가 지르는 비명을 들었네


네가 내 머리에

불을 붙여주었을 때,

나의 이마, 나의 눈, 나의 입술이 녹아내렸네


어깨 위로 얼굴이,

뜨거워 만질 수 없는 얼굴이 흘러내렸네


60갑자 내세워온 구원과 교만의 얼굴이 녹아서 흘러내려야 비로소 生이 어디서부터 타들어가는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生이 어디서부터 타들어가는지 알 수 있어야 生을 어디서부터 보듬어야 할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生을 어디서부터 보듬어야 할지 알고 나서야 이렇게 <시인의 말>을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동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아이 하나가 다가온다.


동그랗게 말아쥔 아이의 손아귀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얘야, 그 손


풀어


매미 놓아주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한단다.


이 말을 하는 데는 <주석 없이>가 제시하는 전제가 필수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너는 주석 없이 이해됐다

내 온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쳤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 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버리는 나를 이해해다오


가시와 가시 사이

탱자꽃 필 때


나는 너를 이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


내 앞에 마음병으로 삶이 무너진 네가 앉는다. 나는 너를 전반부 없이, 주석 없이 치유한다. 네 고통의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고통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 만에 너를 모두 치유해버린다. 고통과 고통 사이 탱자 꽃 필 때 나는 너를 치유하는 데 1초가 걸린다. 이 ‘직방의 세계’가 내가 살아야 할 세계다. 이 몸의 말이 내가 ‘먹어야’ 할 말이다. 몸의 말을 먹는 醫者가 내 마지막 이름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와같다면 2017-02-0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얘야, 그 손
풀어
매미 놓아주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한단다

우리가 살면서 놓지 않으면 평생 우는 소리를 들으며, 우는 손으로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놓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bari_che 2017-02-04 10:16   좋아요 0 | URL
차마 놓지 못하는 그것 놓을 기회를 맞고
그 기회를 살리는 사람이 지복의 사람일 테지요.
지복은 필경 고통이란 이름을 지닐 것이고
고통의 심연에 정좌하고 있는 어둠,
그 맑은 어둠이 바로 우울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