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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평점 :
저는 논리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사회이론보다 여기저기 모순이나 하자가 있는 사회이론을 신용합니다. 그런 모순은 ‘현장’에서만 나오는 말이니까요. 생활체험과 사회경험 속에서 인간이 지닌 어리석음을 숙지한 사람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신용할 만합니다.(191쪽)
우치다 타츠루가 일관되게 고수하는 시간 고수 이야기에 이의제기하던 차에 내가 꺼낸 말이 동시성이었다. 내친 김에 우치다 타츠루 쓰기를 멈추고 『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Synchronicity, Science, and Soul-making: Understanding Jungian Synchronicity Through Physics, Buddhism, and Philosophy』를 읽었다. 번역 제목에서 세심 아닌 대충이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느낌이 아쉬우나 대수롭지 않다.
미국 콜게이트 대학 물리학·천문학과 교수인 빅터 맨스필드가 썼다. 녹록치 않은 책이다. 내가 원하는 통찰을 얻기 위해 질문과 사색을 거듭하며 읽었다. 저자 입에서 내가 원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동시성 문제를 발원시킨 카를 구스타프 융과 그가 어떻게 같으면서도 다른지, 왜 그런지, 그러면 삶은 어디를 향하는지, 게다가 인과, 시공, 정신, 잠, 꿈 문제에서 무엇이 핍진한지 촘촘히 따져볼 수 있었다. 더없는 선물이다.
선물이라면 동시성을 따를 무엇은 없다. 동시성은 세계 네트워킹이 전체 차원에서 지혜를 개체에게 선물하는 비인과적 과정이다. 인과율, 형식논리, 선형수학에 터한 분열·불연속 문명 이후 인간 지혜는 여기서 가뭇없이 멀어졌다. 인과 상품 유통에 환원되어 사는 인간에게 사이비과학, 기껏해야 우연으로나 읽히지만 본디 동시성은 세계 운동 기축이다. 이 기축 운동이 잠정적·부가적 구조 실재를 창조해 비대칭대칭세계가 이뤄진다.
우리는 과학적 몰상식으로, 독립존재가 있어 그들이 관계를 맺고, 신체가 있어 정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관계가 독립존재를 구성해 기대고, 정신이 신체를 창조해 의지한다. 구태여 따지자면 독립존재·신체가 잠정적·부가적이지만 비인과 상호의존은 불가결하고 불가피하다. 이 비대칭대칭을 해소하는 대극합일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 각자 삶이 지닌 맥락이 드러난다. 빅터 맨스필드가 놓친 진실이다.
맨스필드는 융이 오만해 지반 묵타jivan mukta, 그러니까 살아서 해탈한 사람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해탈, 그러니까 대극합일을 추구해 나아가는 길에서 더 높은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도불교를 말하지만, 그에게는 명상 또는 참선으로 도달한 ‘아라한’이 사실상 이상적 경지인 듯하다. 아라한 대극합일은 뇌 현상이다. 뇌 현상인 한, 고도한 극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이 사실을 알까. 모르면, 중도가 아니다.
중도는 정도다. 정도는 대극 분열을 합일하는 길이 아니다. 합일은 해체다. 해체는 또 다른 일극이다. 일극과 대극의 극단을 버린 중도는 합일과 분열 사이를 요동한다. 요동에서 고요를 감각, 감응, 감수, 감동, 감화, 감정, 감행, 감사한다. 감사를 형해로 만드는 해탈은 융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융은 치유자다. 치유 목적이 해탈이라면 구태여 융일 이유가 뭐겠는가. 명상과 참선으로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융을 찾아오겠는가.
융이 제시한 동시성은 평범한 사람을 위한 복음이다. 평범한 사람, 그러니까 우리 거의 모두는 수련을 통한 대극합일 경지에 언감생심 가 닿지 못한다. “생활체험과 사회경험, 그러니까 ‘현장’ 속에서 인간이 지닌 어리석음을 숙지”할 정도면 감지덕지다. 현장에서 숙지되는 “모순이나 하자”를 “논리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사회이론”으로 없애면 삶이 평화로워지는가? 그런 평화는 ‘폭력’이 가져온 적료다. 적료는 생명 풍경이 아니다.
생명 풍경에서는 비대칭대칭 운동이 옹글고 탱탱한 요동고요를 창발한다. 요동고요는 대극을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절묘중도에 놓아둔다. 절묘중도를 감각하기 위해 낭·풀에서 으뜸바리(바이러스)까지 공부하는 일은 맨스필드에게 필수다. 세계 존재가 사는 동안 세계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필요하다면 찰나에 국한한다. 이를 경지라 하고 상시 유지하는 짓은 권력놀음이다. 뜨르르한 생불, 구루들이 여태껏 저지른 협잡질이었다.
저 협잡질이 오랫동안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타락한 인간이 지닌 높이와 깊이에 대한 갈애 때문이다. 고매함과 심오함으로 인간이 지닌 어리석음을 치유하지 못한다. 길은 동시성이 열어주는 넓은 네트워킹이다. 네트워킹만이 현장 모순과 하자를 보듬고 어루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