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문화중심주의는 자신과 다르면 배제하고 잘라버리는 문화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잘라버리지는 않습니다. “필요 없어!”라고 하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이미 아는 영역으로 끌어와 열등하다, 유아적이다, 미개하다고 낙인찍어 자기 문화 서열 안에 배치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라고 소리 높여 선언한 근대 휴머니즘은 그렇게 해서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인간을 평등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교화 훈육 대상으로 삼아버렸습니다.(200~201)

 

 

다른 문화를 가진 인간을 다른인간으로 여겨 함부로 침범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기본자세는 문화인류에게 진즉부터 없었다. 서로 다른 인간 간 평등이 존재 자체가 아니라 문화 권력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자기 문화를 기준으로 보면 다른 문화는 죄다 열등하고, 유아적이며, 미개하다. 열등하고, 유아적이며, 미개한 인간을 교화 훈육하는 일이 신께 받은 사명이라고 굳게 믿는 선의가 선교사콤플렉스다. 선교사콤플렉스를 선두로 서구문화는 지구촌을 서구문화 단일경작농지로 갈아엎었다. 그 단일경작물은 바야흐로 멸종 국면을 맞고 있다.

 

서구 자문화중심주의 흉내 내서 일제가 19세기 후반에 내걸었던 아류 우월주의 슬로건이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떠나 서구로 진입하는 징표 삼아 일제는 조선을 열등하고 유아적이며 미개한 족속으로 낙인찍었다. 낙인은 교화 훈육을 위한 국권 갈취로 이어졌다. 물론 이 과정에는 자발적으로 부역하고 주구 노릇을 한 매판세력이 있었다. 저들은 식민지 시절은 물론 해방 이후에도 미군정을 발판 삼아 승승장구했다. 저들은 여전히 일본을 종주국으로 여기며 제 민족을 열등하고, 유아적이며, 미개해서 교화 훈육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중 공부깨나 하는 자들은 종주국 국비장학금으로 공부해서 식민지지성을 형성한다. 식민지지성은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황국신민 배양에 매진한다. 그렇게 배양된 황국신민 가운데 한 사람이 지난 39일 다시 이 나라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지금 자주시민이 일으킨 민주주의를 지우고 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황국군영이 있던 곳에 집무실을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황국 지배 영속화 의지를 대놓고 천명한 셈이다. 보다시피 자문화중심주의, 그러니까 제국주의는 제국주의로 진화하면서 이리도 초월적인 힘을 지니게 되었다. 배후에는 언제나 신이 있었다.

 

신을 거대인격신으로 투사한 이래 문화인간은 그 신을 앞세우고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질러왔다. 그 죄악이 형언 불가한 이유는 구원과 양육과 개화를 내건 자비로운 언행이었기 때문이다. 죄의식 없는 죄, 악의 없는 악이 웃으며 파고들 때, 당하는 사람은 피해의식도 악감정도 품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고통 받으며 죽어간다. 이 기막힌 죽음은 존재를 형해화하고 윤리를 희화화한다. 지금 나는 토실한 형해 생명이 엄숙한 희화 윤리를 존숭해마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난 감사에 잠겨 온 영혼이 퉁퉁 불어터져서 장히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