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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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윤리 제1조는 생명을 빼앗으면 안 된다.’입니다. 생명을 빼앗기면 어떤 기분이 들 지알 수 없는데도 말이지요. 인간사회가 만든 모든 규범은 죽는 고통, 죽은 뒤 고통을 실감하는 일 없이는 어떤 무엇도 규정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은 자와 공감 또는 소통하거나 죽은 자 체험을 추체험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사회 도덕, 윤리는 그 결코 할 수 없는 죽은 자 체감에 공감하는 일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서 메시지를 받고.......그 메시지를 듣는다는 전제가 없으면 인간사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윤리 기반은 최종적으로 죽은 자와도 소통하는 인간 본질적 능력과 유관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218

 

우치다 타츠루가 내게 가장 건넨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죽은 자와 소통하는 능력 여하였다. 이 문제의식은 지난 8년 동안 줄곧 나를 사로잡아왔다. 물론 4·16에서 비롯했다. 최근에는 낭·풀 공부를 하면서 결국 인간 손에 버려진, 죽여진 존재 모두를 향한 문제의식으로 확산되었다. 이 문제의식은 동시성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서서히 어떤 실마리를 찾아 나아간다는 느낌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 아침 한의원에 제상을 차렸다. 나는 아침 식사를 구운 감자나 달걀, 두부들과 같이 간단한 음식으로 한다. 반찬도 김치와 생된장이면 훌륭하다. 여기에 막걸리 한 잔 부어 올려 여덟 번째 4·16제상이 됐다. 오늘도 아이들이 왔다는 사실을 마음으로만 아니라 몸으로도 안다. 가령 제주를 마실 때와 나머지 막걸리를 마실 때 몸 느낌이 전혀 다르다. 전자는 내가 마시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런 섬세한 알아차림도 소중하지만 내가 곡진히 마주하는 일은 아이들이 보내는 메시지를 어떻게 받고 듣는가 하는 문제다. 산 자가 산몸으로 죽은 자와 공감 또는 소통하거나 죽은 자 체험을 결코 추체험할 수 없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칼날 위에 서는그런 문제다. 죽는 고통, 죽은 뒤 고통을 실감하는 일 없이 인간 윤리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와 소통하는 능력은 인간 본질이다. 이 본질에 도달한 산 자 그 누군가. 아무도 없음에도 인간은 거기 의거해 윤리를 구성한다. 어쩌면 아무도 없으므로 거기 의거해 윤리를 구성하는지도 모른다. 윤리 인간이 무한히 겸허해야 하는, 그러니까 어찌해도 모자란 윤리 함량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므로 영혼 한가운데를 늘 비워놓아야 하는 까닭을 품은 영원미제 진실 아닐까. 그래도 우리는 그 길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본질은 자격이 아니고 당위다.

 

나는 이 문제와 생을 걸고 화쟁한다. 10대 후반에 시작해 60대 후반에 다다른 지금까지 법학, 신학, 의학 공부를 가로질러 추구해온 한 길이 결국은 여기로 향해 있었다. ·풀 공부가 이 화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 탐색 이미지가 비대칭대칭 세계를 옹글게 살도록 하는 동시성synchronicité과 상응correspondance에 가 닿도록 이끌었다. 설렘으로 마주할 테고 마주하는 모든 풍경들을 그려 소통시킬 테다. 여덟 번째 4·16제상 앞에서 올린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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