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지난해 10월 21일 독일의 외무부 청사 앞에 일군의 군중이 모여 집회를 벌인 일이 있었다. 그 집회를 조직한 것은 팔레스타인 연대 집단들이었다. 튀르키예의 국영 통신사 아나돌루 아잔시에 따르면, 그들은 아날레나 베어복 외무장관이 10월 10일 연방 의회에서 행한 발언의 내용 때문에 모였다고 한다. 베어보크 장관이 무슨 말을 했기에 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이 항의 집회를 한 것일까.


“레바논이 붕괴하기 직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레바논에서도 테러리스트가 무책임하게 민간인들 뒤에 숨어서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베어복이 말하는 ‘테러리스트’란 헤즈볼라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서 가장 큰 합법적 정치 및 군사 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베어복은 그런 세력이 민간인 뒤에 숨어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발사한다며 테러리스트라고 단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전혀 조리에 맞지 않는다. 레바논의 합법 세력이 레바논에 있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베어복은 헤즈볼라의 합법적으로 레바논 민간인과 함께 있는 것을 테러범이 하는 짓거리로 몰고 있다.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로만 치부할 수 없다. 그들이 그런 공습을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 가자지역에서 하마스 세력을 제거한다며 민간인 학살행위를 자행하는 데 대해 같은 이슬람으로서, 또 저항의 축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자지역을 초토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안지구를 유린한 데 이어서 레바논 영토까지 침공한 것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기도 하다. 게다가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군과는 달리 전쟁 수칙을 지키며 공습 대상을 군사시설에 국한하며, 가자지역과 베이루트 등을 무차별 폭격해 고의로 인명을 살상하는 전쟁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베어복이 헤즈볼라는 민간인 뒤에 숨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며 비난한 데에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다. 헤즈볼라에 대한 근거 없는 비판이라도 해서 엄청난 수의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살상하는 이스라엘에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그것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에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그들의 고향에서 쫓아낸 나크바를 저지른 뒤로 폭행, 불법적 체포, 고문, 성폭행, 살상 등 온갖 악행을 저질러 왔다. 그들은 지금도 2023년 10월 7일에 자국을 공격한 하마스 세력을 제거하겠다며 가공할 폭격으로 가자지역을 초토화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인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극악무도한 행위로 수십 만의 사상자를 낸 것에 대해 이스라엘이나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독일 등 서방 세력은 ‘부수적 피해’라고 둘러댄다.

국제법에 따르면 적군을 공격하더라도 비전투원 즉 민간인의 희생이 나올 것이 명확하면 공격을 멈춰야 한다. 그런 법 규정이 생긴 것은 이스라엘이 가자지역에서 저지르는 것처럼 소수의 하마스 전투원을 공격한다며 수십 만의 비전투원을 희생시키는 따위의 불법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베어복은 헤즈볼라 군이 “민간인 뒤에 숨어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민간인이 전투원과 함께 있으면 공격해도 좋다는 것으로 위법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은 작년 9월 27일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를 암살하며 33명 이상의 사망자, 175명 이상의 부상자를 냈다.

독일의 정치계급이 이스라엘의 천인공노할 인종청소 행위를 두둔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독일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자행한 불법적 침탈 행위를 외면한 것은 물론이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에 맞서 알-악사 홍수 작전을 펼친 뒤 이스라엘군이 가자의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동안에도 이스라엘의 든든한 뒷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하는 동안 독일은 이스라엘에 엄청나게 많은 무기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다.

국제법을 위반하며 학살행위를 자행하는데도 이스라엘을 지원해주는 나라가 물론 독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나라의 선두에는 미국이 있고,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 대부분이 친이스라엘 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최근의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독일이 유럽에서 가장 많은 무기를 제공해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등에서 자행한 학살을 앞장서 지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독일은 이스라엘 지원이 자국의 국가이성이라고 말한다. 독일의 전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2008년에 이스라엘의 의회 크네세트를 방문해 “이스라엘의 안보는 독일의 국가이성”이라고 말하며 독일이 이스라엘의 안보에 책임을 지고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국가이성’은 “국가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국가의 행동 기준”을 가리킨다. 독일이 이스라엘의 안보를 자국의 국가이성으로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는 메르켈의 후임자인 숄츠와 그가 이끄는 연립정부가 10월 7일 사태 이후 미국 다음으로 그리고 유럽에서는 최대로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한 점이 웅변하는 셈이다.

독일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계는 널리 알려져 있다. 나치 지배 시절 독일은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독일 사회가 이스라엘에 대해 원죄 의식을 갖는 것은 그런 면에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일의 행태를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죄의식을 강조하는 것이 계산에 따른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최근에 독일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반-유대주의로 규정해 불법화했다고 전해진다. 언뜻 보면 과거 자신이 유대인에게 자행한 학살행위를 반성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 불법화 이후 독일 당국이 보인 행태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독일 당국은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인 학살에 항의해 시위에 나선 사람들과 온라인 등에서 비판 활동을 조직한 친-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을 빈번하게 탄압하고 체포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자국의 국가이성으로까지 격상한 것을 ‘과거 청산(Vergangenheitsbewältigung)’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독일 사회가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려 하는 것이야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독일이 20세기 후반에 국제사회에서 제법 좋은 평가를 받은 데에는 유대인 학살을 뉘우친 모습을 열심히 보여준 점이 적잖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인의 견지에서 보면 독일이 과거 청산에 나선 태도는 식민 지배 기간 온갖 악행을 저질러 놓고 아직 제대로 반성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일본과 비교하면 큰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독일이 자신의 과거를 정말 제대로 청산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작년 11월 1일과 올해 1월 3일 자로 서아시아 전문매체인 <미들이스트 아이>에 기고한 두 편의 글에서 독일 포츠담대학의 사회학 교수 위르겐 마케르트가 하는 지적이 정곡을 찌른다. 마케르트 교수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데 대한 반성으로 독일이 이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스라엘을 지지하겠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과거 청산의 태도라기보다는 자국 이익을 계산한 행보인 측면이 크다. 독일은 이스라엘의 안보 지원을 국가이성이라 강조하지만, 독일이 청산해야 할 과거에는 유대인 학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독일에는 예컨대 아프리카의 나미비아를 식민 지배하면서 1904〜08년 사이에 헤레로족 6만과 나마족 1만 명 이상을 살해한 죄과도 있다. 자신의 잔혹한 식민 지배의 청산을 계속 외면해오던 독일이 나미비아에서 대규모 종족살해를 범한 사실을 인정하고 30년에 걸쳐 11억 달러 정도의 원조를 제공하기로 한 것이 겨우 2021년이다. 이런 점을 놓고 보면, 독일이 자신의 죄악을 유대인 홀로코스트로만 국한하는 행위는 과거 청산이 아니라 은폐일 소지가 다분하다. 유대인에 대해서만 사죄 의사를 드러내는 것은 정착-식민 역사를 포함한 자신의 다른 잘못된 과거는 청산의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심산일 공산이 큰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해 앞장섬으로써 독일은 새로운 범죄에 가담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을 대상으로 자행하는 종족학살은 독일 나치 세력의 소행을 빼닮았을 뿐만 아니라 능가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도 독일은 자신의 국가이성을 내세워 이스라엘에 대해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무기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의 그런 지원은 나치 시기 자신이 범한 종족학살 행위를 반복하고 정당화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가자지역에서 대규모 살상행위를 자행하는 이스라엘을 국가이성의 명분으로 지원하면서 독일은 스스로 말하는 과거 청산을 사실상 무효로 만드는 셈이다.

마케르트는 독일이 유독 유대인 홀로코스트만 자국이 저지른 유일무이한 절대적 과오로 치부하는 것은 교활한 역사 왜곡이요 부정인 것으로 본다. 나치 치하 시기 12년은 독일 전체 역사에서 예외적으로 비정상적이며 비이성적인 시기였을 뿐이고, 독일은 원래 계몽된 문명국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려는 수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국제 범죄 행위가 나치 시기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는 그전에 이미 아프리카와 태평양, 중국 등에서 식민지 또는 제국주의적 지배를 자행한 역사가 있다. 독일이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만 죄의식을 표명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자신의 다른 어둠의 역사를 은폐하기 위함인 측면이 크다. 마케르트는 자신의 역사적 범죄 전체를 인정하지 않는 한 독일 사회는 왜 자국이 나치 시기에 홀로코스트라는 극악한 반인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나치 독일은 그냥 하늘에서 전례 없는 문명 붕괴 상태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문명국가’ 독일이 최근에 보인 반문명적 행태가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는데 그 역사적 원인을 이해하는 데에 마케르트의 논고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자기 모국이 저지르는 범죄 행위를 국제무대에 고발하는 서구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 베어복 같은 독일 지배층은 왜 레바논을 불법 침략한 이스라엘군 대신 자국 영토를 지키는 헤즈볼라 세력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지, 독일은 왜 미국 다음으로 이스라엘에 무기를 많이 지원하는지, 왜 최근에 이스라엘 비판을 반유대 범죄로 만들었는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독일의 역사적 범죄를 들춰내 신랄하고 엄정한 비판을 가하는 그의 논고 덕분이다.

마케르트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테러 행위를 지원하는 것이 독일에는 이로운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 이때 ‘독일’은 독일의 인민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불법적 종족학살을 비판하는 반유대 행위로 처벌받는 독일인들은 독일의 정치계급, 이들과 함께하는 지배 블록, 특히 자본 세력과는 구별해야 하며, 독일의 과거 청산도 다른 방식으로 하려 한다고 봐야 한다. 독일이 이스라엘을 지원한다고 할 때 ‘독일’은 따라서 독일의 인민과는 다른, 독일 상층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독일 국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마케르트는 독일 당국이 지금 “수많은 독일 은행들, 보험사들, 투자자들, 연구 기관들, 대학들, 무기회사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독일이 한사코 이스라엘 안보를 위해 나서는 것은 그들 지배 블록이 “시장, 이윤, 그리고 중요한 지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지식노동자 출신으로서 나는 독일의 연구 기관과 대학들이 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인 종족학살에 가담하고 있는 점에 대해 특히 관심이 간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처럼 독일에서도 작년에 대학에 이스라엘의 가자 인민 학살을 규탄하는 집회가 널리 열렸었다. 물론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이 반유대 행위라는 법이 제정되었으니 그런 집회가 용납되었을 리는 없다. 반유대 행위 통제에는 대학 당국들도 소매 걷어 올리고 나선 모양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할 것이 예상되는 외부 강사의 초청 강연을 취소시키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와 함께 대학들이 일제히 친이스라엘 행보를 보였다는 전언도 있다. 이스라엘의 대학이나 연구소가 이스라엘의 점령 및 학살행위에 연루된 것을 알면서도 독일 대학들이 그들과의 협력을 위한 예산을 늘린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독일과 이스라엘 대학 간의 협력 증진을 ‘학술적’인 순수한 활동이라고 옹호한다면 누가 믿을까. 설령 그런 성격을 지니더라도 그것은 양측이 이미 이익공동체라는 점의 반영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독일과 이스라엘 대학들에서 진행하는 공동 연구에는 팔레스타인인의 생체 정보 등을 활용해서 위치를 특정해 정밀 타격하는 기술의 개발도 포함되어 있을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독일 대학과 연구소 등은 이스라엘의 상대와 더불어 종족학살에 참여하는 것과 진배없다. 물론 그들이 수행하는 연구의 많은 부분은 미국 다음으로 무기를 많이 제공하는 독일의 군수 자본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마케르트에 따르면 독일에는 지금 “신자유주의 시대에 감시 기술에서 인구 관리에 이르기까지, 드론과 AI 전쟁에 이르기까지 독일 측이 배울 것이 무척 많은 팔레스타인 실험실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이런 점은 독일이 스스로 국제법을 무시하며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은 문명국의 국가이성과는 관계가 멀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신이 과거 나치 시절에 행한 것과 다르지 않고 심지어 더한 악행을 저지르는 이스라엘의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그렇다면 독일의 이해관계 때문인 셈이다. 단 이때 이익이 독일인 전체의 것이라기보다는 지배계급의 그것임을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독일 당국이 팔레스타인인에게 연대를 표명하기 위해 나서는 자국 인민을 탄압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인민의 그런 행동이 지배계급의 이익과 상반된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보다 큰 이유일 것이다. 역시 문제는 다수의 이해관계와 소수의 이해관계를 대립시키는 자본주의라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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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주간 그렇듯 오늘 아침에도 미리 세운 계획은 없다. 지하철 속에서마저 생각이 구름처럼 떠간다. 그러다가 산보다는 물을 보러 가야겠다 싶어 마침 타고 있는 4호선에서 우이신설선으로 갈아타고 북한산 소귀천 계곡 백운천을 일단 걷기로 한다.

 

북한산 소귀천 계곡은 북한산 계곡 걷기 과정에서 그 일부를 걸은 적이 있다. 오늘은 나머지 부분을 물에 주의하면서 걷는다. 물길을 따라가며 흐르는 모양과 소리를 곱고 촘촘하게 담는다. 쌓인 눈을 요리조리 피하고 덮인 얼음 아래를 엎드려 기며 작은 시내는 졸졸 흘러간다. 낙차 이루는 돌 사이에서는 초르르 소리내고 떨어져 물끼리 닿아서는 똘랑똘랑 소리낸다. 이 모든 소리가 인간에게 이완과 평화를 선물한다. 늘 같은 소리 같지만 지루하거나 지겹지 않으니 언제나 다른 소리임이 틀림없다. 그 소리에선 말간 내음도 피어오른다.

 

소귀천 계곡 타고 내려오는 백운천과 다른 한 갈래는 백운대가 아니라 만경대 산마루 밑에서 발원하니까 백운천이란 이름은 이래저래 이상하다. 소귀천도 마찬가지다. 소귀내 또는 쇠귀내라 하거나 우이천이라 하면 될 텐데 뭔가 뒤죽박죽이 된 느낌이다.

 

여기가 아니라 우이령에서 발원한 다른 줄기가 본류라고 생각해 우이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더라도 백운천이라는 이름은 맞지 않다. 차라리 만경천이라 해야 한다. 우이령 쪽을 왜 본류로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체 산세나 맥락을 보면 우이천은 쇠귀천 계곡을 포함한 쪽을 본류로 삼아 쇠귀내 또는 소귀내로 부르는 민중 전승을 따라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찮은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런 혼잡부터 바로잡아야 제국주의 그늘을 걷어내고 자주민주 사회로 나아가는 바탕이 굳어진다. “쇠귀내물이 오늘 전한 말은 이로써 충분하다.

 

두 물길이 만나 중랑천에 닿기까지 도시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흐른다. 생태하천으로 조성되기 전 우이천은 다른 내와 마찬가지로 생활하수가 모여 흐르는 오염된 지상 하수였다. 지금은 물도 비교적 맑고 산책로도 편리하나 둔치가 좁아 풍경은 소박하다.

 

우이천은 재미난 서사 하나를 품고 있다: 아기공룡 둘리. 빙하 타고 내려온 둘리가 발견된 곳이 한일병원 근처 우이천이라는 이야기다. 물 흐름에 비추어 터무니없는 상상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엿새 만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터무니 있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화 서사가 기억을 타고 전승돼 이곳에 살아 있는 문화로 엄존하는 현상은 그 자체로 가치와 미학을 지니기에 충분하다. 이런 서사를 품어 들이는 범주 인류학으로 보편과 특수를 가로질러 우리 일상이 풍요로워진다면 하늘에서 떨어진 빙하인들 어떤가.

 

우리가 식민지를 겹으로 거치며 살지 않았다면 물과 얽힌 서사가 더 유구하고 풍요로웠을 텐데 참으로 원통한 일이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아픈 물 체취와 신음이 감지된다. 내 몸도 따라 천추 통증을 전한다. 더는 걷지 못한다. 예를 표하고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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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광화문 가기는 박근혜 때처럼 어느덧 내 루틴-내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리추얼-로 자리 잡았다. 한의원 진료 끝내고 지하철로 이동하면 공식 집회가 제법 진행되었을 무렵에 도착한다. 폭력성에 찌든 탄핵 반대 집회장을 지나 흥겨움으로 넘실대는 파면 촉구 집회장 가까이 다가가자 대기 온도부터 달라진다. 부는 바람결도 그렇다. 자동으로 발걸음에 운율이 실린다.

 

저마다 다른 사연 전하는 목소리, 어깨춤을 부르는 노래, 민주주의를 치유하는 구호, 가슴과 가슴을 가로지르는 함성이 어우러질 때 모두는 자연스럽게 웃고 손뼉 치며 발장단을 맞춘다. 다르고도 같은 맥락이 되풀이해 순환하면서 천천히 흘러간다. 어느 순간 갑자기 기이한 조바심이 비수처럼 옆구리를 파고든다. 화들짝 놀라 이 감정 녀석 멱살을 움켜쥔다: 너는 누구냐?


답 듣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내가 반복을 통해 흥이 나선으로 상승하는 놀이에 아직도 익숙하지 않구나! 개인 삶은 물론 정치 저항을 싸움으로 인식하며 살아온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내가 오랫동안 시달렸던 우울증도 그 탓이 크다. 우리 세대가 그려냈던 공통된 풍경이기도 하다. 알아차려 주자 조바심이 빙그레 웃으며 떠난다.

 

나는 이내 분위기 한복판으로 되돌아간다. 천천히 행진을 따라간다. 분위기는 달아오르다가 가라앉기를 거듭하는 듯하더니만 어느 시점부터 변함없는 탱탱함으로 고공비행한다. 행진이 절정에서 끝난다고 해야 할지 끝에서 절정을 맞는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채로 흥은 홀가분하게 흩어진다. 신명과 일상이 절묘하게 융해되어 명동 일대를 평정한다. 밥 먹으러 간다.

 

식당 옆자리서 장년 여성 넷이 술을 마신다. 대화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는 듯한 사람이 뚜벅 이렇게 말한다: 저런 삶들도 필요하지. 그래봐야 소수지만. 다른 사람 아무도 이 말에 반응하지 않아 뒷이야기는 없다. 나는 홀로 묻는다: 다수는 누굴까? 답 듣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경꾼이지. 얼마든지 구경해도 된다. 구경만으로 누리는 변화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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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여니 지난밤 대학 동기 하나가 보낸 카톡 알림이 뜬다. 별로 친하지 않아서 그동안 카톡은커녕 전화 한 통 주고받은 일이 없던 터라 갸우뚱한 채 보니 아뿔싸 전한길 유튜브다. 350만 뷰라며 보라고 한다. 하도 어이가 없어 쌍욕 하나 날리고 지워버린다.

 

이놈은 판사 출신 변호사다. 국비로 미국 유학까지 한 엘리트다. 그런 놈이 전한길 유튜브에 빠져 전도씩이나 하고 자빠진 거다. 하기는 전광훈 집회에 60대 이상 엘리트들이 득실거린다니 뭐···. 엘리트란 공부잘해 다른 쪽은 계발되지 못한 꼴통을 가리키는 말이지 싶다.

 

사실은 나도 검사가 되려고 사법고시를 본 적이 있다. 일차 합격해서 두 번 이차를 본 뒤 나는 단호히 발길을 거둬들였다. 달달 외워서 쓰는 공부가 너무 싫어서다. 나는 시험용 암기 공부에 적합하지 않고 학문용 사색 공부에 적합한 머리를 지녔다고 한 어느 선배 말이 정확했다.

 

그 선배는 내가 민주적 기본 질서를 논하라라는 문제를 놓고 일주일 동안 고민하는 모습을 보더니 고시 공부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몇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그때는 반신반의했으나 이차 시험 보고 나선 확연하게 내 본성을 깨달았다. 나는 인생을 고민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 돌아섬은 패배였다. 나 말고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수십 년 뒤 내 동기서껀 친했던 선후배 가운데 판검사가 된 면면을 보고서 실패가 축복이었음을 알게 됐다. 세상 이치 전혀 모른 채 시험으로 현자사도가 된 엘리트들이 무지와 편향에 절어 있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시상 이치란 심오하고 복잡한 무엇이 아니라, A가 진리일 때 똑같은 값으로 진리인 non A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부단히 펼쳐지는 비대칭 대칭 사건이 세계 진실이라는 이야기다. 일극 집중 형식논리에 빠져 저만 옳다고 맹신하는 엘리트 머리로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전한길 유튜브 보낸 엘리트 놈과 달리 내가 세상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저 패배에서 나왔다. 패배를 거듭하며 세상 이치를 더욱 섬세하게 더욱 치밀하게 깨달아갔다. 그 깨달음이 빚어낸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는 패자 필생 진리다. 이 진리는 현재진행형 미완 서사다.

 

완성 없는 승리 서사를 한 자 한 자 써가는 사이 없으나 있고야 마는 패자 언어에 마음 기울인다; 있으나 없어지고야 마는 승자 개소리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저들이 엄숙 떨 때 우리는 그저 그냥 논다. 웃으며 춤추며 손뼉 치며 응원봉 흔들며 우리는 엘리트를 딜리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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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문화평론가)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다 부질없는 개뻘짓이다. 진짜 조상 잘 만나 조상덕 본 사람들은 지금 다 해외여행가고 없다. 조상덕이라곤 1도 못 본 인간들이 음식상에 절하고 집에와서 마누라랑 싸운다."

대한민국의 명절을 바꾼 전설의 댓글이라 불리는 댓글이다. 이 댓글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한 번 본 사람은 잊을 수 없다고들 할 정도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이 댓글을 보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한 번 이 댓글을 분석해보기로 했다.

이 댓글은 일종의 비속어를 쓰면서 시작하는데, 그보다 강력한 건 그 다음 문장이다. '조상덕 본 사람들은 다 해외여행가고 없다'는 이 한 줄은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박탈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무엇을 위해 조상에게 절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그 중에는 진심으로 조상을 애도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애도는 꼭 명절에 해야하는 건 아니다.

엄청난 교통체증에 시달리며 간신히 고향을 찾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떤 부조리함을 느낄 법하다. 하루이틀 자고 돌아갈 거라면, 이런 날이 아니라 명절 이주 전에 와서 부모님 얼굴을 보면 안되나? 정말 조상님께 절하는 게 복 받는 일일까?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서 정말 행복하고 즐겁나? 좋아하는 친척이라면 다른 날 만나 웃으며 술 마시고 행복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들을 한 번쯤 해봤을 법하다.

그런 와중에 진짜 조상 덕 본 사람들, 흔히 금수저라고 상정된 어떤 존재들은 다 해외여행 가 있을 거라는 말이 너무도 와 닿는다. 공항은 100만 명 이상이 몰리고, 그들은 행복을 찾아 떠나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댓글 한 줄이 우리 나라 명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묘한 부조리를 폭로해버린 것이다.

그 다음 줄은 더 잔인하다. 행복하기 보다는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이 더 많을 수 있는 이 명절 속의 '나'를 비하하는 듯한 묘사가 가슴을 파고든다. 고작 세 문장, 실질적으로는 두 문장에 불과한 이 댓글이 많은 사람들을 결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 진짜 내가 좋아하는 삶을 살겠다. 관습의 강박을 뿌리치겠다.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시간을 살겠다. 그렇게 마음먹게 했을 것이다.

물론, 명절 문화에는 좋은 점도 있고, 온 가족들이 긴 연휴에 함께 만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저 댓글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명절에 행복한 사람은 관습대로 행복하면 된다. 그러나 명절에 행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관습을 떨쳐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그것은 더 이상 관습이 아니라 인습이다. 필요한 건 인습을 떨쳐낼 용기였던 것이다.

더 이상 관습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의미로 작동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내게 이로운 관습은 존중하고, 내게 해로운 관습은 과감하게 물리쳐야 하는, 우리는 개별적 삶을 살아간다. 다른 날 가족과 친척을 만나고, 연휴에 해외여행 떠나는 게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한번 뿐인 나의 삶, 지나고 나면 돌아오지 않을 나의 시간을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 삶보다 우선인 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얼마 없는 시간을 쓰고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내게 가장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때로 관습의 반대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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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1-30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금수저인 분이라면 굳이 설이나 한가위에 나라밖마실을 안 가리라 봅니다. 금수저인 분들이 왜 그렇게 붐비는 철에 움직이겠어요.

금수저가 아닌 분들이 바로 설이나 한가위에라도 틈을 내어 나라밖마실을 가려고 하지 싶습니다. 다만, 금수저는 아니어도 금수저에 가 닿으려고 애쓰면서 목돈을 모은 분들이 설이나 한가위에 나라밖으로 나갈 테지요.

저처럼 그냥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설이나 한가위뿐 아니라, 여느 때에도 조용히 시골에서 하늘바라기와 바람바라기와 새바라기를 합니다. 구태여 멀리 나가야 하지 않고, 새가 어련히 찾아와서 노래를 베푸니까요.

저는 스스로 흙수저가 아닌 ‘풀수저‘나 ‘숲수저‘로 여깁니다. 어떤 수저를 쥐느냐를 놓고서 싸우거나 미워하거나 시샘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사랑수저와 노래수저와 ‘아이돌봄수저‘로 ‘살림수저‘를 가꾸는 하루이면, 온누리가 아늑(평화)하리라 봅니다.

bari_che 2025-01-3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논점을 벗어난 ˝정답˝으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