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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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은 진로 얘기하다가 윤희 동생이 그 말을 하더라고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언니가 수학여행 갔다가 안 돌아온 거잖아요. 그 생각이 머릿속에 박힌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활동하고 다니는 것 보고도 “엄마,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라고 해요. 자기도 그 말을 주위에서 듣겠죠. “바꿔놨잖아. 이번에 박근혜 탄핵시켰잖아. 조금씩 바뀌잖아.” 그렇게 대답하기는 했는데... 본인이 스스로 깨달아야겠죠. 이만큼 살아보니 세상일이 한순간에 바뀌는 건 없더라고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도 맞는데, 일단 살아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249~250쪽-진윤희 엄마 김순길)


열역학제이법칙을 통계역학으로 규명한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요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에른스트 바흐 등 주류학자들의 인신공격성 비판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에게 열역학제이법칙의 허무를 향한 비가역적 결론은 유력한 요인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설마 했으나 곰곰 생각하면 마냥 맹랑한 얘기만은 아니다. 의도와는 무관하게 학자가 쉽게 갇힐 수 있는 이른바 ‘책상물림 급진성’은 이런 경우에도 해당된다. 점과 점 사이 직선처럼 달려가는 수리와 논리를 부둥켜안고 살다보면 구절양장 현실도 그렇다 믿기 십상이리라.


보편 원리가 개체 현실에 적용될 때는 무수한 시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둔감하기는 학자와 아이가 다르지 않다. 아이는 특수한 경험을 현실에 즉각적으로 일치시킨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라는 진윤희 동생의 말은 인간이면 누구나 죽는다는 원리에서는 맞다. 십대 아이가 진로 문제를 얘기하면서 죽음을 거론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보편원리와 무시간적으로 1:1 대응시킨 것이다. 아이의 실패다.


보편 원리가 개체 현실에 적용될 때는 무수한 층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둔감하기는 아이와 아픈 사람이 다르지 않다. 아픈 사람은 특수한 경험을 자기 삶 전체로 확대시킨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라는 진윤희 동생의 말은 인간이면 누구나 죽는다는 원리에서는 맞다. 십대 아이가 진로 문제를 얘기하면서 죽음을 거론하는 것은 트라우마가 자기 삶 전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의 실패다.


진윤희 동생은 ‘아픈’ ‘아이’다. 죽은 아이 진윤희 엄마 김순길이 아픈 아이 진윤희 동생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동안 뼈저리게 느낀 것은 “세상일이 한순간에 바뀌는 건 없더라”는 사실이다. 그런 세상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건강한’ ‘어른’이다. 건강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치유다. 도다. 진리에 육박하는 치유 도는 오늘 이 땅에 오직 416엄마뿐이다.


416엄마가 구동축이 되어 박근혜를 쫓아냈다. 그 구동이 처음 시작된 날이 바로 3년 전 오늘이다. 지난 3년, 특히 최근 이른바 조국전쟁을 겪으면서 416엄마는 더 많이 절망했으리라. 416때 준동했던 것보다 더 그악한 전선을 구축해 ‘촛불정부’를 공격하는 매판 카르텔-자일당, 떡검, 기레기, 개독, 그리고 “지레기(지식인 쓰레기)”의 위용은 실로 귀기무인경이다. 그중에서도 지레기의 아둔함은 416엄마를 더욱 깊은 슬픔에 빠뜨렸다. 3류 지배집단이 짠 프레임에 놀아난 2류 지식인의 제 잘난 붓놀림은 416엄마를 더욱 아픔에 빠뜨렸다. 지레기는 여전히 건강한 어른 시늉을 하고 있다. 회칠한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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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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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당일에 갑자기 아이 얼굴이 생각이 안 나서 핸드폰을 보니 준형이랑 같이 찍은 사진이 없는 거예요.·······그때 깨달았어요. 잘못 살았구나, 이건 사람이 사는 게 아니다, 라고 말이죠.·······그때 많이 울었어요. 후회하고. 저 스스로한테 욕도 많이 했어요.·······사람이 변할 때는 계기가 있어야 하더라고요. 쓰디쓴 계기지만 변하기로 했죠.(244~245쪽-준형 아빠 장훈)


기독교 전통에는 영성체 또는 성찬례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의미하는 음식을) 먹는 공동체의식이다. 21세기 과학시대에 이를 요식행위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은 많지 않을 텐데, 영성 쇠락과 관련된 화석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문제를 보편적인 관점에서 음미하면 육중한 사유 지평이 열린다. 죽은 자의 피와 살을 먹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상징을 넘어선 어떤 실재인가?


먹는 행위는 비대칭의 대칭, 그 역설 창조의 근원적인 상호작용이다. 먹는 존재를 살리는 작용임과 동시에 먹히는 존재를 죽이는 작용이다.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거룩한 종결임과 동시에 새로운 삶으로 스며드는 시작이다. 누군가 죽지 않으면 누구도 살지 못한다. 누군가 살지 않으면 누구도 죽지 못한다. 먹고 먹히는 순환은 모든 존재에게서 무한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인간의 호흡·섹스·노동·사랑·양육·학문·예술·종교·정치······· 이 모든 것도 먹고 먹히는 행위의 다른 결일 따름이다. 인간은 다른 어떤 존재도 하지 못하는 두 가지 극적인 먹고 먹히는 행위를 한다. 하나, 숭고한 자발적 희생, 예컨대 십자가 예수. 둘, 권력이 자행하는 대량학살, 예컨대 416사건. 전자는 장엄한 빛이지만 일극집중구조의 거대종교에게 삼켜진다. 후자는 깊은 어둠이지만 깨달음의 “계기”로 바쳐진다.


계기는 변화를 몰고 온다. 변화는 학살된 자의 목숨을 산 자가 극진히 “먹음”으로써 정향된다. 세상은 추상적 관념인 죽음이 아니라 구체적 실재인 죽은 자의 진실을 산 자가 역사 속에서 제대로 밝히고 정치적 과제를 완수함으로써 바뀐다. 416은 피와 살을 먹는 실재 윤리학을 요구한다. 형이상학은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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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서 자식한테 훈계도 하고 조언도 하고 또 기도하고... 이런 일들을 못했거든요. 그런 대화의 시간이 부담스러워진 거예요. 자식을 지키지 못한 부모가 자식한테 조언이나 훈계할 자격이 있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만약에 아들이 “그래놓고 왜 누나를 못 지켰어?” 이런 말을 하면 할 말이 없잖아요.(242쪽-세희 아빠 임종호)


태어나 보니 이미 국가는 정해져 있다. 마치 부모처럼 선택의 여지도 없이 전제된 그 국가가 또 그렇게 당연히 국민의 생명을 보호한다고 믿는다. 이 믿음이 한평생 유지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순간 깨어져 국가와 버성기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두 부류가 어떻게 나뉘며, 믿음과 버성김에도 어떤 층위·진위가 있는지 초군초군 들여다보고 후자 살리는 실천으로 나아감으로써 쟁여지는 기품을 “교양”이라 한다. 교양이 고갈된 국가는 망한다. 사실상 망해버린 국가의 국민으로 세희 아빠 김종호가 시방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채 시공간을 흐르고 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는커녕 작정하고 아이들 250명을 한꺼번에 몰아 죽이는데 그때 거기서 제 자식 지켜낼 수 있는 부모가 누구랴. 불가능한 책임을 짊어지고 죄의식을 뒤집어쓴 채 남은 자식에게 최소한의 부모 노릇조차 못하게 만든 국가를 416부모는 대체 어찌 견뎌야 하나. 상황은 갈수록 참담하고 아득해진다. 교양의 지성소인 지식인이 무참스럽게 배신한 현장을 생생히 목도하는 오늘, 416은 대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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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 엄마하고 둘이서는 별로 울어본 적이 없어요.·······둘이 앉아서 울면 힘만 더 빠지죠.(241쪽-영석 아빠 오병환)


우리는 이렇게 들어왔다. “슬픔은 나누면 반절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곱절이 된다.” 영석 아빠 오병환의 말은 반대다. 그런가. 자식을 잃은 부부는 슬픔을 서로 나누는 사이가 아니다. 덜어내어 주려 해도 피차 빈 공간이 없다. 그 속을 너무 잘 알기에 서로 덜어내지 못한다. 마주 앉으면 힘이 더 빠진다.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이는 남남일 때다.


부부나 가족 사이에 치유상담이 일어나기 힘든 까닭도 본질적으로 이와 같다. 마음병 앓는 사람들이 본격 치유상담을 받지 못하고 여러 경로로 헤매는 것은 가족·친지 등 연고를 따라 유사상담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아픈 사람들이 얻는 것은 대부분 긍정의 힘, 정신력 운운하는 사이비 결과물이다. 하고 싶은, 해야 할 말을 결결이 하지 못한 채, 매끈한 위로와 훈계를 듣고 물러나 어정쩡하게 웃으며 시나브로 죽어가는 병인의 모습 모습은 이미 익숙한 풍경 아닌가.


남이 기본적으로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조건에 있다는 말과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난다는 말은 다르다. 현실에서 유사상담이 횡행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훈련받은 전문 상담자조차 대부분 사이비 처방을 던진다. 남의 속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쉽게 생각한 결과다. 화학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너무 같아서나 너무 달라서나 매한가지다. 이때 ‘같고 다른’ 경계에 소미한 틈 하나를 내는 일로 천지가 갈라진다.


한 어머니가 20대 초반 딸을 어렵사리 데리고 찾아왔다. 어떤 의욕도 어떤 움직임도 일으킬 기색을 보이지 않아 속수무책이라 했다. 어머니한테는 그래도, 아니 그러니까 ‘에너지’를 동원하지 말고 ‘소식’만으로 조금씩 다가가도록 조언했다. 딸에게는 의학적 언급은 일절 하지 않고 현재 겪는(다는) 어려움에 있는 그대로 맞장구만 쳐주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기별은 오지 않았다. 나는 고요히 묵상한 뒤 평범한 글 하나를 써 보냈다.


“안녕! 어찌 지내니? 여전히 힘든가보구나. 힘들 때 누가 힘내라 하면 확 짜증나지. 그런 말은 하지 않을게. 누군가 선뜻 도와주겠다고 해도 확 빈정상하지. 그런 말도 하지 않을게. 걍, 지푸라기 하나 잡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쌤을 의사도 멘토도 아닌 그저 지푸라기라고 여기고 가볍게 함 잡아봐. 누가 알겠니, 뭔 일 날지?^^”


조금 뒤, 반가운 답장이 날아들었다. 자식 잃은 부부는 이런 교신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침묵의 지푸라기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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