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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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당일에 갑자기 아이 얼굴이 생각이 안 나서 핸드폰을 보니 준형이랑 같이 찍은 사진이 없는 거예요.·······그때 깨달았어요. 잘못 살았구나, 이건 사람이 사는 게 아니다, 라고 말이죠.·······그때 많이 울었어요. 후회하고. 저 스스로한테 욕도 많이 했어요.·······사람이 변할 때는 계기가 있어야 하더라고요. 쓰디쓴 계기지만 변하기로 했죠.(244~245쪽-준형 아빠 장훈)


기독교 전통에는 영성체 또는 성찬례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의미하는 음식을) 먹는 공동체의식이다. 21세기 과학시대에 이를 요식행위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은 많지 않을 텐데, 영성 쇠락과 관련된 화석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문제를 보편적인 관점에서 음미하면 육중한 사유 지평이 열린다. 죽은 자의 피와 살을 먹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상징을 넘어선 어떤 실재인가?


먹는 행위는 비대칭의 대칭, 그 역설 창조의 근원적인 상호작용이다. 먹는 존재를 살리는 작용임과 동시에 먹히는 존재를 죽이는 작용이다.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거룩한 종결임과 동시에 새로운 삶으로 스며드는 시작이다. 누군가 죽지 않으면 누구도 살지 못한다. 누군가 살지 않으면 누구도 죽지 못한다. 먹고 먹히는 순환은 모든 존재에게서 무한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인간의 호흡·섹스·노동·사랑·양육·학문·예술·종교·정치······· 이 모든 것도 먹고 먹히는 행위의 다른 결일 따름이다. 인간은 다른 어떤 존재도 하지 못하는 두 가지 극적인 먹고 먹히는 행위를 한다. 하나, 숭고한 자발적 희생, 예컨대 십자가 예수. 둘, 권력이 자행하는 대량학살, 예컨대 416사건. 전자는 장엄한 빛이지만 일극집중구조의 거대종교에게 삼켜진다. 후자는 깊은 어둠이지만 깨달음의 “계기”로 바쳐진다.


계기는 변화를 몰고 온다. 변화는 학살된 자의 목숨을 산 자가 극진히 “먹음”으로써 정향된다. 세상은 추상적 관념인 죽음이 아니라 구체적 실재인 죽은 자의 진실을 산 자가 역사 속에서 제대로 밝히고 정치적 과제를 완수함으로써 바뀐다. 416은 피와 살을 먹는 실재 윤리학을 요구한다. 형이상학은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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