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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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가레: 나는 식물 세계에서 피난처를 구하고 식물 세계에서 도움을 청할 필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사소하지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언니가 엉엉 소리를 지르며 운다는 이유로 부당하게도 내게 무거운 벌을 내렸습니다. 당시 나는 아직 매우 어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집을 나왔고 그 일이 벌여졌던 정원을 떠나 숲으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그때 벌써 나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에게 도움을 구했던 것입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내렸던.......결정은 개인, 담론, 사유의 중성화에 맞서 내 여성적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생명, 그 생명의 성장과 공유를 마비시키는 문화구조에 나를 복속시키는 대신 생명을 향한 갈망에 참여했던 것입니다,(27~28)

 

마더: 식물들은 내면과 외부세계라는 전통적 분리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매우 독특한 피난처를 마련해줍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거주지는 우리를 위협적인 외부 세계에서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자신을 외부 세계에서 완벽하게 분리시켜 접촉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 환경과 공동체와 국가에서 추방당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에서 또 다시 분리되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식물 세계에서 피난처를 찾는 까닭일 테지요........우리는 식물적 성장의 모델을 좇아서 식물, 원소, 새로운 에너지가 온전히 드러나고 또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에서 피난처를 찾습니다. 난민, 거절당한 사람, 추방당한 사람이 처한 조건은 식물 자연으로 돌아가는 데 유리하지 않을까요?(186)

 

최근 벨기에 한 대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녹음 우거진 곳에서 성장한 아이가 그렇지 않은 곳에서 자란 아이보다 지능은 높고 문제행동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딸아이가 중학생 땐가 함께 횡성 태기산에 간 적이 있다. 한참 숲길을 걷는데 딸아이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언젠가는 숲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숲에 오면 눈빛이 달라지거든.” 이 이야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그는 식물 세계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 경우 앞 이야기에는 이리가레가, 뒤 이야기에는 마더가 포개진다. 자신을 어떠하다고 말하지만 식물 세계가 어떠하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 이리가레 이야기다. 마더 이야기는 식물 세계의 어떠함을 추방당한 사람들이 깃드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리가레와 마더의 같고도 다른 인생이 이런 차이를 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도 그들과 다르고도 같은 인생을 살아 왔으므로 이런 반응을 보인다. 내 감각으로는 이리가레가 자신의 punctum을 따라 식물 세계에 다분히 도구나 환경의 맥락으로 접근하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식물 세계 자체의 풍경을 결결이 감지하는 데는 다소 무감하지 않은가 한다. “중성화에 맞서 내 여성적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결정으로 식물 세계에 들어왔다면서 식물 세계를 중성이라고 한 그의 말이 흘려버릴 수 없는 증거다. 중성이기 때문에 피난처가 된다면 성차화를 그토록 벼리는 연유가 무엇인가.

 

혹시 마더가 내면과 외부세계라는 전통적 분리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피난처를 말한 것이 이리가레의 중성과 호응하나? 아니다. 마더의 말은 식물 세계는 인간 세계처럼 난민, 거절당한 사람, 추방당한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으므로 그런 분리가 없다는 뜻이다. 중성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성을 평등하게 품는 다양성, 아니 무한성이어서다.

 

이리가레는 여전히 분노하고 있다. 여전히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은 윤리적 판단 대상이 아니다. 그의 분노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은 남성적 협량의 소산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분노를 안고 식물 세계, 그러니까 피난처에 들어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다.

 

피난처의 제일 소임은 무조건적 수용이며, 핵심 소임은 치유며, 근원 소임은 새로운 네트워킹의 창조다. 이리가레의 분노는 상처의 통증(공포불안)에서 왔다. 공포불안은 추방, 그러니까 분리당한 데서 왔다. 정의롭지 못한 분리를 무조건적으로 풀어주어야 한다. 식물 세계는 조건을 따져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치유가 시작된다. 치유는 진압이 아니다. 분노를 사그라뜨리는 것은 치유일 수 없다. 분노할 만한 곡절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근원에서는 무한 성차들이 무애 자재의 극락정토 하느님나라를 만들어간다. 극락정토 하느님나라가 식물 세계다. 숲이다.


숲의 치유는 보았지만 치유의 숲은 아직 덜 본 이리가레에게 난 봤지롱!” 할 수 있는 남자 사람 그 누군가. 그는 그저 이리가레보다 가벼운 상처를 받았을 뿐이 아닌가. “내 아이도 녹음 우거진 곳에서 키워야지!” 하는 주류를 속물이라 비웃기는 쉽지만 상처 깊은 소수자를 위해 숲속에서 눈빛 달라지기를 축원하는 일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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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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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가레: 어떻게 식물 존재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식물 존재를 망각하지 않고, 그 각성 속에서 나 자신도 망각하지 않으면서 식물 존재와 소통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식물 존재와 나 자신을 모두 잃지 않으면서 식물 존재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나는 여전히 인간들 사이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어떤 길을 통해서 돌아올 수 있을까요?(22)

 

마더: 자신의 세계를 타자에게 개방하는 위험은.......자신을 잃어버릴 위험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것이 위험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문제는 종종 나 자신을 잊어버리면서 과연 내가 타자를 발견할 수 있고, 이 발견 덕분에 식물 세계와 더 풍요로운 관계를 가꿀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어려운 길은 성차의 경험 안에서 식물 세계, 그리고 이를 통해 자연 세계와 공동의 관계를 맺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은 희생이나 자기희생이 아닙니다. 결단코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개별적으로 식물과 맺는 친밀성의 경험은 이미 어느 정도는 향후 인간이 식물에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을 배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179)

 

주디스 버틀러가 문득 떠오른다.

 

관계는 나 너의 개체화individuation에 선행한다. 따라서 내가 윤리적으로 행동할 때, 경계 지어진 존재로서 나는 허물어진다. 나는 산산이 부서진다. 나는 나라는 것이, 내가 보존하고자 하는 생명을 가진 에 대한 나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관계 없이 이 는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다.”(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162)

 

어조도 내용도 이리가레와 마더하고는 정반대다. ‘관계의 감응도가 워낙 다르다. 무릇 관계란 당사자의 정체성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화학이 아니다. 피차 허물어지고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각성되는 무엇이 새로운 차이를 창조해낼 때 관계는 성립한다. 그런 관계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의 너와 나는 엄밀히 말해 너와 나가 아니다. 불변하는 절대 실체로서 각각 고립된 차이들일 뿐이다. 이른바 탈근대 허무주의다.

 

허무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는 허물어지고 부서진다. 너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잃는다. 너를 얻기 위해 나를 버린다. 네가 되기 위해 나를 부정한다. 내가 너로 온전히 바뀌면 나와 너의 관계는 완성된다. 완성은 다음 시작을 향해 다시 나아간다. 이 과정을 일찌감치 정리해 놓은 청원 유신을 부른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번역은 쉽다. “나는 나고 숲은 숲이다. 나는 내가 아니고 숲은 숲이 아니다. 내가 숲이고 숲이 나다. 나는 나고 숲은 숲이다.” 신체 감각이, 정서의 흐름이, 삶의 기조가 그렇게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지극히 어렵다. 이 부분에서 내가 수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 감응이자 증거다. 어떻게 말해도 함부로 하는 말이 될 가능성이 크니 망설이고 주저한다. 분명한 것은 라는 단일 인칭에 귀속시킨 이 생명체가 억조 원소와 생명의 네트워킹이라는 사실이다. 이 네트워킹은 애초부터 숲이었다. 지구라는 거대한 숲의 작디작은 일부로서 살아왔다. 자각하지 못한 세월이 길었을 뿐, 나는 숲이고 숲은 나다. 내가 숲일 때 나는 나를 잃어버리는가? 그렇다. 이때 잃는 나는 . “를 잃어서 되찾는 나는 이다. 사유와 삶이 통째로 바뀐 네트워킹 나, 그 역동적 사건. 사건은 찰나마다 창조가 일어난다. 창조가 참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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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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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가레: 어떻게 우리는 식물 세계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까요? 식물 세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가운데 하나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거나 말없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20)

 

마더: 나는 오직 인간만이 말을 하고 다른 존재들은 소음이거나 벙어리 침묵이라고 결론짓기를 주저합니다. 우리는 타자들이 말하는 것은 어떻게 경청해야 하는지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178)

 

모든 언어가 인간의 말로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몸짓과 살아 있는 몸들도 말을 합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특정 장소에 살고 있는 방식으로 말합니다.(177)

 

우리들은 이 식물 존재에 의식적으로 참여하거나, 혹은 대개 그렇듯 무의식적으로 참여합니다.(176~177)

 

나중에 따지고 보니 우스운 것이었지만 정치적 이유랍시고 강원도 어느 산골마을에 숨어(!) 지내던 적이 있었다. 한 제자의 백부가 월세 조금 받고 작은 집 한 채를 통째 내주었다. 봄이 되자 나는 담장 안 좁은 땅뙈기에다 소꿉장난 판을 차렸다. 종자나 모종을 얻어다 심어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나름 재미가 쏠쏠했다. 스무 가지 가까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오이다.

 

오이는 넝쿨식물이어서 처음 기댈 지주와 나중에 타고 번져갈 그물 같은 구조물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처음에 70cm가량의 지주를 세워 놓고 다음날 아침 나가보았다. 넝쿨손이 지주 반대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만히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마치 사람에게 하듯 나직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얘야, 네가 기댈 듬직한 기둥이 반대 방향에 서 있단다.” 식물들과 수시로 이야기를 주고받곤 하는 산골 소년이던 자신과 재회한 듯 나는 해시시 웃고 돌아섰다. 다시 다음 날 아침. 오이를 보려고 나갔다가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제 그 넝쿨손이 정확히 반대로 방향을 틀어 지주를 옹골차게 붙잡고 있지 않은가.

 

물론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결과는 동일했을 수 있다. 아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망연히 서서 상념에 잠겼다. “그래. 결과는 결국 같았으리라. 그러나 시간도 같았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다. 확인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 사실 여부 자체 문제라기보다 내가 오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삼십 년 만에 산골로 돌아온 소년의 물활론이 맞다.” 그런가.

 

물활론이라는 규정 자체가 실은 인간중심주의다.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고 사유가 있고 언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식론적 한계와 존재론적 부정을 등치시키는 망발이다. 식물 상호간에 일어나는 언어적 소통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해서 식물은 침묵한다고 치부할 것이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또한 단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서로 주장해야 한다. 식물은 식물의 말을 한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도리어 경청의 근거가 되어 마땅하다.

 

경청은 물론 자유이용권이 아니다. “특정 장소에 살고 있는 방식인 언어는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입에 담지 못하는 언어를 말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침묵, 다시 그러니까 말없이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순간 폭력이 된다. 폭력으로 비화할 순간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겸손이 다름 아닌 경청이다. 겸손은 에서 회심한 인간이 작음참여하는 종자행위다.

 

참여하지 않으면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말에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들음으로 감응하지 못한다. 참여는 대개 그렇듯 무의식적으로이루어진다. 무의식의 참여, 그 소미한 언어는 숭숭 구멍 뚫린 인간의 고막을 울리지 않고 지나간다. 울리지 않아도 소리를 전해주는 고막을 지닌 영혼만이 식물의 언어를 듣는다. 들은 그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가는 그 다음 문제다.

 

이 그 다음 문제를 풀어낸 사람 누군가. 마더도 아직 없다는 데 동의한다. 없으므로 이제 여기서 패러다임 전환의 시동을 걸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동물 문명의 최첨단에서 일어난 이 각성에 감화 받는 일은 동물 문명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식물 문명의 한가운데 빈터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내 몫이 아니다. 나는 식물언어의 본령이 화쟁이라는 진리를 몸으로 알고 있다. 내가 그려낼 식물 세계 또한 화쟁 풍경이다. 화쟁은 천둥과 폭풍을 몰고 오는 논쟁이 아니다. 천둥과 폭풍 소리를 꿰뚫고 생명 네트워킹 소식을 전하는 소미한 소리다. ㅅㅅㅅㅅ ㅅㅅㅅ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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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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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가레: 나는 동일성을 다수성으로 대체한다고 해서.......전환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여럿하나는 종종 동일한 논리에 가담합니다. ‘하나the one’ 혹인 일자the One’가 사유와 주체성의 구성에서 제거된다면, 그것은 얼굴을 가린 채 독재자를 가장하고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민주적 지도자로를 가장하고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17)

 

마더: 식물은 단순히 하나 혹은 일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존재들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재구성하는 다수성입니다........자라는 존재로서 식물들은 보편성의 부정이 아니라 단독적 보편성의 형상입니다.(175~176)

 

유구한, 심지어 진부한, 그러나 서구철학 논쟁의 왕좌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는 주제다. 일자 철학, 그러니까 동일성의 철학이 궁극에 가 닿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니체가 다자철학, 그러니까 차이의 철학을 일으켰다. 그 차이마저 실체화 또는 절대화함으로써 차이의 철학도 이른바 탈근대 허무주의로 미끄러지고 있다. 작금의 쟁점 상황이다. 이리가레의 촉수도 거기를 향한다.

 

마더는 식물의 차이는 다시 허무로 떨어질 불변의 차이가 아니라고 한다. 식물은 자라는 존재로서 자라는 존재들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재구성하는 단독적 보편성의 형상이라 한다. 자란다, 재구성한다는 표현으로 그가 그려낸 것은 아마도 차이들이 평등하게 만나고, 상호작용하고, 새로운 차이를 생성해내는 역동적 네트워킹의 풍경인 듯하다.

 

이리가레가 이런 이치를 생각하지 못해서 상대를 무시하는 어감까지 느껴지는 질문을 던진 것일까? 그렇다. 마더가 이런 풍경을 상상하지 못해서 단독적 보편성이라는 어찌 보면 옹색한 용어를 써가며 답변한 것일까? 그렇다. 공통된 그렇다는 대답은 공통된 기반에 근거를 둔다. ‘참 아니면 거짓이라는 일극집중의 형식논리구조다. 형식논리는 거의 모든 서구지성에게 지긋지긋한 스토커다. 익숙한 예로써 다시 접근해보자.

 

유일신을 숭배하는 거대종교야말로 지난 6000년 동안 인류가 구축해온 동일성의 철학을 가장 오달지게 키워서 잡아먹은 괴물이다. 이 괴물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 이미 서구 지성은 답을 내놓았다. 만들어진 신, 그러니까 무신론이다. 유일신론이 만들어낸 허무주의가 무신론으로 극복될까? 설마. 그럴 리가. 무신론은 무한히 분화된 허무주의로 떨어질 뿐이다.

 

이걸 걱정하는 이리가레에게 마더가 내민 대안은 이를테면 범재신론이나 범신론이다. 범재신론은 근대 허무주의의 잔영이 있다. 범신론은 탈근대 허무주의의 잔영이 있다. 범재신론이나 범신론으로 무한無限, 그러니까 유일신론과 무신론 모두가 갇혀버린 허무주의 터널을 관통할 네트워킹 실재를 묘사하거나 구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면 이리가레의 성차sexuate difference 이론은 어떤가?

 

나는 에서 시작하여 다르게 성차화된 주체들 사이의 관계를 문화적으로 정교하게 가다듬고 윤리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니체의 가르침을 존중하면서 니힐리즘을 극복할 통로이자 기본 구조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점이 니체가 자신의 작업을 밀고나아가기 위해 여성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느꼈던 점이 아닐까요?(17)

 

페미니스트 철학자로서 이리가레는 일자와 다자의 대칭이 근본적으로 배태하고 있는 극단적 분열의 에너지를 직관한 듯하다. 극단적 분열의 결과는 불가피한 허무주의다. 방법은 하나다. 다자를 이자二者로 놓는 것이다. 이자의 근거는 성차다. 성차의 이자를 옹골차게 사유하고 실천할 때 다자의 허무주의를 막을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성차가 유야무야된 다자는 허무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날카로움과 단호함은 남성인 마더가 체감하지 못한 부분이기 때문에 기본 공감에 인색할 하등 이유가 없다. 질문은 바로 여기서 생긴다.

 

그렇다면 이리가레의 성차는 남성: 여성이라는 인간중심 양성구조에 묶이는 것 아닌가? 그 의구심은 이 책이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는다. 이리가레는 성차 의식을 강조하면서 마더에게 이렇게 말한다.

 

식물 세계에 대한 당신의 강조는 당신이 생명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라는 점 또한 상기시켜야 합니다.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은 성차화되어 있다는 것.......(19)

 

이 문제의식을 수용한 마더는 더 나아가 질문한다.

 

당신은 식물의 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식물의 성은 인간의 성차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식물의 성의 유동성, 유연성, 가소성입니다. 많은 식물들은 양성적이고, 또 다른 많은 식물들은 살아 있는 동안 암컷에서 수컷으로, 수컷에서 암컷으로 성이 바뀝니다. 무성생식을 하는 식물들도 있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성차는 체현의 현상과 생명 자체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일직선적 과정, 즉 우리가 식물과 접촉하면서 살아 있는 존재로서 우리 자신의 성적 존재를 환기시키는 (혹은 환기하는) 과정일까요? 식물세계는 프로이트가 인간 유아의 다형적 도착이라 부른 것보다 더 다양한 성적 차이들에 자신의 성적 차이를-이 성적 차이를 통해 우리는 식물들을 만나고자 합니다-열어 보이는 것일까요?(179~180)

 

이리가레는 이 반문에 정색하고 단도직입으로 답을 하지 않는다. 전혀 다른 곳에서 조금, 아니 사뭇 기이한 말을 한다.

 

만일 식물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은 중성일 것입니다. 식물 영혼의 생식은 두 식물 사이의 성적인 끌림이나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식에 필요한 배아나 씨앗을 전달하는 제삼자-이 제삼자는 바람이나 곤충이 될 수 있겠지요-덕분에, 그리고 흙이 배양의 그릇으로 사용하는 생식의 순환 덕분에 일어납니다.(130~131)

 

정직하게 말해 나는 이 부분을 읽는 동안 당혹감에 휩싸였다. 인간 사회에서 추방된 자신을 품어 교감함으로써 되살려낸 식물을 고작 이 정도로 인식하고 책을 쓰다니. 식물에 영혼이 있다면, 이라고 말하다니. 영혼이 중성이라니. 중성이란 말을 이리도 쉽게 쓰다니. 성적인 끌림이나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니. 이리가레의 식물 인식 근저에 정확히 다른 무엇이 더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중성 발언으로 판단하건대 적어도 마더의 유동성, 유연성, 가소성, 양성, 무성생식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중성 식물은 성차화된 존재인 여성 이리가레에게 과연 무엇인가? 중성인 식물로써 대체 어떻게 성차화된 인간을 상기시키는가?

 

나는 이 질문에 이리가레가 명쾌한 답을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더가 식물의 성적 유동성, 유연성, 가소성으로 성차화 사유를 풍요롭게 하거나 반대로 비-범주화하리라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틈새에서 나 스스로 답을 구할 것이다. 내 길라잡이는 원효의 일심-이문(화쟁)-삼공(무애)一心-二門(和諍)-三空(无㝵) 사상이다. 원효사상은 동일성의 철학과 차이의 철학이 대칭점에 서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공히 떨어지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사유와 실천을 제시한다. 내가 이리가레와 마더를 계기 삼아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끌어안기 바라는 것은 식물과 함께 나누는 생명 감각과 참여와 행복이다. 모르긴 해도 이것은 내 생애 마지막 올리는 스스로 몸 굿이지 싶다. 굿 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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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방통 2021-03-09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종교의 三一 철학이 원효의 不二不一보다는 더 대칭성에서 벗어나 보이네요.
 
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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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생애 최초 십 년을 디딜방아로 빻은 옥수수에 산나물 넣어 밥을 해 먹는 강원도 평창 오대산 계곡의 작은 산골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원시 상태나 다름없는 삶의 자연적 조건은 제 생애를 꿰뚫고 흐르는 녹색, 그러니까 식물적 감수성을 새겨넣어주었습니다. 이끼는 물론 지천에 깔린 이름 모를 크고 작은 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풋고추, 오이, 호박....... 산을 뒤덮은 소나무, 전나무....... 천지가 온통 녹색이었으니 생명의 본질이 녹색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을 테지요.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녹색이라면 눈 감고 만져서도, 냄새만 맡아도 느낄 만큼 살가웠습니다.

 

그리고 녹색생명은 적어도 제게는, 동물보다 격조 높은 생명입니다. 녹색 생명은 세계의 진실이 비대칭적 대칭이라는 것을 동물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뿌리내린 땅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므로 쌍방향 생명력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한의학은 이런 녹색 생명체를 그대로 약으로 쓰니 제가 한의사가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일 것입니다. 상담치료 또한 이런 이치를 그대로 받아들였음은 물론입니다.”

 

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2014,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6-7쪽에 실린 글이다. 루스 이리가레와 마이클 마더가 식물의 사유라는 이름의 책으로 묶일 서신을 교환하던 바로 그 무렵 나는 이 책을 쓰고 있었다. 같은 감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동시성이라 하면 신비주의가 되려나. 신비주의든 아니든 분명한 것은 겹치는 시기에 루스 이리가레와 마이클 마더처럼 나 또한 지극한 식물 생명감각으로 내 의학과 인문사상을 숙고하고 구성했다는 사실이다. 서로를 이어주는 정신 네트워크가 실재한다는 말에 품었던 의심과 신뢰의 경계선이 아연 뭉개진다.

 

육식을 거의 하지 않아서 초식동물이라는 별명을 지닌 정도일 뿐 스스로 식물성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다가 뚜렷하게 자각한 것은 40이 넘은 어느 시점이었다. 한의대에 가려고 경기도 용인에 있는 작은 절에서 공부할 때였다. 숲속을 걷는 게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는데 늘 동행하던 처사 한 분과 내가 확연히 다른 점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동물에만 관심을 가지는데 나는 식물에만 관심을 보였다. 어느 순간 그가 말했다. “강 선생은 식물성인간이군. 물론 나는 동물성인간이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나온 내 삶 모두가 한 두름에 꿰어지는 느낌이 왈칵 들이닥쳤다. 덧붙일 어떤 말도 필요 없이 나는 내가 식물성인간이며 그 의미가 무엇들로 구성되는지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한의사가 되어 진료소를 냈다. 개원 풍경이 어디나 그렇듯 난초를 포함한 여러 개의 화분이 선물로 들어왔다. 그 식물들이 대부분 1년 안에 죽는다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나도 처음엔 무심코 습관으로 물을 주었다. 그런데 2-3년이 지나도 그들 모두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먼저 놀란 것은 간호사였다. 나는 한 동안 잊고 지냈던 진실과 재회했다. “, 내가 식물성인간이라 얘들이 곁에서 오래 살 수 있구나!” 그 뒤부터 나는 단 한 번도 무심코 물을 준 적이 없다. 쓰다듬고, 가볍게 건드리고, 말도 건넸다. 5년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하나 둘씩 죽었는데 10년 째 곁을 지키는 난초가 있다. 내가 늙어가면서 그랬듯 난초도 키가 작아졌지만 녹색만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식물성인간으로서 식물성 공부를 하고 식물성 치료를 하고 식물성 글쓰기를 한다. 식물성 나들이 어느 길목에서 루스 이리가레와 마이클 마더가 쓴 식물의 사유소식을 듣는다. 관심과 기대가 남달랐다. 나는 임상가라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데 더 관심이 가고 더 기대를 품는다. 이 책이 내 관심에 부응하고 기대를 충족시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저자들이 식물을 경유해through vegetal being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만 동아시아 임상가인 내게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그들이 철학자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임상가의 관심과 기대가 앞서가거나 어긋난 측면도 있으니 저자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저자들의 생각을 발맘발맘 따라가면서 내 관심과 기대를 스스로 톺아보면 예상 밖의 무엇과 조우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일단 길을 나서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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