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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이리가레: 나는 식물 세계에서 피난처를 구하고 식물 세계에서 도움을 청할 필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사소하지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언니가 엉엉 소리를 지르며 운다는 이유로 부당하게도 내게 무거운 벌을 내렸습니다. 당시 나는 아직 매우 어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집을 나왔고 그 일이 벌여졌던 정원을 떠나 숲으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그때 벌써 나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에게 도움을 구했던 것입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내렸던.......결정은 개인, 담론, 사유의 중성화에 맞서 내 여성적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생명, 그 생명의 성장과 공유를 마비시키는 문화구조에 나를 복속시키는 대신 생명을 향한 갈망에 참여했던 것입니다,(27~28쪽)
마더: 식물들은 내면과 외부세계라는 전통적 분리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매우 독특한 피난처를 마련해줍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거주지는 우리를 위협적인 외부 세계에서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자신을 외부 세계에서 완벽하게 분리시켜 접촉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 환경과 공동체와 국가에서 추방당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에서 또 다시 분리되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식물 세계에서 피난처를 찾는 까닭일 테지요........우리는 식물적 성장의 모델을 좇아서 식물, 원소, 새로운 에너지가 온전히 드러나고 또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에서 피난처를 찾습니다. 난민, 거절당한 사람, 추방당한 사람이 처한 조건은 식물 자연으로 돌아가는 데 유리하지 않을까요?(186쪽)
최근 벨기에 한 대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녹음 우거진 곳에서 성장한 아이가 그렇지 않은 곳에서 자란 아이보다 지능은 높고 문제행동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딸아이가 중학생 땐가 함께 횡성 태기산에 간 적이 있다. 한참 숲길을 걷는데 딸아이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언젠가는 숲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숲에 오면 눈빛이 달라지거든.” 이 이야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그는 식물 세계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 경우 앞 이야기에는 이리가레가, 뒤 이야기에는 마더가 포개진다. 자신을 어떠하다고 말하지만 식물 세계가 어떠하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 이리가레 이야기다. 마더 이야기는 식물 세계의 어떠함을 추방당한 사람들이 깃드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리가레와 마더의 같고도 다른 인생이 이런 차이를 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도 그들과 다르고도 같은 인생을 살아 왔으므로 이런 반응을 보인다. 내 감각으로는 이리가레가 자신의 punctum을 따라 식물 세계에 다분히 도구나 환경의 맥락으로 접근하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식물 세계 자체의 풍경을 결결이 감지하는 데는 다소 무감하지 않은가 한다. “중성화에 맞서 내 여성적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결정으로 식물 세계에 들어왔다면서 식물 세계를 중성이라고 한 그의 말이 흘려버릴 수 없는 증거다. 중성이기 때문에 피난처가 된다면 성차화를 그토록 벼리는 연유가 무엇인가.
혹시 마더가 “내면과 외부세계라는 전통적 분리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피난처를 말한 것이 이리가레의 중성과 호응하나? 아니다. 마더의 말은 식물 세계는 인간 세계처럼 난민, 거절당한 사람, 추방당한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으므로 그런 분리가 없다는 뜻이다. 중성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성을 평등하게 품는 다양성, 아니 무한성이어서다.
이리가레는 여전히 분노하고 있다. 여전히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은 윤리적 판단 대상이 아니다. 그의 분노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은 남성적 협량의 소산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분노를 안고 식물 세계, 그러니까 피난처에 들어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다.
피난처의 제일 소임은 무조건적 수용이며, 핵심 소임은 치유며, 근원 소임은 새로운 네트워킹의 창조다. 이리가레의 분노는 상처의 통증(공포불안)에서 왔다. 공포불안은 추방, 그러니까 분리당한 데서 왔다. 정의롭지 못한 분리를 무조건적으로 풀어주어야 한다. 식물 세계는 조건을 따져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치유가 시작된다. 치유는 진압이 아니다. 분노를 사그라뜨리는 것은 치유일 수 없다. 분노할 만한 곡절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근원에서는 무한 성차들이 무애 자재의 극락정토 하느님나라를 만들어간다. 극락정토 하느님나라가 식물 세계다. 숲이다.
숲의 치유는 보았지만 치유의 숲은 아직 덜 본 이리가레에게 “난 봤지롱!” 할 수 있는 남자 사람 그 누군가. 그는 그저 이리가레보다 가벼운 상처를 받았을 뿐이 아닌가. “내 아이도 녹음 우거진 곳에서 키워야지!” 하는 주류를 속물이라 비웃기는 쉽지만 상처 깊은 소수자를 위해 숲속에서 눈빛 달라지기를 축원하는 일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