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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이리가레: 어떻게 식물 존재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식물 존재를 망각하지 않고, 그 각성 속에서 나 자신도 망각하지 않으면서 식물 존재와 소통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식물 존재와 나 자신을 모두 잃지 않으면서 식물 존재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나는 여전히 인간들 사이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어떤 길을 통해서 돌아올 수 있을까요?(22쪽)
마더: 자신의 세계를 타자에게 개방하는 위험은.......자신을 잃어버릴 위험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것이 위험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문제는 종종 나 자신을 잊어버리면서 과연 내가 타자를 발견할 수 있고, 이 발견 덕분에 식물 세계와 더 풍요로운 관계를 가꿀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어려운 길은 성차의 경험 안에서 식물 세계, 그리고 이를 통해 자연 세계와 공동의 관계를 맺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은 희생이나 자기희생이 아닙니다. 결단코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개별적으로 식물과 맺는 ‘친밀성의 경험’은 이미 어느 정도는 향후 인간이 식물에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을 ‘배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179쪽)
주디스 버틀러가 문득 떠오른다.
“관계는 나 너의 개체화individuation에 선행한다. 따라서 내가 윤리적으로 행동할 때, 경계 지어진 존재로서 나는 허물어진다. 나는 산산이 부서진다. 나는 나라는 것이, 내가 보존하고자 하는 생명을 가진 “너”에 대한 나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관계 없이 이 “나”는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다.”(『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162쪽)
어조도 내용도 이리가레와 마더하고는 정반대다. ‘관계’의 감응도가 워낙 다르다. 무릇 관계란 당사자의 정체성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화학이 아니다. 피차 허물어지고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각성되는 무엇이 새로운 차이를 창조해낼 때 관계는 성립한다. 그런 관계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의 너와 나는 엄밀히 말해 너와 나가 아니다. 불변하는 절대 실체로서 각각 고립된 차이들일 뿐이다. 이른바 탈근대 허무주의다.
허무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는 허물어지고 부서진다. 너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잃는다. 너를 얻기 위해 나를 버린다. 네가 되기 위해 나를 부정한다. 내가 너로 온전히 바뀌면 나와 너의 관계는 완성된다. 완성은 다음 시작을 향해 다시 나아간다. 이 과정을 일찌감치 정리해 놓은 청원 유신을 부른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번역은 쉽다. “나는 나고 숲은 숲이다. 나는 내가 아니고 숲은 숲이 아니다. 내가 숲이고 숲이 나다. 나는 나고 숲은 숲이다.” 신체 감각이, 정서의 흐름이, 삶의 기조가 그렇게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지극히 어렵다. 이 부분에서 내가 수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 감응이자 증거다. 어떻게 말해도 함부로 하는 말이 될 가능성이 크니 망설이고 주저한다. 분명한 것은 “나”라는 단일 인칭에 귀속시킨 이 생명체가 억조 원소와 생명의 네트워킹이라는 사실이다. 이 네트워킹은 애초부터 숲이었다. 지구라는 거대한 숲의 작디작은 일부로서 살아왔다. 자각하지 못한 세월이 길었을 뿐, 나는 숲이고 숲은 나다. 내가 숲일 때 나는 나를 잃어버리는가? 그렇다. 이때 잃는 나는 “나”다. “나”를 잃어서 되찾는 나는 “나들”이다. 사유와 삶이 통째로 바뀐 네트워킹 나, 그 역동적 사건. 사건은 찰나마다 창조가 일어난다. 창조가 참 소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