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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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가레: 나는 동일성을 다수성으로 대체한다고 해서.......전환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여럿하나는 종종 동일한 논리에 가담합니다. ‘하나the one’ 혹인 일자the One’가 사유와 주체성의 구성에서 제거된다면, 그것은 얼굴을 가린 채 독재자를 가장하고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민주적 지도자로를 가장하고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17)

 

마더: 식물은 단순히 하나 혹은 일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존재들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재구성하는 다수성입니다........자라는 존재로서 식물들은 보편성의 부정이 아니라 단독적 보편성의 형상입니다.(175~176)

 

유구한, 심지어 진부한, 그러나 서구철학 논쟁의 왕좌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는 주제다. 일자 철학, 그러니까 동일성의 철학이 궁극에 가 닿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니체가 다자철학, 그러니까 차이의 철학을 일으켰다. 그 차이마저 실체화 또는 절대화함으로써 차이의 철학도 이른바 탈근대 허무주의로 미끄러지고 있다. 작금의 쟁점 상황이다. 이리가레의 촉수도 거기를 향한다.

 

마더는 식물의 차이는 다시 허무로 떨어질 불변의 차이가 아니라고 한다. 식물은 자라는 존재로서 자라는 존재들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재구성하는 단독적 보편성의 형상이라 한다. 자란다, 재구성한다는 표현으로 그가 그려낸 것은 아마도 차이들이 평등하게 만나고, 상호작용하고, 새로운 차이를 생성해내는 역동적 네트워킹의 풍경인 듯하다.

 

이리가레가 이런 이치를 생각하지 못해서 상대를 무시하는 어감까지 느껴지는 질문을 던진 것일까? 그렇다. 마더가 이런 풍경을 상상하지 못해서 단독적 보편성이라는 어찌 보면 옹색한 용어를 써가며 답변한 것일까? 그렇다. 공통된 그렇다는 대답은 공통된 기반에 근거를 둔다. ‘참 아니면 거짓이라는 일극집중의 형식논리구조다. 형식논리는 거의 모든 서구지성에게 지긋지긋한 스토커다. 익숙한 예로써 다시 접근해보자.

 

유일신을 숭배하는 거대종교야말로 지난 6000년 동안 인류가 구축해온 동일성의 철학을 가장 오달지게 키워서 잡아먹은 괴물이다. 이 괴물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 이미 서구 지성은 답을 내놓았다. 만들어진 신, 그러니까 무신론이다. 유일신론이 만들어낸 허무주의가 무신론으로 극복될까? 설마. 그럴 리가. 무신론은 무한히 분화된 허무주의로 떨어질 뿐이다.

 

이걸 걱정하는 이리가레에게 마더가 내민 대안은 이를테면 범재신론이나 범신론이다. 범재신론은 근대 허무주의의 잔영이 있다. 범신론은 탈근대 허무주의의 잔영이 있다. 범재신론이나 범신론으로 무한無限, 그러니까 유일신론과 무신론 모두가 갇혀버린 허무주의 터널을 관통할 네트워킹 실재를 묘사하거나 구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면 이리가레의 성차sexuate difference 이론은 어떤가?

 

나는 에서 시작하여 다르게 성차화된 주체들 사이의 관계를 문화적으로 정교하게 가다듬고 윤리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니체의 가르침을 존중하면서 니힐리즘을 극복할 통로이자 기본 구조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점이 니체가 자신의 작업을 밀고나아가기 위해 여성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느꼈던 점이 아닐까요?(17)

 

페미니스트 철학자로서 이리가레는 일자와 다자의 대칭이 근본적으로 배태하고 있는 극단적 분열의 에너지를 직관한 듯하다. 극단적 분열의 결과는 불가피한 허무주의다. 방법은 하나다. 다자를 이자二者로 놓는 것이다. 이자의 근거는 성차다. 성차의 이자를 옹골차게 사유하고 실천할 때 다자의 허무주의를 막을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성차가 유야무야된 다자는 허무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날카로움과 단호함은 남성인 마더가 체감하지 못한 부분이기 때문에 기본 공감에 인색할 하등 이유가 없다. 질문은 바로 여기서 생긴다.

 

그렇다면 이리가레의 성차는 남성: 여성이라는 인간중심 양성구조에 묶이는 것 아닌가? 그 의구심은 이 책이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는다. 이리가레는 성차 의식을 강조하면서 마더에게 이렇게 말한다.

 

식물 세계에 대한 당신의 강조는 당신이 생명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라는 점 또한 상기시켜야 합니다.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은 성차화되어 있다는 것.......(19)

 

이 문제의식을 수용한 마더는 더 나아가 질문한다.

 

당신은 식물의 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식물의 성은 인간의 성차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식물의 성의 유동성, 유연성, 가소성입니다. 많은 식물들은 양성적이고, 또 다른 많은 식물들은 살아 있는 동안 암컷에서 수컷으로, 수컷에서 암컷으로 성이 바뀝니다. 무성생식을 하는 식물들도 있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성차는 체현의 현상과 생명 자체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일직선적 과정, 즉 우리가 식물과 접촉하면서 살아 있는 존재로서 우리 자신의 성적 존재를 환기시키는 (혹은 환기하는) 과정일까요? 식물세계는 프로이트가 인간 유아의 다형적 도착이라 부른 것보다 더 다양한 성적 차이들에 자신의 성적 차이를-이 성적 차이를 통해 우리는 식물들을 만나고자 합니다-열어 보이는 것일까요?(179~180)

 

이리가레는 이 반문에 정색하고 단도직입으로 답을 하지 않는다. 전혀 다른 곳에서 조금, 아니 사뭇 기이한 말을 한다.

 

만일 식물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은 중성일 것입니다. 식물 영혼의 생식은 두 식물 사이의 성적인 끌림이나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식에 필요한 배아나 씨앗을 전달하는 제삼자-이 제삼자는 바람이나 곤충이 될 수 있겠지요-덕분에, 그리고 흙이 배양의 그릇으로 사용하는 생식의 순환 덕분에 일어납니다.(130~131)

 

정직하게 말해 나는 이 부분을 읽는 동안 당혹감에 휩싸였다. 인간 사회에서 추방된 자신을 품어 교감함으로써 되살려낸 식물을 고작 이 정도로 인식하고 책을 쓰다니. 식물에 영혼이 있다면, 이라고 말하다니. 영혼이 중성이라니. 중성이란 말을 이리도 쉽게 쓰다니. 성적인 끌림이나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니. 이리가레의 식물 인식 근저에 정확히 다른 무엇이 더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중성 발언으로 판단하건대 적어도 마더의 유동성, 유연성, 가소성, 양성, 무성생식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중성 식물은 성차화된 존재인 여성 이리가레에게 과연 무엇인가? 중성인 식물로써 대체 어떻게 성차화된 인간을 상기시키는가?

 

나는 이 질문에 이리가레가 명쾌한 답을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더가 식물의 성적 유동성, 유연성, 가소성으로 성차화 사유를 풍요롭게 하거나 반대로 비-범주화하리라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틈새에서 나 스스로 답을 구할 것이다. 내 길라잡이는 원효의 일심-이문(화쟁)-삼공(무애)一心-二門(和諍)-三空(无㝵) 사상이다. 원효사상은 동일성의 철학과 차이의 철학이 대칭점에 서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공히 떨어지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사유와 실천을 제시한다. 내가 이리가레와 마더를 계기 삼아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끌어안기 바라는 것은 식물과 함께 나누는 생명 감각과 참여와 행복이다. 모르긴 해도 이것은 내 생애 마지막 올리는 스스로 몸 굿이지 싶다. 굿 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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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방통 2021-03-09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종교의 三一 철학이 원효의 不二不一보다는 더 대칭성에서 벗어나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