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리가레: 어떻게 우리는 식물 세계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까요? 식물 세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가운데 하나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거나 말없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20)

 

마더: 나는 오직 인간만이 말을 하고 다른 존재들은 소음이거나 벙어리 침묵이라고 결론짓기를 주저합니다. 우리는 타자들이 말하는 것은 어떻게 경청해야 하는지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178)

 

모든 언어가 인간의 말로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몸짓과 살아 있는 몸들도 말을 합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특정 장소에 살고 있는 방식으로 말합니다.(177)

 

우리들은 이 식물 존재에 의식적으로 참여하거나, 혹은 대개 그렇듯 무의식적으로 참여합니다.(176~177)

 

나중에 따지고 보니 우스운 것이었지만 정치적 이유랍시고 강원도 어느 산골마을에 숨어(!) 지내던 적이 있었다. 한 제자의 백부가 월세 조금 받고 작은 집 한 채를 통째 내주었다. 봄이 되자 나는 담장 안 좁은 땅뙈기에다 소꿉장난 판을 차렸다. 종자나 모종을 얻어다 심어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나름 재미가 쏠쏠했다. 스무 가지 가까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오이다.

 

오이는 넝쿨식물이어서 처음 기댈 지주와 나중에 타고 번져갈 그물 같은 구조물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처음에 70cm가량의 지주를 세워 놓고 다음날 아침 나가보았다. 넝쿨손이 지주 반대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만히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마치 사람에게 하듯 나직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얘야, 네가 기댈 듬직한 기둥이 반대 방향에 서 있단다.” 식물들과 수시로 이야기를 주고받곤 하는 산골 소년이던 자신과 재회한 듯 나는 해시시 웃고 돌아섰다. 다시 다음 날 아침. 오이를 보려고 나갔다가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제 그 넝쿨손이 정확히 반대로 방향을 틀어 지주를 옹골차게 붙잡고 있지 않은가.

 

물론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결과는 동일했을 수 있다. 아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망연히 서서 상념에 잠겼다. “그래. 결과는 결국 같았으리라. 그러나 시간도 같았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다. 확인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 사실 여부 자체 문제라기보다 내가 오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삼십 년 만에 산골로 돌아온 소년의 물활론이 맞다.” 그런가.

 

물활론이라는 규정 자체가 실은 인간중심주의다.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고 사유가 있고 언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식론적 한계와 존재론적 부정을 등치시키는 망발이다. 식물 상호간에 일어나는 언어적 소통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해서 식물은 침묵한다고 치부할 것이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또한 단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서로 주장해야 한다. 식물은 식물의 말을 한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도리어 경청의 근거가 되어 마땅하다.

 

경청은 물론 자유이용권이 아니다. “특정 장소에 살고 있는 방식인 언어는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입에 담지 못하는 언어를 말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침묵, 다시 그러니까 말없이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순간 폭력이 된다. 폭력으로 비화할 순간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겸손이 다름 아닌 경청이다. 겸손은 에서 회심한 인간이 작음참여하는 종자행위다.

 

참여하지 않으면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말에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들음으로 감응하지 못한다. 참여는 대개 그렇듯 무의식적으로이루어진다. 무의식의 참여, 그 소미한 언어는 숭숭 구멍 뚫린 인간의 고막을 울리지 않고 지나간다. 울리지 않아도 소리를 전해주는 고막을 지닌 영혼만이 식물의 언어를 듣는다. 들은 그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가는 그 다음 문제다.

 

이 그 다음 문제를 풀어낸 사람 누군가. 마더도 아직 없다는 데 동의한다. 없으므로 이제 여기서 패러다임 전환의 시동을 걸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동물 문명의 최첨단에서 일어난 이 각성에 감화 받는 일은 동물 문명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식물 문명의 한가운데 빈터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내 몫이 아니다. 나는 식물언어의 본령이 화쟁이라는 진리를 몸으로 알고 있다. 내가 그려낼 식물 세계 또한 화쟁 풍경이다. 화쟁은 천둥과 폭풍을 몰고 오는 논쟁이 아니다. 천둥과 폭풍 소리를 꿰뚫고 생명 네트워킹 소식을 전하는 소미한 소리다. ㅅㅅㅅㅅ ㅅㅅㅅ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