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블루 in 그린』세러피
(3) 우울-공포·불안은 모든 정신장애의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다른 모든 정신장애는 공포·불안에 보이는 병리적 반응입니다. 그중에서 우울은 공포·불안을 직시하고 극복하는 대신 자신의 감각과 인식, 그리고 의지를 체념의 먹이로 내주는 병리적 반응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미리 알아서 스스로를 업신여기고 버리는 것, 그러니까 자기부정입니다. 자기부정의 샘에서 기분이 저하된다, 관심사가 없어진다, 체중이 감소된다, 잠을 자지 못한다, 생각이 느려진다, 피로감이 심하다, 죄책감에 시달린다, 결단력이 떨어진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이런 증상이 흘러나옵니다. 증상을 쫓아다녀서는 우울의 본진을 찾지 못합니다.
우울을 피상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수많은 우울의 희생자가 생겨납니다. 마음의 감기다, 한가해서 걸리는 부자 병이다, 정신력이 약해서 그렇다.......따위의 오해가 ‘다들 그러고 산다. 징징대지 마라’, ‘우울이라니, 뭐가 모자라서?’, ‘네가 우울이면 나는 시체다.’.......따위의 막말을 낳습니다. 병으로서 우울은 다만 기분 문제가 아닙니다. 우울을 느끼지 못할 만큼 바쁘게 사는 것 자체가 병적인 우울입니다. 정신력이 약해서 걸리는 병이라면 그 약한 정신력은 대체 무엇으로 강하게 할까요? 병이 된 우울은 집요하고 육중하며 잔혹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자기부정, 그러니까 자기 생명의 거절, 다시 그러니까 자기살해를 감행한단 말입니까.
자기살해를 감행한다는 말은 그 표현의 배후에 다른 진실을 감추고 있습니다. 제 임상 경험에 따르면 우울병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닙니다. 착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것이지요. 수긍하기 어려우신가요? 반대로 생각하면 쉽습니다. 우울병에 걸린 악하고 둔한 사람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감수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양보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양보와 배려는 자본주의 경쟁 판에서 패배와 소외로 귀결됩니다. 수탈당하는 먹잇감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처럼 매판극우가 사회 모든 분야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우울병은 자기살해를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살해로 내몰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