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을 전복하려면 기존 프레임이 지닌 어둠을 정확히 꿰뚫어야 한다. 길목에 제대로 서야 전복 들머리가 바로 보이는 법이다. 어디서 어떻게 그 길목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까? 들으려고 작정하지 않아도 혹시나 하면서 들어간 시공에서는 언제나 침묵만 흐른다. 제의를 타고 강림하는 신은 잡귀다. 나는 오랜 숲을 떠나서 숲만큼이나 극진히 찾던 도심 속 서점으로 간다.

 

타자들의 생태학(필리프 데스콜라, 2022)을 찾으러 인류학 코너로 향한다. 글 읽기를 멈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서기 위해서다. 책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싶은 바로 그 순간,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진다. 수년 동안 인류학 코너에 잘못 꽂혀 있던 독을 품은 식물 이야기(임경수·손창환·김원학, 2014)가 와락 눈길을 잡아챈다. 다음 순간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그 책을 집어 들자 이내 타자들의 생태학도 두 팔 벌려 달려든다. 나는 여기가 길목임을 즉각 알아차린다. 청안한 심경으로 국시 집을 찾는다. 막걸리부터 벌컥벌컥 들이켠다.

 

사실 내가 글 읽기를 전격 중단한 계기는 알고 있다는 착각(질리언 테트, 2022)에 있다. ANTHRO-VISION을 이리 평평하게 번역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제목 자체가 전달해줄 수 있는 핵심과 중량에서 한참 벗어난 실패로 보인다. 책을 읽는 내내 심사가 불편했다. 그 중 미군은 한국전쟁에서···인류학자를 활용했다.”라는 문장이 유발한 모멸감은 실로 맹렬했다.

 

인류학이라는 학문은 서구 제국주의 마름 이론으로 시작되었다. 200여 년 지나면서 본디 모습을 많이 벗어던졌다고는 하지만, ‘인류라는 용어에 붙잡혀 있는 한 여전히 근본 오류와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 서구 인류학이 나와 같은 인류에게 인류학 관지를 전수해준다. ‘인류들은 서구인들이 지은 책을 번역하고 그 번역본을 읽음으로써 감사히 진실 앞에 선다. 인류는 자기 힘으로 이런 진실을 밝히지도 전수하지도 못하는가? 이런 진실은 인류본성에 속하지 않던가? 내 불편함, 모멸감은 바로 여기서 비롯하였다.

 

일제 식민지였던 우리 경우, 미군정이 식민지 부역 집단을 비호하고 식민지 체제를 승계토록 해 명실상부하게 자주독립으로 나아가는 길을 원천 봉쇄했다. 그 덕에 부역 집단은 사회 모든 분야 지배층으로 승승장구하고 제국 학문과 교육 구조는 엄존한다. 부역 세력 후손은 본국인 제국으로 유학해 절대다수 인민을 영구히 인류로 붙박아두는 학문과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근원적으로 성찰하면, 보수 진보 가림없이, 나아가 개인적으로 부정해도 서구 또는 일본에서 배워 와 한국에 그냥 써먹는 학문·교육 자체가 부역·매판성을 지닌다. 사회과학이 특히 그렇지만, 인문학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심지어 자연과학도 청정지역은 아니다. 누구보다 이 문제에 민감한 나조차 최근 몇 해 동안 이 나라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을 경험하면서 진실이 지닌 결과 겹을 옹글게 마주할 수 있었다. 매판 마르크시스트, 좌파 부역자가 준동하는 꼴을 목격하고야 탄식하며 절망했다. 거기서 나를 뺄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참담했다.

 

철부지 시절은 그렇다 치더라도 치열하게 읽고 쓴 중년 이후 삶에도 빈틈없이 배어 있는 식민지 냄새가 내 체취를 앗아가 버렸다. 최근 공부한 낭·(식물), 돌꽃(지의), (), 곰팡이(), 버금바리(세균/박테리아), 으뜸바리(바이러스) 거의 모든 지식도 서구나 일본에서 왔다. 이렇게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문화가 쌍방향으로 흐르는 날이 오기는 할까. 아득하다는 생각이 너무 깊다.

 

편향으로 흐르는 문화는 압제하는 권력이며 착취하는 금력이다. 제국과 자본 겹 굴레를 쓰고 살아가야 하는 인류에게 이 문화는 중독을 부르는 마약으로 작용한다. 마약을 사서 팔아먹는 부역 세력은 학문과 교육, 언론과 사법, 종교와 예술로 포장해 식민지 체제 영속화를 꾀한다. 부역/매판 정치경제학을 사회 해석과 변혁 범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모조품 제국 이론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이 진실을 깨달은 인류만이 자기 눈으로 자기 세계를 보고 바꿔낼 수 있다. 각성한 주체 인류자신 손으로 진정 인류학을 빚어야만 한다.

 

진정 인류학을 빚는 인류는 식민지 상태로 살아가는 모든 존재다. 여성, 아동, 성소수자, 장애인, 유색인···. 인간 너머 낭·, 돌꽃, , 곰팡이, 버금바리, 으뜸바리, 그리고 무엇보다 무고히 살해당한 모든 존재가 진정 인류다. 진정 인류란 진정 네트워크를 일으키는 존재다. 진정 네트워크는 제국 패거리와 맞서 싸우는 평등한 공생·화쟁 공동체다. 낮고 작은 이야기다.

 

내가 짐짓 타자들의 생태학에 다가간 까닭은 이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제국 시민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겠다는 심산. 진정 네트워크는 한발 앞서 내게 독을 품은 식물 이야기라는 이정표로써 들머리를 가리켰다. 내가 갇혀 있었던 어둠, 깨달음으로써 처하게 된 모순, 역설을 창조해야 하는 천명을 알려주었다. 산 존재와 죽임당한 존재,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 생명과 비생명 존재 사이 공생·화쟁 운동을 일으켜 인간이 세운 제국에 맞서는 격을 띄웠다. 첫걸음은 부역/매판 정치경제학인가? 변방 무명 임상의가 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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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지도 쓰지도 않은 지 100일이 넘었다. 극진히 관심 둔 곳은 서울 산이었다. 서울 안과 경계에는 표고 200m 이상 산이 22개 있다: 봉산(209), 백련산(228), 앵봉산(235), 남산(271), 망우산(282), 대모산(293), 아차산(296), 안산(296), 구룡산(308), 우면산(313), 천림산(327), 인왕산(338), 백악산(343), 용마산(348), 호암산(393), 삼성산(481), 불암산(510), 청계산(617), 관악산(632), 수락산(641), 도봉산(740), 북한산(836). 이미 넘은 산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 배어들고 배어나는 일로 더 깊이 침묵했다. 마침내 1127일 망우산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모두 합해 8,937m를 넘은 셈이다. 딸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고산증 없는 wellbeing 히말라야네!”

 

마지막 일정을 망우산으로 잡은 까닭이 있다. 수많은, 특히 버려진 무덤으로 말미암아 더 육중한 고요에 잠겨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스치는 행인 이외에 인기척 느낄 일 없는 길가 무덤이든 이목 끄는 표지판까지 갖춘 역사적 인물 무덤이든 고요하긴 마찬가지지만 들으려는 산 자 발길이 끊어진 무덤은 인간 윤리, 그 하찮음을 압도적으로 깨우친다. 산 자가 스스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하는 삶 이야기 아닌 죽은 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하는 삶 이야기를 알아듣지도 못한 채 깨닫기에 한사코 그 무덤 사이를 지나고 또 지난다. 지나는 동안 문득 깨닫는다: 모든 산은 그 자체로 무덤이다. 무언 무덤에서 인생 언어가 돌연 우꾼한다.

 

용마산과 아차산 사이 고랑을 따라 올라가 능선 가로질러 아차산과 용마산 그리고 망우산 사이 고랑으로 다시 내려간다. 적정 지점에서 둥글게 돌아 아차산과 용마산을 이어주는 능선길로 되돌아온다. 이 계획에 문제가 생겼다. 지도에는 길이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물어볼 사람도 없다. 그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둘: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눈에 보이는 다른 길로 감으로써 행로를 수정한다. 이는 안주 아닌가. 나는 안주하는 생을 거절하고자 이 침묵을 택했으니 그럴 수는 없다. 내 길은 하나다: 길을 스스로 만들기. 나는 오로지 내가 향하고자 했던 능선 방향만 응시한 채 망설이지 않고 절벽에 가까운 사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이 될만한 공간을 탐색하면서 나아갔지만, 순간마다 아뜩해지곤 했다. 돌아가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한발 한발 올라갔다. 얼마를 헤맨 끝에 길일 수밖에 없게 생긴 지점에 이르렀다. 거기서 보니 본디 정했던 능선길과 만나는 방향이 순식간에 눈으로 들어왔다. 그 방향으로 한참 걸어가자 마침내 저만치 앞에 사람 모습이 어른거린다. 숲은 내게 길을 감춤으로써 스스로 길 만들 기회를 주었다. 왜 글을 읽어야 하는지,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여태까지 해온 식에 안주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으므로 새로운 길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명토 박아주었다. 숲, 곧 사인칭 관지는 내게 오늘을 전복 카이로스로 해석하도록 이끌었다. 큰 틀이 결정됐으니 시름 하나 잊는다忘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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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중동 마루 넘어 70대로 속절없이 미끄러지던 어느 날 문득 나는 오랜 습관 하나를 정색하고 마주한다. 글 읽기와 글쓰기, 특히 직업도 아니면서 운명처럼 여겨온 글쓰기를 향해 질문한다. 왜 쓰는가? 필연으로 이어 질문한다. 마치 쓰기를 전제하기라도 한 듯 다른 사람 글을 왜 읽는가?

 

질문에 잠겨 나는 길게 침묵한다. 침묵 전 마지막으로 읽은 질리언 테트 알고 있다는 착각ANTHRO-VISION,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정화진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가 예전 같으면 글쓰기를 기다렸을 테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 침묵에 무게를 더해준다. 여간해서 깨지지 않을 침묵 한가운데서 그 침묵을 위해 변명하려고 이 글 아닌 글을 쓴다.

 

나는 왜 침묵하는가? 글쓰기가 내게 무엇인지 답하지 않은 채 글쓰기를 계속해서는 안 되는 카이로스 상에 내가 섰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는 날이 얼마쯤일까 생각해보니 더는 미룰 일 아니라는 판단에 다다른다. 침묵하는 동안 답을 내려면 관지觀地를 바꿔야 한다. 죽은 내 관지에서 이미 지나간 내 삶을 거꾸로 들여다보는 사인칭 어법 아니면 안 된다. 사인칭 어법은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닌 관지가 이끈다. 나는 이제 막 그 비대칭 대칭 세계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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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는 동안 넘음으로써예를 갖추고 싶었으나, 아직 그러지 못한 산이 하나 남아 있다: 도봉산. 추석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마침내 나는 도봉산으로 향했다. 서울살이 60년이 다 돼가는데, 여태 넘지 못한 뚜렷한 이유란 물론 없다. 구태여 구실 짓는다면, 아마도 그 여정을 마무리할 대상으로 무의식에 담아두었다는 말이 가장 그럴듯할 테다.

 

갈 길을 스마트폰으로 찾아 대강 그렸다: 보문사 계곡(무수골)-도봉산 주 능선-오봉 능선-송추계곡. 본디 보문사 계곡 마지막 부분에서 보문사-우이암을 경유하는 길이 아닌 직진 코스를 택했는데 잘못 가는 줄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보문사 앞에 당도했고, 불가피하게 우이암을 지나서야 주 능선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그 밖에 가족과 저녁 식사 약속한 시각에 맞추려고 송추계곡 후반 구간에서 뛰다시피 한 일 빼면 전체적으로 순조로웠다.

 

보문사 계곡은 무수골이라고도 부른다. 무수(無愁)천이 흐르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왜 근심 없다는 말을 붙였을까. 내력을 알아볼 마음은 없거니와 내 경험이 직접 찾은 답은 바로 향기다. 장마철 갓 지나 적절한 습도가 유지되는 서북 사면에서, 무심코 지나치면 맡을 수 없는 은은한 과실주 향기가 피어오른다. 야생 낙과들이 자연 발효되기 때문이다.

 

인간 몸이 어떻게 알코올을 견디고 심지어 즐길 수 있게 되었는지 아직 과학적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력한 설명은 공생이론이다. 식물이 번식을 위해 좋은 향과 맛, 그리고 좋은 기분(無愁)을 어떤 영장류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다. 십분 공감한다. 과실 자체와는 또 다른 향미를 지닌 술이 인간 역사에 끼쳐온 영향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다. 발효는 결국 곰팡이가 본진이니 나는 무수골에서 한층 거룩한 곰팡이 제의를 집전한 셈이다.

 

무수골 초입에 작은 사색 공간 숲이 마련돼 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지나치려는데 홀연히 버섯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다른 사람들이 사색을 뭐라 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게 사색이란 그냥 버섯이었다. 버섯 말고는 어떤 마음결도 어떤 몸짓도 일으킬 수 없어서 나는 숨을 멈추고 땀에 흠뻑 젖으며 그들에게 몰입했다.

 

버섯은 곰팡이 생식기 또는 꽃 또는 열매다. 그러고 보니 무수골은 어떤 숲에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풍성한 곰팡이 선물을 내게 안겨주었다. 끄트머리에서 무수골을 벗어나 보문사(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을 거치면서도 내 영혼은 온통 그 향기와 이미지에 휩싸여 있었다. 보문사와 우이암이 제공한 전망으로 도봉을 기리면서 주 능선에 섰을 때조차 바람은 한쪽에서 불어왔다. 송추계곡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 소리를 듣고야 화들짝 깨어났다.

 

1970년대 송추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다. 하천과 길을 잘 정돈하고 영업장은 한군데로 모아 놓아 깔끔한 느낌이다. 물 흐르는 풍경을 내려다보며 늦은 점심을 먹는다. 이런 마무리가 늘 반복되지만 대개 개운치 않다. 인간이 들인 공은 아무리 해도 음식이든 집이든 거리든 숲을 거스르기 마련이다. 서울 가는 버스 안에서 본 도봉은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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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허태임 지음 / 김영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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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하루 전이었던 지난 토요일 저녁 옛 제자들이 대학로에서 축하 모임을 열어주었다. 대화가 한창 무르익던 어느 지점에서 요즘 내 공부 이야기가 나왔다. “한의학 공부할 때, 심지어 국시 준비할 때조차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들고 다니던 난데, 식물·지의···박테리아·바이러스에 심취해 있는 요즘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일제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악, 심지어 그 좋아하던 바흐조차 듣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오자 누군가 참지 못하고 묻는다. “왜요, 선생님?” 내 대답은 간단했다. “하찮게 느껴져서.”

 

내 관지가 초월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므로 그들 호기심은 이치로 이동했다. 나는 인간중심주의 < 뇌중심주의 < 대뇌중심주의 < 직립보행 < 패자 정체성 < 공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진화사 이야기를 간결하게 풀어냈다. ‘지구생태계 네트워킹 기축은 곰팡이다를 거쳐 사람 직립보행은 나무 본성에서 왔다에 이르러 마무리하며 내가 말했다. “꼬박 2년 독서하고 사색했더니 이제는 교보 식물 코너에 읽을 만한 책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다음 날, 나는 교보에서 나의 초록 목록을 발견했다. 더없는 생일선물이다.

 

먼저 이 말을 해야겠다: 좋은 책이다. 그보다 더 먼저 이 말부터 해야 맞다: 글이 참 좋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 글솜씨가 그만이다. 문학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문학서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디서 어떻게 글쓰기 훈련을 했는지 알 수도 없지만, 저자 글은 따스하고, 정감 있으며, 잘 흘러간다. 소소한 개인사에서 커다란 생물 주권, 기후 위기 문제까지 자연스레 넘나들며 이야기가 초군초군 번져간다. 좋은 글은 바른 사유에서 나온다는 말을 실답게 보여준다. 문득 내 30대를 돌아보게 만든다. 야젓한 청년이다.

 

좋은 이 책도 식물 지식 자체로 내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읽지도 않았으니 유감없고. 해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어떻게 쓸까, 잠시 고민했다. 내 방식인 주해 리뷰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한 번에 대충 버무려 쓰기에는 아깝고. 더 되작거린 뒤에 결정해야겠다. 하지만 우선 좋은 글, 좋은 책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글부터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이런 글쓰기가 모르기는 해도 처음 아닐까, 싶은데 내 리뷰를 통해 내용을 파악하기 전 다른 이 스스로 읽을 기회를 주려는 새로운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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