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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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은 전염, 긴장 해소, 또는 반사의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심미적 반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전시가치로 채워진 이미지들은 복합성을 띠지 않는다.·······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의미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순환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투명성은 의미의 공허와 긴밀하게 관련된다.(35-36쪽)

 

재벌을 두둔하는 자들은 마치 재벌이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듯 말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착취하여 재벌의 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독재를 두둔하는 자들은 마치 위대한 영도자 한 사람이 국민을 지켜내는 듯 말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국민의 목숨 값으로 독재자의 권력이 승승장구하는 것입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잘난 영웅이 세상을 구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영웅은 다만 신화로 존재할 따름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자는 못난, 이름 없는, 돈 안 되는, 그러니까 느린 자들입니다. 광주민중항쟁 때 전두환 일당의 탱크를 막아낸 것이 가녀린 손 맞잡아 인간 띠 만든 수녀들이었듯 말입니다.

 

고속투명사회는 세 부류의 사람을 죽여 그 목숨 값에 편승하여 질주합니다.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사람. 대칭성을 빚어내는 사람. 가치를 일구어내는 사람. 거꾸로 말하면 이 세 부류 사람의 희생으로 그나마 이 인간세상은 파멸을 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사람.

 

아름다움은 추함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추함은 접힌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추함을 품습니다. 품어 발효되기를 기다립니다. 발효되면 펼쳐냅니다. 펼쳐진 추함은 향기를 피워내는 아름다움으로 복귀합니다. 적어도 인간세상에서 이 일은 자연 과정이 아닙니다. 피땀 어린 애씀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 애씀은 속도를 포기해야 합니다. 돈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 포기로써 느린 불투명사회의 불씨를 그나마 지켜가는 것입니다. 이런 바보짓 하는 사람의 아픔을 저는 심미장애, 그러니까 예술장애라 부릅니다.

 

다음, 대칭성을 빚어내는 사람.

 

진리는 하나라고 말할 때, 그 하나는 하나둘의 하나가 아닙니다. 그 하나는 전체를 말합니다. 전체는 대칭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칭으로 서로마주하는 짝은 완전히 다르지도 않고 완전히 같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다르지도 않고 완전히 같지도 않으므로 둘 사이에서 무한한 복합성의 스펙트럼이 빚어집니다. 이렇게 빚어지는 복합성은 느림과 기다림의 산물입니다. 느림과 기다림이 배어나오는 주름진 골짜기에서 돈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습니다. 이런 바보짓 하는 사람의 아픔을 저는 화쟁장애라 부릅니다.

 

끝으로, 가치를 일구어내는 사람.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아니 그 자체로 가치입니다. 가치를 일구어낸다는 말은 그러므로 무가치를 강요하는 힘에 대한 저항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무가치를 강요받은 사람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끊임없이 가치를 일구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일구어내는 힘을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자신 밖의 모든 존재에게서 가치를 일구어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의미화입니다. 의미화는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가치를 일구어내는 상상력은 돈을 긁어낼 수 없습니다. 이런 아픔이 우울장애입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세상을 지킨다는 진실은 이미 유마힐이 천명한 바입니다. 이 진실을 사는 사람은 끝내 아픔을 안고 갈 것입니다. 세상이 아픈데 혼자만 멀쩡하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완벽하게 나을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세상과 함께 아픈 사람은 비애를 받아들이면서 장엄을 향해 숭고의 의지를 버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여전히 아픈 채 바로 이 순간 길을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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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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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느리다. 의미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순환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투명성은 의미의 공허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거대한 더미는 공허에 대한 공포Horror vacui에서 생겨난다.(36쪽)

 

오랫동안 우울증을 상담으로 치료해온 제 경험에 따르면 우울증 앓는 사람은 예외 없이 근본적으로 똑똑하고 착합니다. 착하다는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똑똑하다는 이야기만 여기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똑똑하다는 것은 의미 맥락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지녔다는 말입니다. 의미 맥락을 섬세하게 따라가다 보면 두 가지 불이익을 만납니다.

 

하나는 “의미는 느리다.”와 관련된 것입니다. 고속의 투명사회에 착취당한다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순환”에 치이고 밀리면서 사회의 변방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통해 인격의 성취를 꿈꾸지만 인생의 성공에서 소외됨으로써 ‘똑똑한데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하여 우울증으로 침륜되어 들어갑니다.

 

다른 하나는 재미를 놓치는 것입니다. 사람 삶의 두 축은 의미와 재미입니다. 두 축이 균형을 이루면 기품 있는 행복을 구가할 수 있습니다. 의미의 결에 너무 기울어지면 자연히 재미에서 멀어집니다. 재미란 것이 처음에는 부박하게 보이고 중간에는 하찮아 보이고 나중에는 부도덕해 보입니다. 이렇게 재미와 절연되면서 종당 우울증으로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의미 맥락의 주름을 걷어내어 매끄러운 표면만 남긴 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순환”을 즐기는 것이 다름 아닌 고속투명사회입니다. 재미의 “거대한 더미”로 구축한 향락사회입니다. 향락의 끝은 공허입니다. “허에 대한 공포Horror vacui”로 향락사회는 더더욱 재미에 집착합니다. 재미에 집착할수록 중독된 영혼은 제3의 강령에 매달립니다.

 

“의미성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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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가치로 채워진 이미지들은 복합성을 띠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들은 단순 명료하고, 그래서 포르노적이다. 여기서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복합성은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를 늦춘다. 비심미적인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가속화를 위해 복합성을 축소한다.(36쪽)

 

한의원에 와서 진단 받는 분들 가운데 적잖이 물어오는 것이 다름 아닌 체질 여하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저는 “각자 자신의 경향성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한평생 변하지 않는 개념으로서 체질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체질은 사상‘요법’의 네 가지 가운데 하나인가, 하는 질문에 저는 모두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먼저, 체질은 변하지 않는가에 관하여.

 

우리사회에서 체질이라는 용어는 이미 변하지 않는 타고난 성질이라는 뜻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설혹 타고난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몸 전체를 주도하지는 못합니다. 전체적 관점에서 보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최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몸은 자체 구조 못지않게 외부조건과 상호작용하는 사건으로서 측면이 크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상‘요법’의 경우 이제마가 처음부터 이런 불변의 체질을 전제했다면 이는 그가 지니고 있는 삶의 조건에 터한 하나의 사유 프레임일 것입니다. 개인의 사유 프레임에 인간의 몸을 맞출 수는 없습니다.

 

다음, 체질은 사상‘요법’이 구별하는 그 넷뿐인가에 관하여.

 

넷이라는 숫자는 그저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방편은 실재를 드러내기 위한, 하여 실재보다 작은 도구입니다. 마치 무수한 중간색의 존재를 빨주노초파남보로 묶어낸 일곱 빛깔 무지개 개념과 같습니다. 구태여 이름 하면 수많은 “점이체질”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점이체질이 아닌 전형적인 체질이 도리어 예외적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좀 더 날카롭게 말하면 전형에 완벽히 부합하는 체질의 소유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이치상 맞습니다. 이는 마치 현실세계에서 100% 입자이기만 한 빛도, 100% 파동이기만 한 빛도 존재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사람의 몸은 “단순 명료”하지 않습니다. “포르노적”이지 않습니다. “복합성을 띠”고 있습니다.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으로 가득합니다. 사람의 몸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복합성을 축소”하는 일이 아닙니다. “속도를 늦”추는 일입니다. 시간을 들여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무한한 주름 속에서 그 결과 겹을 더듬어가야 합니다. 체질이론은 다만 하나의 편법일 뿐입니다.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MRI를 포함한 서구의학의 모든 기계진단 기술은 물론 정교한 진단명, 치료 매뉴얼과 화학합성 약물 모두 사람의 몸을 기계로, 그러니까 투명한 사물로 전제한 것들입니다. 서구의학은 투명사회 건설에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부역하는 세력의 신념체계입니다. 서구의학이 전시하는 사람의 몸은 단순 명료합니다. 굴곡진 구석이 없습니다. 삽시간에 떼돈을 벌어다 주는 포르노입니다. 의학이든 뭐든 빠른 속도로 돈만 만들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함부로 덤비는 이 불량한 전시사회·투명사회의 제2강령은 이것입니다.

 

복합성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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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은 전염, 긴장 해소, 또는 반사의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심미적 반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심미화는 비심미적이다. 예컨대 ‘좋아요’와 같은 취미 판단을 위해 오랜 시간을 두고 대상을 감상할 필요는 없다. (35-36쪽)

 

이른바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돈이라는 척도로 다른 모든 가치를 제압한 이데올로기에 부역한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여행과 관광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여행은 낯선 삶에 깃들어 심미성을 탐색함으로써 자기 삶을 광활함spaciousness 또는 영성spirituality 차원으로 열어가는 일입니다. 관광은 낯선 삶의 바깥에서 기웃거리며 ‘좋아요’ 하고 돌아다니는 일입니다. 여행에는 “심미적 반성이 개입”합니다. 관광은 “전염, 긴장 해소, 또는 반사의 양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둘의 이런 차이에는 시간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심미적 반성은 머물러 있을 시간을 요청합니다. 전염, 긴장 해소, 반사는 신속한 반응과 확산·회전을 요구합니다. 전자는 돈이 안 되고 후자는 돈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저 산업화의 부역자들은 여행과 관광을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여행과 관광을 혼효混淆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의적 혼효로 대박을 기획하는 일은 이제 우리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힐링입니다. 힐링은 본디 심미적인 차원을 지닌, 그래서 치료와는 전혀 다른 고품격 치유를 의미하는데 이 불량한 전시사회·투명사회가 싸구려 전염, 긴장 해소, 반사 상품으로, 그러니까 즉석치료로 졸지에 전락시켜버렸습니다.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과 그에 버금가는 종교인 등을 동원하여 숙성·발효 안 된 인스턴트 힐링을 마구 팔아 젖히고 있습니다. 힐링이든 뭐든 빠른 속도로 돈만 만들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함부로 덤비는 이 불량한 전시사회·투명사회의 제1강령은 이것입니다.

 

심미성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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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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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의 강제는 가시적인 것을 착취한다.·······전시의 강제는 결국 우리에게서 얼굴을 빼앗아간다. 자신의 본래 얼굴로 머물러 있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35쪽)

 

사십년 전 봄날 기억 하나를 불러내봅니다. 군인이 일반대학생에게도 군사훈련을 시키던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그 군사훈련을 교련이라 불렀습니다. 어느 교련 시간에 교수부장이라는 자가 돌연 지휘봉으로 제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발하고 와! 안 그러면 학점 안 준다.” 교련 학점 없으면 졸업이 불가능했지만 저는 그 길로 강의실을 나와 수업에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이십 년 가까이 저는 삼단 같은 머리채가 바람 불면 어깨를 쓸고 지나가는 치렁치렁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했습니다.

 

군인이 남자 대학생 머리카락 길이를 강제했다니, 오늘의 대학생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찌 생각할까요? 아니! 경찰이 여자 대학생의 치마 길이를 강제했다는 말을 들으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머리카락도 치마도 일사불란한 전시성 속에 도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시대의 투명한 암흑을 모르는 것으로 편안히 살아간다면 오늘의 대학생은 과연 이 공동체의 주체일 수 있을까요? 이 무지로 말미암아 또 다시 그런 투명한 암흑이 엄습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의 대학생은 과연 무엇일까요?

 

대학생 한 명의 살해에 분노하여 무수한 대학생들이 짱돌을 들고 거리에 섰던 시대를 우리는 아프고도 아름다웠던 역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등학생 이백 쉰 명이 살해되었음에도 괴괴히 침묵하는 대학생으로 넘실거리는 이 시대를 우리는 장차 어찌 기억하게 될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시대 대학생이었던 사람의 아들딸이 지금 이 시대 대학생이 되었고, 그 사회는 또 그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이 사회의 이 대학생은 움직이지 않으니 이 아프고도 또 아픈 풍경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요?

 

실로 경천동지할 일들을 겪어낸 시간이지만 지난 사십년은 “결국 우리에게서 얼굴을 빼앗아간” 세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독재자의 죽음에서 시작된 울퉁불퉁한 자주민주통일의 길은 결국 매판독재반통일 세력의 화려한 복귀로 매끈하게 재포장되어 전시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자, “자신의 본래 얼굴로 머물러 있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고 절망해야 하는지요. 사십년 전 봄날, 머리카락, 아니 얼굴을 착취당하지 않으려 발길 돌렸던 대학생, 오늘 거울 앞에 섭니다. 얼굴 남아 있나 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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