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메르스대란으로 체감하다시피 대한민국은 국가가 앞장서서 모든 영역의 공공성을 파괴하는 나라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국민을 몰아가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가 장악되어 있어 당분간 이 추세는 가속일로를 치달을 것입니다. 웰 빙, 힐링이라는 부드럽고 따뜻한 개념도 긍정주의 자기계발을 거쳐 멘토의 대박 몰이에 걸리면 꼼짝 없이 각자와 그 패거리만 살리는 쪽으로 휘말려들고 맙니다.
가난한 삶도 함께 나누던 풍경은 진즉 사라졌습니다. 흔들어서 떨어지는 사람은 아예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살풍경으로 변한지 오래입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러므로 혁명해야 한다.’인데 현실은 ‘그러므로 혁명은 물 건너갔다.’입니다.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를 장악한 자들은 대놓고 함부로 이런 풍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성이 이미 대기권을 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몰이를 당하는 필부필부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여기에 맞서는 영적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참된 삶의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가축으로서 도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지옥 같은 상황에 맞서 영적 의지를 세우는, 그러니까 참된 삶의 전사가 되는 일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일까요?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만큼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니까요. 평범한 사람 하나하나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되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 삶의 몫을 각자 성실히 살려면 연대만이 길이라고 물색없이 역설을 들이댈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너만이라도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라.’는 신파조 말을 흘릴 수도 없습니다. 난감무인지경입니다. 실마리 하나를 챙기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세월호사건과 메르스대란을 무능을 가장한 전능으로 돌파한 권력이 마침내 이미지에 꼭 맞는 총리 하나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를 가리켜 한 언론인이 ‘후흑厚黑총리’라 했습니다(한겨레신문 2015년 6월 17일자). 후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으로 뻔뻔하고 음흉하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의를 기울인 것은 본디 이 후흑의 개념은 청나라 말 이종오라는 사람이 밀려오는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창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몫인 삶을 수탈자에게서 지켜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건강한 덕목이 바로 후흑이라는 말입니다. 이 뜻을 우리 처지에 맞게 되새겨보겠습니다.
뻔뻔해야 한다는 말은 지나친 윤리적 엄숙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윤리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약속체계입니다. 어느 한쪽이 인간이기를 거절한 상태에서는 윤리가 설 수 없습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이미 인간성을 거두어들인 마당에 염치와 싸가지를 말하는 것은 순수 아닌 순진입니다. 냉정한 득실 계산에 터한 ‘밀당’의 마인드가 전사의 필수품입니다.
음흉해야 한다는 말은 진정성에 터하여 현상과 본질을 일치시키려는 소박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양두구육은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유구한 전술이자 그들 자체입니다. 그러나 수탈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100% 당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진실이어서 뺨맞고 용서는 용서여서 뺨맞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되풀이해서 당하고 있습니다. 불투명성에 터하여 앙큼한 가면놀이를 할 줄 알아야 비로소 영적 의지를 세울 수 있습니다.
어디 한 번 후흑전사가 되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