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생활습관 하나를 바꾸었습니다. 아침밥을 먹지 않은 심한 공복 상태에서 빠른 걸음으로 30분 이상, 그러니까 3km 이상을 걸어 한의원으로 출근합니다. 잠시 땀을 들인 뒤 단원의 아이들 250명의 이름이 담긴 문서를 엽니다. Jacqueline Mary du Pré의 <Larmes Du Jacqueline>를 켭니다. 삽시간 명상에 듭니다. 눈을 떠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호피 기도를 시작합니다. 기도가 끝나면 집에서 싸가지고 온 소박한 도시락을 엽니다. 1인분으로 251명이 함께 아침식사를 합니다. 한의원의 하루하루를 이렇게 엽니다.

 

이렇게 바뀐 생활습관 때문에 한 동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은은히 오른쪽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머무릅니다. 체중이 줄어듭니다. 무엇보다 얼굴의 살이 현저하게 빠집니다. 급기야 초췌한 몰골이 드러납니다. 목에서 쉰 소리가 나옵니다. 갈증이 일어납니다. 눈이 흐릿해집니다. 머리가 맑지 않아 붕 뜨고 투미한 상태가 지속됩니다. 대변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슬그머니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암의 현저한 가족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아버지, 형님, 누이동생·······.

 

몇날 며칠 뒤척거리다 문득 한 마디 말을 떠올렸습니다.

 

“청초淸楚의 땅 앞에는 초췌憔悴의 강이 가로놓여 있다.”

 

일어나 거울을 봅니다. 찰나에 초췌憔悴의 강을 건너는 생명을 감지합니다. 찰나에 청초淸楚의 땅으로 들어서는 생명을 감지합니다. 영혼의 울음과 웃음이 회오리치는 것을 목도합니다. 물론 이것이 결론은 아닙니다. 또 다른 시작입니다.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작은 신호입니다. 지나온 삶의 초췌를 마치 들이닥치는 불치병처럼 느끼고서야 비로소 청초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고서야 삶의 가치 딱 한 줌을 거머쥘 수 있다는 진실. 훗날 어떤 변화의 결에서라도 이 깨달음만은 감사할 것입니다.

 

세월호사건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터에 메르스마저 과따티고 있는 지금 비슷한 처지의 다른 이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 가난한 마을 한의원은 그야말로 말이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간호사는 물론 찾아오시는 환자들까지 민망해할 정도입니다. 70대 초반은 젊은이라고 할 만큼 고령의 어르신들이 드나드시는 한의원인데 그 분들이 꼼짝 못하시는 상황이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홀로 의로우신 신께서는 초췌의 강을 파 엎어버리고 청초의 땅만을 전유하고 계십니다. 과연 거룩하고 또 거룩하십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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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5 17: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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