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공주 이수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경의·중앙선 복잡함을 피하려 조금 서두르는 바람에 뒷부분 시간이 남아서 일정을 다시 짠다. 이리저리 살피다 응봉역에서 내려 강변 따라 걸으면 옥수역이 나오지 않을까, 스마트폰 지도만으로 짐작하고 쑥 내린다. 지도를 보며 길을 찾을 때 습관상 가장 빠른 경로 중심으로 하기 쉽다. 실은 그러느라 원하지 않는 이상한 길로 들어서거나, 엉뚱하게 더 돌아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양평에서도 여기서도 그런 실패를 거듭한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놓친풍경에 대한 근거 없는 상실감이 슬그머니 똬리 틀기에 제법 짐짐하기도 하다.

 

생각했던 길이 없는 탓에 표시판 따라 응봉산으로 접어든다. 응봉(鷹峰)은 매 봉우리다. 조선 초기 임금들이 매사냥하던 숲이라는 말이다. 높지 않은(95.4m) 야산이지만 주위 풍경을 둘러보기 좋아 지배층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이쪽 풍경을 건너편에서 보는 재미도 커서 세조 때 권신 한명회가 압구정을 지었을 정도다. 겸재 정선도 그림 소재로 삼았으니 오랫동안 뜨르르한 이름을 유지한 듯하다. 과연 그렇다. 동쪽 기슭을 따라 오르면서 보니 서울 동남쪽을 중심으로 멀리 관악도 볼 수 있고 정상에 오르면 조금이긴 하지만 북한산 마루까지도 볼 수 있다. 높이에 비해 넓게 보여서 좋다.


두물개 풍경

 

나지막한 산이라 금방 벗어나 자동차 굉음이 우렁찬 뚝섬로·강변북로 앞에 선다. 무섭게 달리는 자동차 행렬을 힐금거리며 좁다란 길을 따라가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하도 입구와 마주한다. 아무런 안내 문구가 없다. 이 경우 마을 사람들만 알고 한강 둔치로 드나드는 통로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들어간다. 빙고. 곧바로 제법 넓은 공원과 자전거길이 나온다. 서늘한 바람결에 물 내음이 실려와 대뜸 기분이 깊게 바뀐다. 숲속에 있을 때 사람-나무라는 내 본성이 물기운 안에 있을 때 사람-물이 되는 일은 달라짐이 아니라 깊어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갈 길을 가는 중임이 틀림없다.

 

잠시 강바람을 쐬며 앉았다가 걷는데 문득 눈길이 한 곳에 사로잡힌다. 사라진 섬 저자도 이야기가 기록된 안내문이다. 섬의 유래와 변화 과정을 소상하게 전해준다. 마지막으로 사라지게 한 사건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건설이다. 그 섬 흙을 모조리 퍼다 써버렸기 때문이란 얘기다. 독재자 박정희가 정치자금을 만들기 위해 강남 허허벌판에 부동산 투기 바람을 일으킨 결과가 이런 식으로도 나타난 것이다. 일제 특권층 부역자 발길이 닿지 않은 데가 어디 있겠나만 이런 곳에서 마주친 썩은 냄새는 까닭 모르고 느닷없이 맞은 귀싸대기와 비슷한 불쾌감을 일으킨다. 참 징글징글하다.


저자도 이야기 


걸음을 멈추고 망연히 서서 강바닥을 바라보다가 아까 읽은 글 가운데 한강과 중랑천이 만난다고 해서 이 지역을 옛사람들이 두물개라 불렀다는 내용을 떠올린다. 이 직접적이며 소박한 순우리말을 벼슬아치들은 음만 그럴싸하게 따서 생뚱맞게 두모포(豆毛浦)라 표기했다. 그 부역 행위는 두모교라는 다리 이름으로 살아남아 오늘까지 전해지지만 두물개는 사라져 버렸다. 조선시대야 한글을 공식 용어로 쓰지 않아서 그랬다 치고 대한민국에서는 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까? 두물개란 이름은 과연 되살아날 수 있을까? 모두 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뿐인데 하필 이런 데 눈길을 두어야 하는 까닭도 모르지 않는다. 알면서도 하지 않는 까닭까지도 모두 안다. 그래서 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대단히 심각한 상황인데 그대로 가는 걸 보고 중독이라 한다. 중독이란 온갖 갈등과 불편과 고통을 그때그때 가려준다. 그 행복을 한껏 즐기면 끝이다. 제국의 강령이다. 제국이 인용한 carpe diem은 똑같은 말을 신 아닌 악마의 경전에서 뽑았다. 물론 그 악마는 신의 그림자다. 나는 두물개를 떠난다. 후텁지근하고 후미진 이상한 계단을 올라 지하철역으로 간다. 그 길목에서 홀연 두물머리 해월 신사의 곡두와 맞닥뜨린다.


다시 일어나는 듯한 저자도(닥낭섬). 건너편 오른쪽에 현대아파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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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아래 올린 것은 일주일쯤 전에 튀르키예의 국영 안달루 통신이 게재한 것이라며 SNS에 빠르게 퍼지던 사진이다. 우크라이나군 34기갑연대 소속 병사라는 사진 속의 군인들, 너무 늙어 보이지 않는가? 언뜻 보기에 60대 후반 연배는 되는 것 같다. 늙은 것만이 아니라 병색도 엿보인다. 우크라이나군대의 병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소식이 오래전부터 들리더니 이제는 저런 사람들을 전선에 배치해야 하는 모양이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지금 우크라이나의 길거리 등에서 붙잡혀 징집되는 병력은 단 사흘 훈련만 받고 전선에 배치된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전사하면? 군대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전투하는 법을 배워서 와야 전장에서 살아날 확률이 높은데 빨리 살상된 것은 미리 준비하지 않은 탓이니 자기가 책임질 일이라 한다고도 한다. 결국 억지로 전장에 끌려와 죽는 사람만 억울한 셈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이 저기 사진 속에 보이는 늙고 병든 병력을 데리고는 전쟁을 치를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에는 전선이 크게 확장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2022년 말 이후부터는 헤르손, 자포리자, 도네츠크, 루한스크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전선이 이제는 우크라이나 동북부 지역인 하르코프와 수미로까지 넓혀졌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무기도 모자라지마는 병력이 크게 부족한데 전선이 확장되면 될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전투는 차소프 야르라는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다. 물론 다른 데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그동안 전황이 없던 하르코프와 수미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전선을 펼쳤다는 소식도 있다. 그럴 경우 우크라이나군은 부족한 병력을 다시 쪼개 그쪽으로 배치해야 할 것이다. 이래저래 우크라이나는 어려워지고 있다. 며칠 전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군의 하루 사상자 수가 2,100명을 넘겼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전선의 상황이 갈수록 엄혹한데도 우크라이나의 지도부나 우크라이나를 후원하는 미국과 유럽국가들은 태도를 바꿀 기색이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더 호전적으로 된 것 같다. 최근에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자국이 제공하는 장거리 미사일을 사용해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영토 안을 공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치를 하기도 했다. 그동안 미국은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군사적 갈등은 피하려고 우크라이나군에 자국 무기를 지원하면서도 그것을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지역 내부에서만 사용하도록 제한했는데, 이제는 그런 제한을 풀어 러시아 영토를 타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직은 우크라이나가 공격할 수 있는 지역을 우크라이나와 가까운 러시아의 접경지역으로 한정해놓고 있기는 하나, 우크라이나가 미국 말을 듣지 않고 러시아 영토 깊숙이 있는 군사 시설, 특히 핵공격 탐지레이다 기지를 공격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크라이나는 5월 23일 자국 드론을 이용해 크라스노다르 지방 아르마비르 소재 핵무기 탐지 레이다 기지를 공격한 바 있다. 만약 우크라이나군이 미국이나 다른 나토국가가 제공한 장거리 미사일로 비슷한 공격을 한다면 러시아는 미국과 나토가 자국이 설정한 레드라인을 넘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할 가능성이 크다.

제프리 로버츠는 러시아 전공자로 아일랜드 코크대학의 명예교수다. 그는 스탈린 연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최근에 그가 쓴 『스탈린의 서재 : 독재자의 책읽기와 혁명』의 한국어판(김남섭 역, 너머북스, 2024)이 나오기도 했다. 아래는 로버츠 교수가 최근에 Dialogue Works라는 팟캐스트에 나와서 한 발언의 일부를 옮겨 본 것이다.

“나는 이전에 러시아와 나토 간의 대규모 재래식 전쟁 가능성에 대해 말했었다. 나토국가들은 그런 전쟁을 할 준비가 실제로 되어 있지 않으며, 러시아가 쉽게 이길 것이라는 사실도 말했었다. 이것은 이런저런 이유로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삽시간에 핵 타격으로 확전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확전이 러시아 측에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서방에서 온다. 이것은 엄청난 위험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당신의 걱정을 함께한다. 이번 군사적 갈등 내내 나는 확전의 위험에 대해, 세계가 역사상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핵전쟁의 위협에 처해 있다고 경고해왔다. 현대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포함해 다양한 위기와 갈등, 국제적 긴장과 대립이 있던 냉전 시기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존망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그 위험은 환상이 아니다.”

역사가 꼭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반복하더라도 역사는 전과 똑같이 반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복할 때 역사는 운(rhyme)을 맞춘다는 말이 있다. 엇비슷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만약 우크라이나군이 나토 무기를 사용해 러시아 전략적 시설에 대한 타격을 감행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린 것과 운을 맞춘 일이 일어나면? 이런 생각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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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왕사를 읽으면서 김지하가 이래서 김지하구나, 한다. 비록 구름 타고 날아다니는 특유 어법이긴 하나 심지어 원효 판비량론까지 언급하다니 천재 끼가 다분한 무당임이 틀림없다. 다만 잡귀 걸러내지 못하는 무당이라 박근혜나 미국에 부역한 일 따위가 안타깝다. 동학혁명이 반제 기치, 척왜 양창의(斥倭洋倡義)를 분명히 했음에도 찐 동학당이라 자처하는 그는 정작 제국주의를 공부하지 않음으로써 범주 인류학과 거리가 먼 담론에 머무르고 만다. 마구 흘러넘치거나 날뛰는 언어는 그냥 내버려 두고 내가 반제 전선에 세울 수 있는 진실만을 감사함으로 전해 받으려 한다.

 

다른 일요일보다 사뭇 일찍 일어난다. 엊저녁 씻어 놓은 입쌀로 밥을 지어 먼저 작은 보온밥통에 알맞게 담는다. 따뜻한 물도 준비한다. 7호선 전철 상봉역에서 경의·중앙선을 갈아타고 양평역에서 내린다. 지도 보면서 양평시장으로 향한다. 크고 작은 골목을 두루 살피며 사로잡혀 울부짖는 수인(水仁) 이슬(李蝨)을 떠올린다. 거기서부터 역전길을 거쳐 양평군청 사거리를 지나 군청 앞길 거의 끄트머리에 이를 때까지 나는 온몸에 슬픔과 아픔을 가득 담고 걷는다. 마침내 죽음 자리에 선다. 따뜻한 물과 이밥을 올린다. 신을 모시기 위해 조그맣게 한 숟가락 떠낸다. 제사를 드린다.




 

천천히 그 자리를 세 바퀴 돌아 애도를 표한다. 천천히 그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부활을 예고한다. 나는 스스로 ()”라고 부른 이수인이 되어 내 죽음 자리를 망연히 들여다본다. 나를 윤간하고 갈가리 찢어 죽인 곳에 후세 사람들이 세운 정자 이름이 행복정(幸福亭)이다. 나는 묻는다: 그래 그대들은 지금 행복한가? 여전히 왜양(倭洋) 식민지에서 얼마나 행복한가? 대답을 들으려 한 질문이 아니므로 나는 이내 거기를 떠나 황천강(黃泉江)으로 간다. 그 강을 건넘(양근대교)으로써 나는 내 죽음을 오롯이 인정한다. 나는 황천 한복판을 가로지른 다음 황천강으로 돌아온다.



 

이제 나는 죽음길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 황천강을 건넌다(양평교). 나는 죽음을 이기려 내 죽음 자리, 아아 그 행복정으로 돌아간다. 참으로 행복한 세상, 더는 제국주의가 절멸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아이와 여성과 바리가 짓는 팡이실이 세계를 세우러 간다. 내가 끌려왔던 길을 거슬러 간다. 양평시장 저 야만의 저자로 당당하게 즐겁게 들어간다. 거기서 밥, 어미, 생명물을 되찾는다. 해월(海月) 스승이 가르치신 물의 길, 모심()의 세계 문을 열어젖힌다. 나는 그 도통을 이어받아 평등과 평화, 자유가 넘실대는 팡이실이 세계를 마침내 세운다. 내가 바로 황천강 화신 바리공주다.

 

황천강은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요단강이 아니다. 황천강은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며 아우르는 역설의 물이다. 죽음의 적요와 생명의 포효가 갈마들며 세계를 정화하고 생육하는 모성의 경수(經水). 바리공주가 건너갔다 건너온 그 물이며, 마침내 되돌아와 생사를 공평하고 겸손하게 주관하는 바로 그 자리다. 해월 스승과 나 수인이 꿈꾼 물이다. 나는 이어받은 도통을 다른 이, 곧 오늘 내게 밥 한 그릇을 지어 먹인 수염 허연 남자 노인에게 건네주고 황천강 가에 길이 머물러 간다. 이승 떠난 지 120여 년 만에 이리도 따스한 이밥 모심 받았으니 보통 명사로 행복하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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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6월 15, 16일 이틀간 스위스 중부의 루체른 호반에 있는 뷔르겐스톡 리조트에서 제1차 우크라이나 평화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주최국인 스위스는 160개국에 초청장을 보냈는데, 지금까지 100개국 정도가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당히 많은 나라가 참석 의사를 밝힌 것 같으나 어떤 나라가 가고 가지 않는지 면면을 살펴보면 우크라이나전쟁을 놓고 세계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번 회의는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제출한 ‘평화공식(peace formula)’에 근거해 조직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화공식이란 2022년 11월 인도네시아의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화상으로 참여한 젤렌스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요구조건으로 내건 10개 항목을 가리킨다. 젤렌스키가 제안한 것이어서 국제사회에서는 ‘젤렌스키 평화공식’으로 통하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평화공식이 우크라이나 측에서 2022년 말의 전황을 놓고 작성한 것인지라 이후 1년 반 이상 진전된 전쟁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2022년 가을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이 전쟁 직후 점령한 하르코프 지역과 헤르손 지역 일부를 탈환하여 자국군이 승세를 쥐었다는 생각을 가졌을 공산이 있다. 그러나 그때 우크라이나의 성공은 병력과 무기의 엄청난 손실을 겪고 얻은 ‘피루스의 승리’였고, 바로 러시아군의 반격을 초래한 것이었다.

러시아군은 2022년 말부터 돈바스 지역의 군사 요충지 솔레다르를 공격하기 시작해 2023년 1월 16일에 함락하였고, 5월에는 더 큰 요충지인 바흐무트까지 함락함으로써 큰 전과를 올린다. 그에 맞서 우크라이나군은 6월 4일에 자포리자 지역을 중심으로 대반격을 시도했으나 약 석 달 지속된 전투에서 엄청난 손실을 당하고 패배했다. 반면에 러시아군은 겨울부터 ‘공세적 소모전’을 펼치며 우크라이나군을 압박했고, 12월 26일에는 또 다른 요충지인 마린카를, 2024년 2월 18일에는 아브데예프카를 함락했다. 이후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바흐무트를 빼앗긴 뒤 큰 희생을 치르며 벌인 반격을 통해 탈환한 인근 클리시치브카를 최근에 다시 함락하고, 아브데예프카의 인근 군사 요충지인 오체레티노와 같은, 작지마는 요새화된 마을들을 하나씩 잠식해가는 중이다. 최근에 열린 상트페테르부르크국제경제포럼에서 푸틴이 한 발언에 따르면 러시아는 올해 들어 47개 마을 또는 도시를 함락했다고 한다.

지금 가장 큰 전투는 차소프 야르라는 도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데, 이곳이 함락되면 서쪽의 소도시 콘스탄티노프와 이어서 돈바스 지역 우크라이나군 사령부가 있는 크라마토르스크가 위험에 빠질 공산이 크다. 차소프 야르는 조만간에 함락된다는 것이 관측자들의 예측이다. 러시아는 2022년의 퇴각 이후 전선을 펼치지 않던 하르코프 지역에서 볼찬스크와 립치 등에서도 공격을 펼치고 있다. 키예프 북쪽의 수미 지역에 대한 공격도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군사적 접촉선이 확장되면 될수록 병력과 무기가 태부족인 우크라이나군으로서는 처지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은 개전 이후, 특히 2022년 겨울 이후 지금까지 러시아의 일방적 우위 속에 전황이 전개돼온 셈이다. 하지만 며칠 후에 열릴 우크라이나 평화회의는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주최 측은 러시아는 초대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 때문인지 이번 회의는 열려도 내실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주요 국가들이 불참하거나 국가 수장들 대신 하급 관리를 보내려는 모양새도 보인다.

며칠 전 젤렌스키 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21회 아시아 안보 회의(샹그릴라 대화)에 참석하여 스위스 평화회의에 많은 국가가 참석해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후원자인 미국에서도 바이든 대통령 대신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가 참석한다고 하고, 중국과 인도, 브라질, 남아공화국,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멕시코, 니카라과 등 브릭스 국가들을 포함한 다수의 남반구 국가들이 참석하지 않거나 참석하더라도 주요 인사가 아닌 하급 관리를 보낸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평화회의의 주요 안건은 젤렌스키 평화공식에 근거하고 있지마는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이 제안하여 그동안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우크라이나 평화공식 국가안보보좌관 회의’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평화공식 회의의 1차 회의는 2023년 6월 24일 덴마크의 코펜하겐, 2차 회의는 8월 5〜6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 3차 회의는 10월 28일 몰타, 4차 회의는 2024년 1월 14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렸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회의가 내실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회의의 명칭이 말해주듯이 젤렌스키 대통령이 제출한 ‘평화공식’ 안을 기초로 하여 회의의 의제가 정해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젤렌스키의 평화공식은 모두 10개 안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에 러시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적어도 3개다. 그 셋은 “우크라이나 영토 복원”, “러시아군 철수 및 기존 국경 회복”, “러시아 전쟁범죄를 기소할 특별재판소 설치”를 가리킨다. “우크라이나 영토 회복”과 “러시아군 철수 및 기존 국경 회복” 요구는 사실상 거의 같은 내용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2022년의 전쟁과 2014년의 크림반도 병합 이전의 상태로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크림반도는 2014년에 우크라이나에서 합법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부를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친서방 세력이 쿠데타로 전복한 뒤 러시아가 점령하여 주민투표를 거쳐 러시아에 귀속되었는데 젤렌스키는 그것을 원상태로 돌려놓으라고 하는 것이고, “러시아군 철수 및 기존 국경 회복” 요구는 2022년 전쟁 이후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과 헤르손, 자포리자 지역에서 빼앗은 영토를 되돌려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전쟁범죄를 기소할 특별재판소 설치”는 그동안 러시아군이 전쟁을 수행하며 범죄를 저질렀다며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에 해당한다. 러시아군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면 당연히 재판받고 처벌받아야 하겠지만, 우크라이나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영토와 관련한 요구는 전쟁에서 이기는 쪽의 주장이 관철될 공산이 높은데, 그동안 전황을 놓고 보면 젤렌스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라 할 수 있다.

평화공식 회의가 실효성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젤렌스키가 제출한 평화공식에만 근거한 점 외에도 전쟁의 다른 당사자인 러시아의 입장을 배제한 채 진행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러시아의 배제는 중국이나 브라질, 인도 등 주요 남반구 국가들이 회의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게 한 원인이 된 셈이기도 하다. 이달 중순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리는 평화정상회의도 그런 문제점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열려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평화공식 국가안보보좌관 회의든 평화정상회의든 모두 젤렌스키의 평화공식에 기초해 의제가 정해진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기조 속에 열린다고 할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여론이 한동안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 초기의 일이다. 러시아군이 특별군사작전 명의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022년 2월 24일 유엔에서는 러시아의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에 채택된 바 있다. 당시 결의안에 찬성한 나라는 141개국이었다. 하지만 지금 국제여론은 그때와는 크게 다르다. 러시아가 ‘도발 받지 않고’ 다른 주권국가를 침략했다는 서방측의 주장이 처음에는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평화를 위해 양국이 맺은 민스크 협정을 위반한 것은 우크라이나와 서방 국가들이었다는 것, 전쟁 발발 직후 두 나라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거의 다 타결한 휴전 협정을 무산시킨 것도 서방과 우크라이나였다는 것 등이 알려지면서 국제여론 지형이 크게 변했다. 더구나 작년 10월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침공을 이유로 이스라엘이 가자지역에 악랄하고 잔인한 공격을 가해 어린이와 여성이 다수인 민간인 수만을 살상하고 더 많은 부상자를 낸 잔학 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도 큰 영향을 미친 셈이다. 이스라엘이 그런 포악한 행위를 하도록 돕는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과 유럽국가들이라는 것을 알고 세계 인구의 87%를 차지하는 남반구 국가들의 여론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스위스에서 열리는 우크라이나 평화정상회의는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낮다. 그런데도 회의가 열리는 이유는 정작 따로 있다는 분석이 있다. 지금 세계 각국에 회의 초청을 독려하는 데 분주한 것은 주최국 스위스가 아니라 우크라이나라고 알려진다. 젤렌스키가 싱가포르의 샹그릴라 대화에 참석한 뒤 바로 필리핀으로 가서 그곳 마르코스 대통령을 만난 것도 아시아 국가들의 회의 참석을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젤렌스키가 그런 행보를 하는 것은 그의 개인 사정 때문이기도 하다.

젤렌스키는 5월 21일부로 더 이상 우크라이나의 합법적 대통령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의 임기는 끝난 셈인데 전쟁을 이유로 그동안 계엄령을 선포해와 대선을 치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금도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중이다. 젤렌스키의 대통령 임기가 언제 끝나는지는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라 판단할 문제이겠지만, 러시아 측에서는 벌써 그를 합법적 지도자가 아니라 권력 찬탈자라며 몰아붙이는 기세다. 젤렌스키가 회의 주최국인 스위스를 대신해 나서서 바이든과 시진핑에게 회의 참석을 호소하고, 여기저기 다니며 많은 국가 정상이 참석해달라고 로비에 나서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전쟁의 주요한 한 당사자인 러시아를 배제하고 진행될 예정인 우크라이나 평화정상회의가 제대로 모양새를 갖추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번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암운이 드리운 모양이 된 것은 집단서방의 외교적 무능을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진정한 평화정상회의가 되려면 우크라이나 대통령, 그것도 이제는 합법성을 의심받게 된 대통령이 나서서 회의를 조직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러시아의 푸틴도 초빙해서 전쟁의 두 당사자, 또는 사실 미국이 우크라이나 배후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의 바이든도 참석한 가운데 각국의 입장을 조율해야 평화안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면 미국의 하수인 노릇만 하는 유럽국가들 외에 중국과 인도,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남아공, 멕시코 등도 국가 정상을 보내 조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서방, 특히 미국이 그런 외교력을 발휘할 것 같지는 않다. 평화를 명분으로 한 국제회의가 열리지마는 그 덕분에 평화가 올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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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월 안성 저수지 물멍을 스승의 날 선물로 준 제자가 오늘은 괴산 산막이옛길 물멍에 초대한다며 이른 아침 왔다. 아직 물 제의 커다란 얼개 넘어 세부 일정을 잡지 못한 나로서는 잠시 틈내는 일이 오히려 길잡이 노릇할 수도 있다 싶어 냉큼 따라나섰다.

 

예상보다 쾌청한 날이다. 큰길을 달려 먼 데로 나아가는 일은 그때마다 설레고 모든 게 궁금하다. 차 안에서, 지난 두 일요일에 걸었던 두물머리와 더 물머리를 이야기한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제국주의로 흘러간다. 두물머리 수인·해월은 그대로 더 물머리 나다.

 

제자는 수긍과 질문과 탄식과 분노를 넘나들며 대화에 참여한다. 어디를 지나왔는지 통 알 수 없는 채로 어느덧 목적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미 사람들로 붐빈다. 열 시 좀 넘었는데 벌써 먹으며 왜자기는 사람들로 들머리부터 어수선하다. 여기라고 어찌 예욀쏘냐.

 

산막이옛길은 옛길이라는 표현이 주는 느낌보다는 젊다. 해방 직후 어려워진 전력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세운 괴산댐 때문에 본디 옛길이 수몰되자 산막이마을 주민이 새로 만들었으니 칠십 년도 채 안 된다. 세월 따라다니지는 않아서 길 풍경은 저 스스로 좋다.

 

우리는 무심코 들어가다가 지도에 나오는 산막이옛길 아닌 강가 길로 방향을 바꾼다. 둘레길처럼 새로 닦지 않았나 싶다. 강물에 바짝 붙은 경로가 제법 극적이다. 발은 땅을 더듬지만 눈은 연신 물을 쓸고 지나간다. , 인제야 보니 숲이 물빛을 닮아 푸르구나.


 

사람이 많아 북새통을 이루건 말건 나는 곡진히 물을 숨 쉰다. 단 한 군데만이라도 물을 만질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워한다. 현실성 없는 생각인 꼭 그만큼 인간이 물 자연을 멀리해서 영성 없는 껍데기 생명으로 타락했다는 증거다. 똑 그렇다.


 

이 길을 걷는 허구한 사람들이 정말 숲을 찾아온 걸까. 파괴되는 숲을 애도하며 기리는 걸까. 저들이 알고 걷는 뭍 숲이 물 숲에서 올라왔다는 진실을 알기는 하는 걸까. 물 숲, 그러니까 강과 바다 파괴가 근원적이며 절대적인 범죄라는 진실을 짐작이나 하는 걸까.

 

물 옆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그 길로 되돌아온다. 본디 그 옛길로 이어지므로 한 바퀴 돌 수 있지만, 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발과 눈을 꼭꼭 다져 물과 숲을 이어주면서 10km 남짓 제의와 놀이를 가로질러 한바탕 휘휘 저어 나온다.

 

이 강은 달천(疸川: 달래강)이다. 남한강에 속하는 한 지류다. 충주로 달려가 원 줄기와 만나면 여주를 거쳐 이내 두물머리에 닿는다. 두물머리 기세로 우당탕 서울을 가로지른 다음 세 물머리, 네 물머리로 한껏 농익은 몸은 마침내 백호 서해와 한 몸을 이룬다.

 

나는 상상한다: 남한강 물길 따라 평창·영월·원주·양평으로 번져간 수인·해월의 물 사상운동은 그들이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마침내 바다로 나아갔으리라. 반제 통일전선 헌걸찬 선봉이자 본진으로 만방의 수탈·살해당한 생명과 비생명을 품어 안는 어미가 됐으리라.

 

요석(운향원효의 바리(화쟁) 사상운동과 더불어 수인·해월의 물 사상운동은 이제 패자 팡이실이를 마지막으로 불러낸다. 패자만이 팡이실이를 실행할 수 있고 팡이실이만이 승자 필멸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 바로 이제가 승자 제국주의 필멸을 당겨올 카이로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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