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가자지역 학살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시온주의가 초래한 기아와 파괴와 전치에도 불구하고, 이 행성에서 가장 강인한 사람들.”

아래 사진은 지난 6월 16〜19일 나흘간 진행된 이드 알 아드하를 준비하는 가자 여성들의 모습이다. 이드 알 아드하는 희생제를 의미하며 이슬람교에서는 이브라힘—기독교의 아브라함—의 희생 의식을 기리는 축제라고 한다. 세상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만큼 강인한 사람들이 있으랴마는 이스라엘의 만행과 학살이 횡행하는 폐허에서 기아로 내몰리는 식량 부족을 겪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나름 풍성하게 장만하며 미소 짓는 저런 여성들이야말로 참으로 숭고하게 굳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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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었으니 비는 오시기 마련이다. 기상정보를 보고 일단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여느 때보다 느지막이는 일어났으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요일 할 일을 하다가 하늘을 본다. 이슬비이긴 해도 여전히 비가 오신다. 문득 생각이 바뀐다. 비는 하늘 물이 아닌가. 하늘 물이 오신다고 물 모심 계획을 놓는 일은 당최 잘못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얼른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하늘 물맞이부터 한다. 한 생각 돌이킴에 감사하며 이내 길을 떠난다.



하늘 물맞이

 

당분간 특별한 팡이실이 소식 없으면 경강(京江), 그러니까 서울 한강으로 가련다. 가장 익숙한 진입로인 서릿개(반포천)로 향한다. 서릿개는 우면산 동쪽 끝 골짜기에서 발원해 양재동 서초동을 거치며 북으로 흐르다 급격히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미도산 발치, 그러니까 서울성모병원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사이를 지나 한강과 만나서 물머리를 이룬다. 그 직전 사당천(방배천)과 만나 작은 두물머리를 이루지만 사당천이 복개 상태라 풍경이 영 사납다.



사당-반포 두물머리

 


복원 반포천 발원지


실은 반포천도 대부분 복개 상태로 숨죽여 흐르다가 서울성모병원 사거리쯤에서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투른 복원 행정 결과는 그대로 살풍경이다. 정화 장치가 있으나 물은 심히 아프다. 병든 냄새를 풍기고 매운 기운을 쏟아낸다. 그 자욱한 슬픔에 배어들며 연신 속죄의 말을 전한다. 제대로 흐르지 못해 신음조차 낼 수 없는 곳을 지날 때는 대신 아프다, 아프다라고 말한다. 이런 풍경 가로질러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정말 건강할까.



멈추어 숨죽이는 반포천

 

마침내 두물머리. 드넓은 한강에 몸을 푸니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한강 본류도 아프긴 마찬가지다. 물이 너르고 깊은 만큼 병도 너르고 깊다. 강변 따라 굉음을 내며 내달리는 올림픽대로 교각 아래로 걷노라면 맹렬한 분노가 솟구친다. 제국의 부역 권력이 어떻게 물을 함부로 대하고 인간과 이간시켰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물과 풀은 죽을힘 다해 자신과 이웃을 정화하며 살아가는데 인간은 거기 낚싯대 드리우고 앉아 소주 마신다.



반포천-경강 두물머리




낚싯대

 

허리가 또 조금씩 쑤신다. 물이 아픈데 사람-물인들 온전하랴. 가끔 쉬면서 너벌섬(여의도)에 다다른다. 샛강 따라 얼마쯤 걷다가 돌이켜 다시 큰 물가로 간다. 올림픽대로가 고래고래 내지르는 소리를 견디지 못해서다. 잘 가꾸어진 산책로를 이탈해 무조건 물 가까운 좁은 길을 따라간다. 무성한 버드나무숲 속으로 들어가 드디어 한강 물에 손을 담근다. 아프디아픈 몸을 이때만은 말갛게 드러내는 물을 모시고 나는 그 고마움이 서러워 울고 또 운다.



 너벌섬 물맞이


더는 가지 못한다. 허리 통증이 심해져서다. 집으로 돌아가며 생각에 잠긴다. 내가 서울 산에 갖춘 예의를 물에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강 전체는 물론 지천, 그 지천의 지천까지 갈래갈래 걸어야 한다. 문제는 대부분 물길을 덮어 놓았다는 데 있다. 그 물길을 어떻게 찾을까. 복원조차 이명박식 토건이 많은데 이런 가짜 복원은 진짜 복원을 영구히 가로막지 않을까. 산에서 감지할 수 없었던 아득함과 절망이 밀어닥친다. 이래서 물이 물이구나.

 

흔히 다발성 장기부전 증후군(MODS)으로 번역되는 질병이 있다. 전체 장기(기관)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기능을 상실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상황을 가리킨다. 이 치명적 생태 붕괴는 대부분 신장(kidney)에서 출발한다. 서구의학은 그 원인과 기전을 밝힐 수 없지만, 범주 인류학에서 볼 때 이치는 자명하다. 인간 생태계 근원이 물이고, 신장은 바로 그 물을 소통시키는 팡이실이 허브기 때문이다. 지구 신장은 바다다; 강이다; 시내; 샘이다.



신음하는 물

 

그렇다. 지구는 지금 MODS로 달려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이 묵시록적 카이로스에서 물 몸 아픈 냄새를 맡고 매운 죽음 기운을 느끼는 나는 어찌 살아야 하는가. 절대 근원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나서 나는 준비해 간 고운 물 한줄기를 한강에 붓는다. 또 한 번. 다시 또 한 번. 이 물머리에서 나는 내 본성 본디 물로 돌아간다. 나는 더는 인간이 아니다. 찰나마다 범주 인류학적 인류로 체현할 따름이다. 내 글은 회고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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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 국도는 강원도 강릉시 연곡교차로와 인천광역시 인천역을 잇는 264.6km 동서 횡단 국도다. 그 동쪽 끄트머리 가까이에 평창군 간평마을이 있다. 68년 전 내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내 생가는 6번 국도에서 20m도 채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3번 국도는 경상남도 남해군 초전삼거리와 강원도 철원군 대마사거리를 잇는 535.4km(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까지 연장하면 더 길지만) 남북 종단 국도다. 그 남쪽 끄트머리 가까이 진주시 상봉동에 봉산사가 있다. 내 생명 뿌리인 진주 강공(姜公) 휘이식(諱以式) 장군 사당이다.

 

두 국도는 각기 서와 북으로 달려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6번 국도)와 동일로(3번 국도)에서 만난다. 현재 3번 국도는 동일로 지하차도 형태여서 자동차끼리는 만날 일 없이 서로를 가로질러 흐른다. 나는 태어난 지 10년쯤 뒤 포장이 전혀 되지 않은 6번 국도를 따라 털털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와 6번 국도와 3번 국도 언저리를 떠돌며 살아왔다. 14년 전 바로 이 두길머리에서 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의원을 열어 오늘까지 진료하고 있다.

 

두길머리란 용어는 내가 만들었다, 물론. 다시 물론, 두물머리에서 따왔다. 두물머리와 내 인연은 숲길 걷기에서 물길 걷기로 필연 이행하는 길 따라 맺어졌다. 이 인연에서 비롯한 팡이실이 서사는 비 인과적 창발을 거치며 경이롭게 번져갔다. 이 번짐은 어떤 의도도 없이 내 걷기 제의에 스며든 한 사람의 어떤 의도도 없는 행동이 촉매로 작용함으로써 일어났다. 그는 나와 숙의 치유를 함께한 환자이자 제자다. 그가 맥락 없이 연 물길이 맥락으로 작동하였다.

 

처음 그가 이끈 무-맥락적 물길은 안성에 있는 두 저수지였다. 나는 그 무-맥락을 맥락으로 삼아 두물머리를 찾았다. 두물머리 오가는 길이 바로 6번 국도다. 다음 그가 이끈 무-맥락적 물길은 괴산에 있는 저수지였다. 나는 그 무-맥락을 맥락으로 삼아 두물머리 더 깊숙이 양평 수인 이슬 죽임 터를 찾았다. 양평을 안내한 길이 바로 3번 국도다. 내가 그와 해월·수인을 이야기하며 지난 좌우 2km 지점에 해월의 무덤과 비밀결사 <수왕회>를 조직한 곳이 있었다.

 

6번 국도와 3번 국도는 서로 교차해 제 길을 가지만 나는 여기를 물머리처럼 길머리로 여긴다. 내 생, 그 애살맞고 고단했던 두 흐름이 만나 마지막 숨을 고르며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어떤 융해를 빚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적막하지만 나는 여기를 사랑하고 거듭 사랑한다.

 

여기서 나는 내 삶 빈 무덤을 나왔다. 여기서 나는 슬플 때만 나를 찾는 사람들을 만났다. 여기서 나는 없다고 여겨지지만 있는존재와 대화하는 세계를 열었다. 여기서 나는 궁극으로 가는 물길을 펼치고 있다. 끝이 아닐지 모르는 끝 길에서 내 끝 길을 더듬고 있다. 니마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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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은 매년 보수교육을 받는다. 그 평점 없이는 면허 신고가 불가한지라 요식행위일 망정 피해 가지 못한다. 나도 내 의학적 관심사에 공감하고 뜻 나눌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교육 일정을 눈 밖에 둔다. 최소한 요건만 갖추고 남은 시간은 걷는다. 오늘은 일찌감치 필수 절차를 마치고 삼성역으로 간다. 한양대역에서 내려 둔치로 향한다. 지난번 두물개 이야기를 중랑천, 또 중랑천과 만나는 청계천 이야기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여기 두물개에서 경강(京江)-한강 가운데 서울을 지나는 부분을 따로 일컫는 말-과 만나는 중랑천은 그런 지천 중에서 가장 크다. 양주 불곡산에서 발원해 (내 발길이 닿은 곳만 헤아려도) 회룡천, 호원천, 도봉천, 무수천, 당현천, 방학천, 우이천, 마침내 청계천과 만나며 물기운을 더해 경강으로 흘러간다. 서울 북동부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평야 지대를 만들어서 중요한 교통 경로로 작용한다: 3번 국도, 동부간선도로, 지하철 7호선, 1호선.



중랑천에 이런 곳도 있다

 

가장 나중 남쪽 끄트머리에서 중랑천과 만나 또 하나 작은 두물머리를 이루는 청계천은 작지만, 한강 못지않게 중요한 지리적, 심지어 정치적 위상을 지닌다. 한강이 서울 전체를 동에서 서로 관통한다면, 청계천은 서울 핵심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한다. 청계천을 따라서 종로(6번 국도)를 포함한 동서 방향 주요 간선도로 여럿이 늘어서 있다. 지하철 1, 2-크게는 3, 4, 5-호선도 거기 해당한다. 물은 길을 열고, 길은 권력을 실어 나른다.



 청계-중랑 두물머리


청계천을 따라가며 보니 잉어, 청둥오리, 남생이, 왜가리가 산다. 역한 냄새까지 풍기는 오염된 물에 산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보다 안쓰럽다. 우리야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저들은 병든 상태에서 시난고난 살아가는 거 아닐까, 걷는 내내 분노와 애통이 칠떡칠떡한다. 숲의 필연에서 물로 온 까닭 가운데 하나를 겪는 일인데 훨씬 더 맹렬해서 어렵다. 은은하게 맵고 독한 물기운이 온몸에 배어드는 현실을 정면으로 받아안고 숙의는 출발한다.


 

중랑천이든 청계천이든 우리는 지금 물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가? 인간에게 필요한 비생명 도구, 똑 그뿐이다. 인간 생명이 물에서 왔다는 진실은 아득한 그 이상으로 물색없고 의미 없는 정답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주의가 물과 물살이 생명에 가하는 학대와 학살은 식민지 인간과 동물과 숲에 가하는 학대와 학살보다 훨씬 심대하며 근원적인데 아직 관심은 거기에 닿지 못한다. 물이 구원인 꼭 만큼 물 살해는 원죄다. 어물거릴 틈이 없다.

 

원전 오염수, 항생제, 플라스틱, 무기·위성 실험과 시추·탐사선과 대형 선박이 일으키는 소음···이루 다 말할 수조차 없이 뻔뻔하고 잔혹한 폭력에 살해당하는 물, 저 강과 바다로 내가 울며불며 달려가는 일은 이제 더는 어떤 묘사조차 필요하지 않은 투신이다. “숲에서 물로를 말하자 선크림 꼭으로 답하는 사람에게 유머를 던질 시각이 지나버렸다.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나는 하염없이 물길 따라 걷고 또 걷는다. 문득 멈춘다.


 

청계천이 정릉천과 만나는 꼬마 두물머리를 지나 성북천과 만나는 또 다른 꼬마 두물머리로 가는 중간에 우뚝 선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잔해 세 개를 본다. 청계천 판자촌을 강제 철거하고 만든 복개도로 또는 그 위 고가도로를 떠받쳤던 기둥들을 일부러 남겨둔 것이리라. 복원된 청계천 푸른 아름다움과 대비하려는 뜻일 테다. 참 얄팍한 이명박스러운 협잡이다. 청계천 복원이 한낱 눈속임 토건임을 모른다면 이는 강아지 뒷다리 들 일이다.

 

나는 이 두 꼬마 두물머리를 이루는 정릉천, 성북천과 인연이 깊다. 여기서 북쪽으로 1km도 채 안 되는 지점에 두 물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6번 국도가 있다. 6번 국도 북쪽 300m 중간 지점 소재 중학교에 다녔다. 동소문동 산동네 살았으니 주로 성북천 따라 난 길을 걸어서 오갔다. 정릉천은 제기동 쪽으로 갈 일이 있을 때 가끔 지나갔다. 정릉천과 맺은 인연은 초등학교 때 더 깊었다. 청수장 쪽 상류 지점을 누비며 놀았기 때문이다.



정릉-청계 두물머리



성북-청계 두물머리

 

서울 핵심에서 청계천은 6번 국도와 떼어 놓고 말할 수 없다. 서울 전체에서 한강은 6번 국도와 떼어 놓고 말할 수 없다. 내 인생에서 6번 국도와 한강, 그 지류인 청계천·중랑천은 떼어 놓고 말할 수 없다. 남한강 발원지인 오대산 우통수 아래 간평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6번 국도, 그리고 한강을 따라 서울에 왔다. 서울에서 60년째 살고 있는데 거의 전 기간을 6번 국도변 또는 한강 가까운 주변에 살았다. 우연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내 진료실은 중랑천에서 300m, 6번 국도에서 1km 거리에 있다. 14년째 여기서 하루 12시간을 머문다. 내가 삶의 여정을 이렇게 길과 물로 서사화할 때 처음에는 길, 그러니까 6번 국도 중심이었다. 식물 공부 필연으로 숲에서 물로 나아가고 나서야 화들짝 깨달았다, 길은 물에서 왔다는 진실; 6번 국도가 남한강에서 발원했으며, 나는 남한강을 따라와 여기 있다는 진실. 나는 물-사람이구나, 아니. 나는 사람-물이 맞구나.

 

사람-물로서 내가 물에 드는 들머리에서 동시성으로 팡이실이 된 존재가 바로 해월 최시형과 수인(水仁) 이슬(李蝨)이다. 해월의 마지막 인생 도정은 내 인생 전체 도정과 겹친다. 그 도정이 완성되는 꿈으로 수인이 있다. 수인이 바라보는 개벽 세상은 물 모심() 팡이실이 세계다. 사상이 옹글어 가는 과정과 비전이 구체적인 면에서 같지는 않을지라도 근원에서는 온이 같다. 그들이 맞서 싸운 제국과 내가 맞서 싸우는 제국이 어찌 다르랴.

 

물론 나는 동학당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동학당이 아니라고 할 때조차도 나는 동학 하는(do) 사람이 맞다. 제국주의 서학, 특히 과학이라 이름하는 민속 인식론을 가로지르는 범주 인류학 모퉁잇돌 놓기에 진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일 또 어떤 범주 인류학을 상상할지 아직 모른다. 나는 내일 또 어떤 물 모심으로 나아갈지 아직 모른다. 비 인과적 동시성에서 해월과 수인을 만나듯 새로운 물과 만날 일을 다만 설렘으로 기다릴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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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스위스의 루체른에서 6월 15일과 16일의 이틀 예정으로 90여 국가 대표들이 참석하는 ‘우크라이나 평화정상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인 14일 러시아에서는 푸틴 대통령이 외무부에 가서 중대한 발표를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군사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휴전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푸틴이 전쟁 종식을 위한 중대 방안을 직접 내놓자 세계의 관심이 쏠린 것은 당연하다. 러시아 측이 스위스의 평화회의 직전에 중대 제안을 내놓은 것에 대해서는 회의의 논의 기류를 비틀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는 관측자들도 없지 않았다. 14일은 이탈리아에서 13〜15일 사이 G7 정상회의가 열리던 와중이기도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을 주요 현안으로 다룰 것이 분명한 서방 중심의 국제회의가 연달아 열리는 가운데 푸틴이 러시아 측의 휴전 조건을 발표한 것은 국제사회의 관심을 최대한 끌고 영향력도 최대한 행사하기 위함이었을 공산이 크다.

푸틴의 제안은 비교적 간단하다. “우크라이나군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인민공화국, 헤르손과 자포리자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한다. 나는 우크라이나 일부가 된 시기 행정 경계 안의 이들 지역 영역 전체에서 그들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언급한다. 키예프가 이 결정을 하고 이들 영역에서 실제로 군대 철수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고, 또 나토에 가입하려는 계획을 포기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공지만 하면 우리 측은 휴전 명령을 따를 것이고 그 순간 협상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의 확고한 입장을 반복하자면, 우크라이나는 중립적, 비동맹 지위를 택해야 하고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아야 하며, 탈군사화와 탈나치화를 행해야 한다.”

푸틴의 이번 제안은 ‘이스탄불 플러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러시아가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양국이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서 협상을 벌여 합의한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거기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사주하고 영국의 당시 총리 보리스 존슨이 ‘행동대장’으로 나서서 무산시킨 2년 반 전의 협상에서 러시아는 2014년에 자국 영토로 귀속시킨 크림반도 외에는 헤르손과 자포리자는 물론이고 우크라이나 내 반군 활동의 근거지였던 돈바스 즉 도네츠크와 루한스크도 우크라이나 영토로 인정했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탈군사화와 탈나치화, 그리고 비동맹 중립국화의 요구는 그때도 제시되었지마는 러시아가 장악한 영토와 관련해서는 돈바스의 러시아계 주민의 자율권만 인정하면 모두 돌려준다고 한 것이다. 이스탄불에서 합의한 내용 대부분은 이번 제안에도 담겨 있다. 그렇다고 추가된 새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돈바스의 두 공화국은 물론이고 헤르손과 자포리자까지 러시아의 영토로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푸틴이 제출한 휴전 조건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당장 거부 의사를 밝혔고, 그것은 미국과 다른 나토국가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러-우 전쟁의 종식을 결정지을 핵심은 전장의 현실이라고 봐야 한다. 지금 러시아가 1,400킬로가 넘는 전선 전체에서 승세를 굳힌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군은 돈바스의 두 공화국과 헤르손, 자포리자만이 아니라 하르코프 주의 볼찬스크와 립치에서도 우위에 선 형세다. 와중에 우크라이나군의 사상자 수가 최근에는 매일 1,500〜2,000명에 이른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푸틴이 이번에 제출한 휴전 조건에서 이전과는 달리 우크라이나에 4개 지역에서 철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자국군의 전황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로 여겨진다.

이번 휴전 조건을 발표하기 전에 푸틴이 러시아 내부에서 중요한 군사적 모임을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대통령궁에 따르면 푸틴은 11일 저녁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국방부 장관, 발레리 게라시모프 참모장과 회동한 뒤 일부 지역 사령관들과 개별 면담을 했다고 한다. 그날 회의의 내용이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마는 푸틴이 최근의 전황에 대해 상세한 보고를 받았을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14일에 우크라이나에 이제는 돈바스의 두 공화국은 물론이고 헤르손과 자포리자 지역까지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은 군부로부터 낙관적인 전황 보고를 받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한편 러시아에서는 푸틴의 제안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도 있는 모양이다. 그동안 큰 희생을 치르며 전쟁을 수행해와 지금은 승세를 굳히고 있는데 왜 4개 지역만 취하고 다른 지역은 취하지 않으려는 것이냐고 말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하르코프와 수미, 오데사 등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지역을 이번에 러시아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도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다. 푸틴 자신도 최근에 와서는 오데사 등에 대해 러시아 영토라는 표현을 써오기도 했다.

하지만 푸틴이 4개 지역만 우크라이나가 포기할 영토로 이번에 언급한 것은 국제 여론전의 일환이라는 분석도 있다.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 <관찰자망观察者网>에 실린 한 기고문에 따르면 러시아는 전쟁을 바로 중단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비서방 국가들에 푸틴의 의도일 공산이 크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서방 세력이 그동안 펼쳐온 서사를 저격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나토국가들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고 나면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서쪽으로 즉 유럽으로 계속 밀고 들어올 것이라며, 우크라이나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워야 한다는 자세를 일관해왔다. 그러나 푸틴의 이번 제안은 자신이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땅이라고 불러온 오데사, 하르코프, 수미 등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고 이미 주민 투표를 거쳐 러시아 연방에 귀속된 4개 지역만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고 나면 유럽까지 집어삼킬 것이라고 주장해온 서방의 서사와는 전혀 다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4개 지역에서만 철수하라고 함으로써 서방이 자국에 대해 거짓 주장을 하는 것임을 비서방 국가들에 환기하는 셈이기도 하다. 비서방 국가들은 푸틴의 휴전 제안을 보고 그동안 러시아의 호전성을 강조해온 서방의 선전이 사실과 다르다고 여길 가능성이 크다.

사실 지난 15〜16일에 스위스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정상회의의 결과를 보면 이제는 많은 나라가 서방의 우크라이나 서사를 더 이상 수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022년 3월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놓고 유엔에서 채택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의 경우 190여개 회원국 가운데 141개 국가가 찬성했다. 하지만 이번 스위스 회의에는 160개 국가가 초청되었으나 90여 국가만 대표를 보냈고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에는 그보다도 적은 80개국 미만이 서명한 것으로 알려진다. 우크라이나 갈등을 놓고 세계 여론이 반전된 셈인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서방 국가들은 푸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젤렌스키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철수해야 휴전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스위스 정상회의 첫날 즉 푸틴이 휴전 조건을 발표한 다음 날 회의장에서는 그에 대한 언급이 계속 나왔으나 호의적인 반응은 드물었다. 따라서 푸틴의 제안은 현재로서는 소귀에 경 읽기로 그친 셈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서방의 반응이 그럴 것임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휴전 조건을 발표한 것은, 서방보다는 비서방 국가들이 자국의 입장을 지지해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미 러시아는 비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많이 받아 놓고 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와 나토국가들이 러시아와의 휴전 협상을 미루면 미룰수록 전장의 현실이 그들에게 계속 불리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에 더 많은 영토를 빼앗길 확률이 높다. 러시아는 지금 당장은 우크라이나군에 4개 지역에서만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동안의 전황을 보면 갈수록 우크라이나 영토를 더 많이 점령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이번 제안에서 오데사와 하르코프 등을 언급하지 않은 푸틴에 대해 너무 유화적이라며 볼멘소리하는 러시아 강경 세력의 희망이 실현될 수도 있다. 그들은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우크라이나 영토만큼은 모두 러시아화할 것을 요구한다.

“어제의 제안이 우리 측의 마지막 평화 제안이었다. 다음에는 항복의 제안이 될 것이다.” 러시아 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고손자이며 러시아 의회 현 부의장인 표트르 톨스토이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러시아가 다음에 항복을 강요하게 될 때 우크라이나는 국가로서 존립하기 어려워질 우려도 있다. 그렇게 보면 우크라이나로서는 푸틴의 이번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정치권력이나 나토 세력은 이미 거부의 태도를 드러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해결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말인 셈이다. 우크라이나 인민, 특히 군대에 ‘대포 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희생은 계속되고 커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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