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혁(성형외과 전문의)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대학 동기인 이승훈 교수가 이토록 멋진 강의를 하고 있을 줄 몰랐다. 신경과 교수이지만 내분비, 생화학, 영양학을 넘나들며 일반인들의 주 관심사들을 매우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는데, 상식을 뒤집는 아주 예리하고도 중요한 설명이 흥미롭다.
요점은 비만과 당뇨에 있어 포도당이 주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탄수화물 혐오의 시대에 살고있다. 흰쌀과 밀가루는 당뇨와 비만의 주 범인으로 낙인찍혀 있고 과일, 고단백질 고지방식이 건강을 위해 환영받고있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과학적으로 완전무결한 진리일까?
내가 조금만 이 강연에 msg 쳐서 풀이한다면 쌀과 밀 등 곡류가 주로 갖고있는 것은 포도당인데, 포도당은 몸에서 저장을 잘 안 하고 거의 들어오는대로 쓰여져 없어진다는것이다. 이게 뱃살 옆구리살로 갈 틈이 없다. 반면, 과일 속에 풍부한 과당은 인간 체내에서 곧바로 저장소로 직행하고 소비가 잘 안된다는 것이다. 저장소란 지방세포이니, 빠르게 내장지방, 복부비만의 원인이 되고 만다. 그리고 비만이 곧 2형 당뇨의 원인이다. 비만에서 벗어나면, 2형당뇨는 롤백되고 없어지기도 한다.
타히티섬 원주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무진장하게 열려있는 열대과일들을 먹으며 살아왔다. 햄버거 피자 라면 이런거 없어서 전연 못먹던 시절에도 푸짐하고 비만한 몸매였다. 이것은 곧 과당이 비만의 주범이 아닐까라는 인사이트를 만들었고, 실제 미국에서 액상과당이 옥수수로부터 엄청나게 생산돼 청량음료나 베이커리(케이크), 각종 단맛나는 가공식품 등에 쓰이게 된 이후부터 미국인들의 비만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었다. 포도당 섭취나 스테이크때문은 아니었다.
국수나 면 즉 밀가루, 흰 쌀등은 몸에 안좋다는 상식은 탄수화물 혐오와 겹쳐 현재 우리의 식단을 지배하고 있고 특히 여성층, 젊은층에게 어필하고있다. 이때문인지 한국의 쌀 소비량은 현저하게 떨어지고있고 그게 쌀농사의 위기로까지 번졌다.
우리 몸의 유전자는 이 한반도에 수천년 이상 살아온 조상들의 dna에서 크게 다르지 않고, 이들은 그 긴 세월동안 쌀을 대량으로 먹으며 지냈다. 한국 토종식물을 미국이나 러시아땅에 옮겨심으면 거기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벼란간 불어온 탄수화물 혐오 현상 역시 한국인의 몸에는 스트레스일 것같다. 나는 한국 식당에 가면 나오는 공기밥 사이즈부터 바꿨으면 한다. 성인 주먹 분량만큼만 나오는 밥의 양은 자꾸 디저트나 식후의 주전부리를 자극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처럼 고봉으로 떠먹는 정도의 량은 아니더라도, 지금보다 밥의 섭취량은 많아져도 된다.
비만에 있어 가장 위협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상당량의 포식 후 칼로리 로딩이 대단히 높아진 상태에서 나오는, 식후의 과일 디저트 (아이스크림 포함)이다. 이게 햄버거나 라면보다 훨씬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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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년 동안 숲과 물에 빙의되어 생사 고비까지 넘겨 가며 드나들었다. 그게 몸을 배려하지 않은 고행 수준이었는지 후유증이 제법 오래간다. 천추 통증은 뭉근하기와 날카롭기를 갈마들고, 왼쪽 발바닥과 오른쪽 옆구리 불편한 느낌도 수시로 출몰한다. 사실 이런 증상은 애당초 예상된 것이었다. 10대 초반에 다친 어깨 탓으로 몸 전체 균형이 깨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0년 이상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살아온 습관이 무심코 무리하도록 이끈 듯하다.

 

최근에는 일요일 걷기를 대폭 줄이고 가능한 한 가파른 산을 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천추 통증은 현저한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뒤틀린 천장관절 구조가 일으키는 문제로 판단되지만, 특별히 할 일은 없다. 간단 요가로 꾸준히 풀어주면서 관찰하는 중이다. 이러는 사이 일요일 걷기는 전처럼 멀리까지 나가지 않는 범위로 좁혀졌다. 궁 능과 국··, 그리고 국··박으로 이어지는 행로였다. 그중에서도 종묘와 국··, 특히 종묘 걷기가 가장 많았다. 무슨 연유에설까?

 

처음에는 문화유산으로서 또 예술로서 지닌 장엄함에 이끌렸다. 여느 궁 능과 사뭇 다르게 지닌 그 빛깔에 사로잡혀 가고 또 갔다. 다음에는 숲에 눈길을 깊이 두었다. 비록 작은 숲이지만 내 눈에는 정전만큼이나 장엄했다. 그러다가 지난 일요일(2025817) 여기가 자연과 문명이 만나는 가장 날카롭고도 부드러운 마주 가장자리라는 사실을 드디어 알아차렸다. 종묘야말로 문명이 극한 겸허로 자연에 깃들고 자연이 극한 관대로 문명을 품은 공존 상생의 지성소다.

 

정전과 영녕전은 건물 자체로 이미 문명 초극을 향해 있다. 맛있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미각을 감화하는 음식과 같다. 현액도 없고 단청-구태여 찾는다면 풀빛 하나-도 없다. 이는 필경 인간 저 너머 계신 신들을 향한 지극한 헌정이리라. 숲은 높은 듯 나부시 그리고 다정히 신들의 거처를 감싸안는다. 그런 숲에 화답하여 정전과 영녕전 처마 끝은 하늘 향해 솟아 있지 않다. 이 각성은 걷기 몸 감각에서 나왔을 테다. 살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말이다.

 




땀에 흠씬 절은 채로 천천히 찬찬히 걷고 또 멈추고 또 걷는다다른 눈으로 문명과 숲을 다시 본다그 둘이 닿고 겹치고 사이 내는 모습을 곱고 촘촘하게 관찰한다경이로운 자태를 드러내는 버섯을 틈틈이 기린다우람한 나무들에 예를 갖춘다볼 때마다 처음처럼 새로운 정전 장엄을 온몸에 담고 마침내 숭고한 사건 하나 되어 문을 나선다그래오늘 여기가 내 의학이며 철학이며 사상이며 전선이다네이팜탄 터진 듯한 팔월 뙤약볕 벌판을 뚫고 사바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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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일부터 매주 연속 다섯 번 국··박으로 향한다. 갈 때마다 마주하는 엄청난 인파에 볼 때마다 놀란다. 제국들에 허다한 민족 유산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더욱 놀랄 일이 일어났을 것이므로 놀랄 때마다 속이 쓰리다. 다섯 번을 가면서 자연스럽게 동선이 정해진다. 후반에는 3층으로 바로 올라가 불상부터 백자까지 반복 탐색한다. 최종으로는 불상에 집중한다. 왠지는 아직 잘 모른다. 곰곰이 되뇐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을 터이되 문득 스치는 생각은 모두 다른 그 오묘한 표정들에 이끌리지 않았을까, .

 

정확히 언제 어떤 경로를 따라 새겨진 기억인지 기억나지 않는 이런 기억이 내게 남아 있다: 중국 불상 얼굴은 배부르게 먹고 난 뒤 표정이고, 일본 불상 얼굴은 여러 날 단식한 뒤 표정이고, 한국 불상 얼굴은 먹은 것을 후련히 비우고 난 뒤 표정이다. 장인이 지닌 상상력만으로 만들지 않은 이상, 불상 얼굴은 문명 특성을 반영하기 마련이니 상응하는 차이가 드러남 직도 하다. 이 말을 처음 한 누군가는 세 나라 문명이 지닌 특성을 나름 간파했음에 틀림없다. 실은 나도 공감 또는 수긍했기에 기억났을 테고.

 

유구한 시간을 지나 오늘까지 전해진 불상들은 조성 과정에서 대개 왕실이나 귀족이 발원하고 비용 댔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그들 지배층이 종교를 통해 투사하는 욕망과 그 욕망을 메타 인식하는 관지(觀地)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학문 차원에서 근거를 찾고 그 내용을 구성하는 일은 능력 밖이라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쟁여진 관련 지식과 상식을 바탕으로 하고 인류학적 직관에 기대어 내 기억에 공감 또는 수긍한 근거와 그 내용을 구성해 보기로 한다. 하여 국··박 중국관과 일본관을 향한다.

 

중국관 입구에는 중국 문화 자궁을 황하라고 밝힌 안내문이 있다. 하등 이상할 일이 없다. 다만 황하를 중원(中原)이라 부른, 그러니까 자신이 천하 한가운데(中心) 있는 존재라고 착각한 사실에 주의하면 된다. 그 자부심이라면 불상 얼굴에 배부르게 먹고 난 뒤표정이 나타나는 일 또한 자연스럽다. 오늘날도 그들은 중국몽(中國夢)”이니 중국굴기(中國崛起)”니 하지 않나. 그들이 미국을 밀어내고 또 다른 일극 제국을 꿈꾼다면 인류에게 마지막 재앙일 테니, 배부르게 먹고 난 뒤 지족에 그치길 바란다.



일본관 입구에는 일본 문화 후원자를 무사라고 밝힌 안내문이 있다. 하등 이상할 일이 없다. 사무라이야말로 일본 정신 또는 근성(こんじょう) 자궁이니까. 다만 그들이 일합(一合) 승부 칼부림과 할복으로 결기를 자랑하는 근거가 극단 자부심, 그러니까 가장 먼저 해()가 뜨는 () 라는 착각에서 왔다는 사실에 주의하면 된다. 그 자부심이라면 불상 얼굴에 여러 날 단식한 뒤표정이 나타나는 일 또한 자연스럽다. 하청(下請) 제국주의, 거간 자본주의로 호가호위하는 날들이 저물고 있어 아쉽다.


 

김명신 내란 일당 속내가 낱낱이 드러나는 중인 요즘 단연 백미는 저들이 왜국 주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섬기는 사특한 주술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종교 또는 비의(秘儀)는 주술을 바탕으로 존재하므로 주술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왜국 주술이 사익을 위해 원한을 악의로 일으키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반대로 해원 상생에 뿌리를 내린 주술이 내장된 한국 불상 얼굴에 먹은 것을 후련히 비우고 난 뒤표정이 담기는 일은 자연스럽다. 바야흐로 K-불상 표정이 세계를 해탈시킬 때다.


 

··박 오고초려(五顧草廬)로 내가 모시고 나온 우리 불상 표정은 오연(傲然)하다. 오만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담담하다는 말이다. 중국 불상은 실제로 오만(傲慢)함을 풍긴다. 일본 불상은 실제로 오기(傲氣)를 뿜어낸다. 나를 국뽕이라 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왜·미국 주술 떼거리를 응징하는 자주 민주 시민이 품은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주술을 기꺼이 사랑하고, 그래서 나는 국뽕 주술 전도사가 되고 말 테다. ··박 예술 행동을 일차 마무리하면서 다음 행보를 곰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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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미래변화연구소 소장)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실제 범죄 심리 연구에서 밝혀지는 진실은 종교는 윤리와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범죄 통계를 보면 무신론자보다 종교인이 더 많았다. 심지어 독일 범죄심리학자이자 피해자학의 창시자인 한스 폰 헨티히(Hans von Hentig, 1887–1974)는 “범죄 가능성을 줄이는 가장 강력한 예측 변수 중 하나가 종교 조직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왜일까? 종교는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무신론자들의 심리적 마지노선은 현행법이다. 즉, 자신의 도덕적 바운더리를 법이 규정한 것에 최소한 맞추고 행동한다는 점에 있다. 특별히 어떤 신념도 현행법보다 크게 두지 않는다.
반면 종교인의 도덕적 바운더리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다. 그래서 종교인들이 오히려 세속법을 무시할 확률이 크다. 먼데 가지 말고 공공 장소에서 확성기로 전도나 찬양하는 행위를 보자. 이로 인해 소음이 발생하고 타인에게 불편함을 끼치는 것은 ‘인근 소란죄’에 해당하고, 신고 없이 다수가 모여서 하면 집시법 위반이다. 그러나 이를 인지하는 종교인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저들에게는 그것이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종교의 진짜 문제는 그 신념이 세속법을 뛰어넘는다는 점에 있다.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세속법이 충돌할 경우 주저 없이 법을 어기는 쪽을 선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제일교회 특임 전도사가 붙잡혀 갈 때 미소를 보자. 그는 죄를 지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임무를 수행한 기쁨의 얼굴이었다.
저 옛날 십자군의 살육도 그랬고, 마녀사냥도 그랬고, 이슬람의 성전도 그랬고,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는 현대 유대교의 만행도 그렇다. 저들은 모두 신의 뜻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다 나름대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 테러리즘의 근원이다.
현대 종교라고 안심할 수 있는가? 당장 종교 지도자들이 신도들에게 세속법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모습을 난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보통 하늘의 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세속법을 초월한다.
사이비로 갈수록 이것은 더 심해진다. 교주의 말에 절대순종 하는 것이 하늘의 법이기 때문이다. 교주를 위해 재산을 바치고, 몸을 바치고, 필요하면 그를 위해 사람도 때리고 공공 건물도 부수고 테러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상 종교와 사이비를 아주 간단하게 구분한다. 법을 준수하면 정상 종교, 법을 어기면 사이비다. 본인들끼리 이단이니 뭐니 하는 것은 사회적 입장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길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국가라도 종교가 작은 법이라도 어기는 행태를 절대로 묵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종교는 그 근원에서 언제든 범죄 집단화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이제 그만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법을 조직적으로 어기는 사이비를 반드시 청소해야 하는 이유이고 정상 종교라도 국가 차원에서 계도와 관리가 필요한 이유이다.
종교가 국가의 도덕성을 이끌어줄 수 있다는 믿음은 인류가 품어온 오래된 환상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신정국가가 아름다웠던 사례는 단 한 건도 찾아볼 수 없다. 현대라고 다를까? 남미 마약 카르텔의 대부분은 카톨릭 교도고, 로힝야족을 학살한 사람들은 불교도고, 오늘날 전 세계 극우 테러리즘을 주도하는 이들은 개신교도다. 이렇듯 신을 믿는다고 해서 특별히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은 현대 사회만 봐도 명백하다.
내가 특정 종교를 비방하거나 종교 무용론을 주장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게 아님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종교인중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잘안다. 그러나 이 또한 케바케고 다만 종교 집단의 도덕적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국가가 종교가 도덕적으로 엇나가지 않게 걱정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종교가 도덕성을 높여준다는 것은 인류가 오랫동안 품어온 환상이다. 실상 그 반대 사례가 더 많다. 그래서 종교는 가만 놔두면 좋아질것이라는 이 환상을 버릴 때,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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