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버러지 준동에 이어 국짐 쌍·권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당내 민주주의 탈을 쓴 조직력으로 김문수가 살아나긴 했으나 다시 문제는 이제부터다. 여전히 내란은 진행 중이다. 바람 불고 비 오는 광장으로 나는 간다. 연속 스물네 번째 발길이다. 장기전이 불가피해 보인다.

 

미도산 허리께에서 들리는 외침 소리가 심상치 않다. 악에 받친 한 사람 소리가 계속 반복해서 들려온다. 그리고 듬성듬성 태극기를 손에 들거나 어깨에 두른 사람이 숲길을 지나간다. 아니나 다를까, 촛불행동 집회 장소에 숭미·모일 매판 떼거지가 우글거린다. ‘우리 편은 어딨지?

 

까만 백 팩에 커다란 노란 리본을 매단 채 나는 그들을 가로질러 서초역 쪽으로 내려간다. 왜 공지가 없지? 스마트폰 열어보니 황급히 장소 변경한 흔적이 뜬다. 대법원 앞이라는 상징성을 빼앗으려 저 성조기 부대가 경찰과 짠 듯하다. ‘우리 편은 사랑의교회 앞으로 쫓겨났다.


 

하기는 사랑의교회 앞도 나쁘지 않다. 사랑의교회나 사랑제일교회나 큰 차이가 없을 테니 말이다: 사랑제일교회나 대법원이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으니 말이다. 개신교 판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대법관 호명할 때 덧붙일 후렴 인명 더 생겨서 신명 아연 비상한다.

 

비바람 맞으며 있다가 조금 먼저 나온다. 찬 빗물이 모자와 옷을 뚫고 살갗에 닿기 시작해서다. 저녁을 먹으려 식당으로 들어간다. 20대 젊은이 넷이 술을 마시면서 시종일관 나누는 이야기는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 미셀러니다. 나이 든 저들 손에 들린 성조기가 환상으로 나타난다.

 

강하게 머리를 젓는다: 설마. 설마가 얼마나 편안하게 우리 뒤통수를 후려쳐 왔던가. 인간이라면 차마 해서는 안 될 짓을 언제 어떻게 벌여도 죽기 살기 지지하는 극우가 국민 1/3 이상인 해괴한 나라에서 설마를 또 입에 올릴 수 없다. 소걸음이더라도 범 눈을 뜨고 나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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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경근(청주지방법원 판사) 님 글을 전재한다 



“대법원이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대법관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재판을 통해 정치를 한다.” 등의 국민적 비판이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DJ 정치자금 수사와 같이 선거철이 되면 진행 중이던 수사나 재판도 오해를 피하기 위해 중단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사법 불신사태를 누가 왜 일으키고 있는지, 사상 초유의 이례적이고 무리한 절차진행이 가져온 이 사태를 과연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선거 후 사법부가 입을 타격이 수습 가능할 것인지 그저 걱정될 뿐입니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 매지 말고, 오이 밭에서 신발 고쳐 신지 말라.”, “결론과 절차가 공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정해 보여야 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99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

법관생활 30여년 동안 참 많이 들어본 말입니다. 워낙 자질이 부족한 저로서는 이를 제대로 지키며 살지 못했지만, 대법원에 계신 ‘저스티스’들께서는 적어도 저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믿고 그 판결을 존중하였습니다.

6만 쪽이 넘는다는 방대한 기록을 이례적으로 항소심 선고 후 불과 2일 만에 정리하여 대법원으로 송부하고, 피고인의 답변서가 제출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날인 4. 22. 소부 배당 후 즉시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당일 오후 1차 합의기일을 갖고, 이틀 후인 4. 24일 2차 합의기일을 갖은 후 1주일 후인 5. 1.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 30여년 동안 법관으로 근무하면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초고속 절차 진행이더군요.

1, 2심이 정반대의 판결을 선고하였고, 대법관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갈리는 사안을 말입니다. 게다가 보도되는 판결이유를 살펴보니 사실관계 확정이 결론을 좌우할 수 있는 사안이라 사건기록도 열심히 보아야 했을 사건이더군요. 1, 2심의 결론이 다르고 그 심리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그만큼 사실관계 확정 및 법리 적용이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아닌지요.

하기야 6만 쪽 정도는 한 나절이면 통독하여 즉시 결론을 내릴 수 있고, 피고인의 마음 속 구석구석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심법까지, 그야말로 신통방통하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신 훌륭한 분들만 모이셨을 것이니...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우둔한 제 기준에만 맞춘 기우인가 봅니다.

대법원이 대선을 불과 한 달 남짓 남겨둔 상황에서 이렇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재명 대표의 사건을 심리할 때부터 저는 “대법원이 왜 정치를 한다는 국민적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저런 무리한 행동을 할까”라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주심대법관이 불과 몇 개월 전 유사한 사건에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렸고, 항소심판결이 무죄 선고의 법리적 근거로 삼은 판결이 바로 위 판결이며, 파기환송 하더라도 절차와 시간상 대선 전에 확정판결이 사실상 불가능한 사안이므로, 상고기각을 하려나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경우 “이재명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날개 달아준 후 덕 보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게 될 것이고, 설령 파기환송을 하더라도 “어떻게든 선거에 영향을 주어 이재명 후보를 떨어뜨리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게 됨으로써,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리든 “대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정치행위를 했다”는 국민적 비판에 직면할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법원판결의 배경을 설명하는 보도자료, 차라리 내지 않은 것만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느닷없이 적절한 비교대상도 아닌 미국의 부시-고어 재검표 판결을 끌어오질 않나, 1, 2심의 결론이 달리나온 것을 두고 “혼란과 사법불신의 강도가 유례 없어 신속한 절차진행이 필요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다수의 평범하고 선량한 유권자들이 정말 그렇게 인식하고 있던가요. 보도자료를 작성한 분은 평소 누구를 만나고 어떤 언론매체를 보고 들은 것인지요.

12. 3. 친위쿠데타 세력들은, 권력의 실정과 전횡을 비판․견제하는 야당과의 반목 상황을 들어 “국가적․사회적 혼란과 대립 양상이 극에 달해 군을 동원한 질서 유지가 필요했다”고 했었지요. 저는 그날 밤 비상계엄 발령 사실조차 모른 채 재판부 구성원들과 함께 술을 꽤 마시고도 늦은 시간 아주 안전하게 귀가했습니다.

민사사건이 아닌 형사사건, 그것도 과실범이 아닌 고의범 사건에서, 피고인이 어떤 사실을 말 한 적이 없거나(골프 발언) 자신이 느낀 대로 또는 이를 과장해서 말했더라도(국토부의 협박 발언) “당시 상황과 발언의 전체적 맥락을 토대로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 살펴야 한다”는 이른바 ‘유권자의 관점’을 내세워 ‘구체적인 허위사실을 공표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이 경우 피고인은 당시 압박을 느껴 협박이라고 말했더라도, 법원이 사후에 유권자의 시각에서 판단한 결과 협박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고의범인 허위사실 공표죄가 성립되는 것이지요.)라는 의문이 들기는 하나, “기록도 보지 못한 사람이 뭘 알고 그런 말을 하냐”고 할 것 같아 굳이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 마음 속으로 “언어의 내적 의미가 아닌 사용맥락을 중요시한 천재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무덤에서 깜짝 놀라 뛰쳐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해봅니다.

그동안 우리 사법부의 행정책임자들이 위헌․불법적인 비상계엄 사태 때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상황이 너무나 엄중한지라 사법부를 위해 참았습니다. 그 직후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서 그에 관한 질의나 문제 제기조차 전혀 없었다는 것에 크게 실망했지만 그래도 참았습니다. 과거 사법행정권 남용행위 등에 적극 가담하거나 방조하고 수구 언론들과 소통하면서 그 청산 노력을 방해하던 사람들이 대법원, 법원행정처, 각급 법원의 책임자로 복귀하는 것을 보면서도, 인사권자는 대법원장이고 종전의 실수를 거울삼아 더 잘할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사법부의 발전을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종전에 사법행정권 남용, 권력과의 거래 의혹 등에 문제를 제기하던 법관들에게 ‘정치판사’, ‘이념 편향적 판사’라고 그렇게도 비판하던 분들, 지금은 왜 이리 조용하신가요. 과연 무엇이 법원을 해치는 행위인지요. 법을 전공하고 그것으로 엘리트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 군을 동원해 친위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러한 세력들을 말도 안 되는 궤변과 허위사실로 변호함으로써 법정을 희화화하는 일이 아무 것도 아닌 듯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가진 재판권은 공부 잘 하고 시험 잘 보았다고 받은 포상이 아닙니다. 권력자가 준 것도, 변호사가 준 것도 아닙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이 세상에 잘 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 중에 ‘공부’ 그것도 ‘법률공부’ 하나 잘 해서 법관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공감능력, 인문학적 소양, 공직자로서의 자세 등 법률지식 못지 않게, 아니 그 보다 더 중요한 시민적 소양은 검증된 바 없습니다. 평범한 국민들 중에는 위와 같은 능력에 있어 우리 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만 모를 뿐입니다. 국민은 그저 지배대상이, 재판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를 임명한 주인입니다. 결국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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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혜원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오늘날 전 세계 가톨릭 신자 중 약 5분의 1은 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대륙의 가톨릭 인구는 1960년대 이후 무려 여섯 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콩고민주공화국, 나이지리아, 케냐와 같은 나라들은 사제와 수도자를 가장 빠르게 배출하는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유럽에서 신앙의 동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 현실과 대조적으로, 아프리카는 가톨릭의 ‘미래’로 불릴 만큼 활력을 지닌 공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대륙을 자주 방문하고, 단순한 목회적 차원을 넘어 교회의 존재론적 중심이 남반구로 이동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에게 아프리카는 ‘돕는 대상’이 아니라, 가톨릭이 다시 태어나고 있는 장소, 곧 교회가 새롭게 자기를 성찰하고 재정의할 수 있는 실존적 경계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은 그가 남긴 깊은 도덕적 유산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많은 매체들은 그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보여준 ‘연민’과 ‘애정’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흔한 프레임을 잠시 멈추고 물어야 한다. 그가 진정 남긴 것은 제국의 해체 이후, 남겨진 기억의 폐허 위에서 신학적 존재가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묻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교황은 한 국가의 수장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제국 그 자체였던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유럽 제국주의의 내면적 윤리를 구성하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식민지화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조직이었다. 16세기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선교사들의 ‘영혼을 위한 사역’은 곧바로 토지의 약탈과 노동 착취로 이어졌고, 그 구조는 깊은 침묵 속에서 세계의 기억으로부터 지워져갔다. 그렇기에 오늘날 ‘교황’이라는 존재가 아프리카 대륙의 상처받은 기억과 마주선다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를 넘어선다. 그것은 제국이 자신을 신처럼 내세웠던 질서를 낮추고, 그 질서가 남긴 상처 앞에 마침내 무릎을 꿇는 순간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이 나라의 피를 빨아먹은 외부 세력들”을 지목하며, 단순한 평화 담론이 아닌 역사적 고발을 택했다. 이는 정치 지도자들이 대부분 피하려 드는 “누가 피해자인가, 누가 가해자인가”의 도식을 적시한 행위였다. 이 발언은 결코 가벼운 수사가 아니다. 가해의 구조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고, 국제 자본과 광산 경제는 오늘도 제국의 경제적 심장을 다시 뛰게 하고 있다. 교황의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기억의 재정치화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공식적인 국가 수장이 아니며, 교황청은 콩고를 식민 지배한 벨기에도 아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윤리적 힘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잘못을 고백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공동의 기도를 위해 자리를 비우는 자로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개입이었다.
우리는 흔히 정치의 언어로 사과와 용서를 정의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침묵은 정치적 침묵이 아니었다. 그는 사과의 주체가 되기를 자처하지 않았고, 대신 경청의 존재론을 선택했다. 이 세계에서 피해자의 말이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말하기를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국의 계승자로서 권위를 잇되, 그것을 기도와 경청의 방식으로 전복시켰다. 프란치스코는 제국의 잔해 위에 다시 제국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폐허 위에 머물렀고, ‘폐허 위에 있다는 감각’ 그 자체를 교회의 윤리로 되살렸다.
그의 마지막 발걸음은 지도자의 행보가 아니라 순례자의 길이었다. 제국이 남긴 기억의 조각들 사이를 걸으며, 그는 다시금 교회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아마도 그는 아프리카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제국이 망가뜨린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고, 그 안에서 함께 고통을 견뎌낸 이들과 눈을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아프리카를 사랑한 교황”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아프리카가 잊히지 않도록 기억을 지켰던 자, 그리고 그 기억 앞에서 제국이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대신 침묵했던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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