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
R.뿔리간들라 지음, 이지수 옮김 / 민족사 / 1992년 12월
평점 :
품절


 

1. 저는 개인적으로  전혀 불교와 상관 없이 대칭성의 사유 양식을 탐색하고 연마하는 과정에서 원효에 도달한 특이한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과정의 절정 어름에 초기불교를 만났습니다. 원효로서는 빠알리어 경전을 전혀 대할 수 없었겠지만 초기불교 사상이 원효의 품을 벗어난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금까진.  하지만 좀 더 면밀하게 초기불교 쟁점을 살피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비록 제가 불교적 접근으로 원효를 만나 게 아니지만, 하여 그것을 불교사상이라 이름하지 않지만, 원효가 스스로 젖줄을 댄 샘이 붓다가 맞다면 , 붓다의 가르침을 관통하고 흡수하는 일은 더없이 유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reference의 결을 좇으며 초기불교의 속살로 다가가고 있는데 그 와중에 접했던 여러 가지 담론들이 어떤 공통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초기불교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들이 불교라는 정체성 안에서만, 특히 초기불교 가르침 안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게 붓다의 본디 가르침 맞아?, 그러면 그것으로 끝!, 이런 식이라는 느낌입니다. 非佛說이면 불교와는 상관 없다, 이런 것이지요. 더군다나 그 기준이 매우 逐字的입니다. 같은 뜻이라도 다른 용어를 쓰면 물리칩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지요. 행간을 보지 못하는....... 

 

하여 저는 붓다를 불교 경전과 그 주석서를 통해 이해하는 한편 붓다를 둘러싼 조건,  synchronic한 지평과 diachronic한 맥락을 살피기로 했습니다. 인류가 낳은 최고 지혜가 맞지만 붓다 또한 한 인간입니다. 그에겐 그의 삶의 정황이 있습니다. 문화가 있습니다.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상대적입니다. 그리고 한계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 아무리 붓다라고 해도 그의 가르침은 백과사전도 아니고 완벽한 논리에 터 잡은 철학 교과서도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印度的 사유라는 커다란 조건을 탐색해 볼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 가운데 R. 뿔리간들라의 <인도철학>을 손에 들었습니다.  

 

이 책은 오해 받고 폄훼되는 인도철학의 정수를 compact하게 석명한다는 취지를 담은 듯합니다. 베다에 대한 자세를 중심으로 인도사상 전체를 정통파와 비정통파로 나눕니다. 비정통파를 앞에 배치하고 정통파를 뒤에 배치하여 서술합니다. 그런데 비정통파에서는 불교를, 정통파에서는 베단따를 중심축으로 세웁니다. 두 부분에 대한 내용만으로 책 전체의 절반을 채웁니다. 그리고 뒤에 인도의 시간관과 역사관이란 장을 마련하여 불교사상과 베단따의 일치를 말합니다. 저자의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게 하는 구성이며 내용입니다. 물론 저는 이런 큰 흐름에 주의하려고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 인도적 사유의 전체적 지평과 맥락에서 붓다는 무엇인가? 이걸 물으려고 읽은 것입니다. 읽은 뒤 제 생각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2. 거칠게 말하면....... 모헨조다로 문명의 주체를 정복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아리안의 사유 체계인 베다. 그 베다적 사유의 有的 기조. 즉 불멸의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생각. 그것은 실제로 인도 사회의 영적 지휘집단인 브라만의 상징이며 그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정통입니다. 붓다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無的 기조를 유지합니다. 無常, 그리고 無我, 그 결절점에 苦. 이 세 가지가 붓다의 진실입니다. 無常도 無我도 브라만의 진실은 아닙니다, 苦는 더더욱 아닙니다. 붓다의 이 가르침은 그러므로 매우 사회정치적입니다. 매우 실천적입니다. 브라만의 카스트를 거부합니다. 평등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는 고대 공화주의의 패러곤입니다! 수드라와 언터처블의 고통을 현안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無常은  현실 삶의 불안입니다. 그들의 無我는 현실 생명의 위태함입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고통을 외면한 그 어떤 교설도 邪道이며, 그 어떤 질문도 無記의 대상일 뿐입니다.  

 

붓다는 스승이지 학자가 아닙니다. 붓다는 땅에서의 삶을 말하지 구름 위의 꿈을 말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실천을 말하지 이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제자들은 스승의 살아 있는 말을 서둘러 죽은 언어로 봉인하여 경전을 만듭니다. 경전은 소수 엘리트, 특히 크샤트리아의 독점 재산이 됩니다.  아뿔싸, 어느덧 불경이 베다가 되고 크샤트리아가 브라만이 됩니다! 하여 경전은 구름위로 올라갑니다. 수드라, 언터처블은 속수무책입니다. 이 흐름이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상좌부와 대중부가 갈리고, 소승과 대승이 갈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가 붓다의 원음을 보존하고 있다는 말은 매우 신중하게 의미부여를 해야 합니다. 붓다의 고구정녕한 가르침을 지켰는지 여부는 초기불교 정체성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 운동을 수행할 때,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붓다의 가르침과 그 실천 구조가 이 땅의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자로서 어찌 하면 바르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하는 내적 질문에 함몰되면 사회동원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사회동원력 문제는 이미 불교가  대승, 소승으로 갈릴 때 물은 바 있는  뼈아픈 질문입니다. 대승이 자신을 그리 부르고 상대방을 소승이라 한 게 100% 악의가 아닌 한, 소승으로 지목된 집단은 역사적으로든, 현안 의식으로든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사회동원력을 지니는 철학적 내용과 종교적 실천을 담보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대승이라 떠들던 너희가 불교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느냐는 식의 책임론은 답이 아닙니다.

 

만일 그 문제에 답변을 내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대로 소승이 맞습니다. 소승이 맞다면 초기불교는 애당초 붓다의 가르침을 구어 전승에서 시작하여 빠알리어 문자로 독점한 크샤트리아 중심의 장로(테라) 집단의 독선적 종교가 맞습니다. 어떤 이들은 초기불교를 테라와다 불교라 하면서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모양이지만 테라와다 불교는 그대로 소승불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테라와다 불교는 재가불자의 깨달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측근에서 가르침을 간수하고 전승시킨 기득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집단적 정체성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한 이상 빠알리어 경전을 강조하면 할수록, 아비담마를 중시하면 할수록 초기불교는 엘리트 불교, 주지주의적 이성 불교, 유명론적 개별자 불교로 남을 가능성은 짙어질 것입니다.  이 위험성은 명백하게 붓다와 반대 방향을 지시합니다. 그러므로, 엄중한 베다 정통성을 거부하고 평등한 생명의 닙바나 공동체를 지향한 것이 붓다의 길이거늘 오늘의 그 제자들은 서로 자신이 붓다의 진정한 계승자라 하면서 스승의 길을 거스르고 있지 않은가, 준렬하게 물어야만 합니다.  

 

대승불교는 적어도 나가르주나 이후 천년 이상 베다적 가치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12세기 이후 이슬람 침공과 맞물리면서  안타깝게도 인도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를 단순화하여 힌두교에 흡수 당해 사라졌다는 식으로 몰아버리면 안 됩니다. 그 과정에서 대승불교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그 연장선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타고 우리에게 다가온 대승불교를 두고 나가르주나는 허무주의다, 대승불교는 힌두교와 습합되었다, 심지어 대승경전은 非佛說이다.......이리 말하는 것은 너무 경솔한 인식입니다. 나가르주나가 붓다의 원음과 다른 용어, 생각을 구사했다 하더라도 이는 논의의 진행과 사유의 심화 과정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사유가 전개된 논쟁적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드러난 텍스트만 보고 쉽게 말하는 것은 피상적인 태도입니다. 옳든 그르든 힌두교는 인도의 무의식입니다. 인도 땅 한복판에서 힌두 무의식을 100% 떨어내고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 불교에 적용되었다고 해서, 가령 너희가 알고 있는 관음보살은 사실상 힌두신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성숙한 태도가 아닙니다. 만일 초기불교가 정말 100% 순수 불교라면 그 환경이 대승불교처럼 정통파 사상체계와 항시 맞대고 싸워야 하는 절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뭐가 순수불교냐 이런 게 아닙니다. 순수불교라면 뭘 해야 하느냐 이런 겁니다.  붓다의 본디 가르침을 알면 그걸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정녕 초기불교가 붓다의 본디 가르침이 맞다면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나라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함께 말해야만 합니다. 스리랑카, 타이, 미얀마....... 거기서 불교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나라들처럼 우리나라에도 초기불교가 왕성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런 생각을 대강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책을 살펴보니 불교철학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에도 저자 자신이 빠알리어 경전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공백이나 불균형이 있을 수 있겠다, 싶더군요.  하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만으로도 필요한 통찰을 주기엔 넉넉하다고 봅니다.

  

3. P. 리꾀르는 사유 진화의 단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1차 소박성(la 1ère naïveté)->비판(la critique)->제2차 소박성(la 2nde naïveté). 저는 이것을 그대로 제1차 초기불교->대승불교->제2차 초기불교로 대치해 보았습니다. 제1차 초기불교는 물론 역사적 초기불교입니다. 말 그대로 소박 불교입니다. 원형 복원, 불가능이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대승불교라는 비판의 단계, 즉 부정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스리랑카 불교일 수 없습니다. 스리랑카 불교에는 원효가 없습니다. 제2차 초기불교는 비판, 즉 대승불교를 안고 가야 합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그게 도저한 현실입니다. 무엇을 비판했는지 다시 직면하면서 통과해야 합니다.  

 

겉 모습이 같다고 해서 제1차 소박성과 제2차 소박성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제2차 소박성은 부정의 부정입니다. 부정의 부정은 한 차원  높아진 긍정, 즉  無碍自在한 선택과 양립의 비결정성, 고졸한 기품입니다. 동그라미 한 개와 선 몇 개로 사람을 그리는 네 살 짜리 꼬마와 장욱진이 다르듯. 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불교 지성과 대중의 진지한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됩니다. 저는 두 가지 정도를 우선 먼저 간절하게 기대해 봅니다.   

 

 (1) 문헌비평 - 불경도 문헌입니다. 시대 상황과 사람의 의도에 따른 수정, 가필, 오류의 가능성은 어디에든 있습니다. 따라서 문헌 비평은 필수입니다. 

 

 (2) 인문사회학적  토대 - 불경만 알겠다고 하는 사람은 불경도 모릅니다. 인간과 사회의 구체적 정황(context)을  읽는 안목을 갖추어야 합니다.  

 

빠알리 경전이든 산스끄리트 경전이든 붓다의 가르침이 맞는지, 그렇다면 그게 어떤 구체적 정황에서 나왔는지, 그렇게 나온 가르침이 사물의 보편적 이치에 맞는지, 결국 오늘 여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것들을 묻지 않는 상태의 모든 신뢰와 주장은 '네 살 짜리 꼬마의 그림'이지 '장욱진의 그림'이 아닙니다. 진실을 현실의 발걸음으로 좇아가려는 사람은 늘 이렇게 물어야만 합니다.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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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3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詩云 伐柯伐柯 其則不遠 執柯以伐柯 睨而視之 猶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 改而止.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 先施之 未能也.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공자는 말씀하셨다. "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니 사람이 도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를 한다고 할 수 없다. <시경>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네. 그 법이 멀지 않네.'라 하니 도끼자루를 가지고 도끼자루를 베면서 곁눈질해 보며 오히려 그것을 멀게 여기나니, 그러므로 군자는 남의 처지에서 남을 다스리다가 고치면 그친다. 忠과 恕는 도에서 벗어남이 멀지 아니하니 자기에게 베풀어서 원하지 아니하는 것이면 또한 남에게 베풀지 아니한다. 군자의 도는 네 가지이니 나는 한 가지도 할 수 없다. 아들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신하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임금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동생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형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벗에게 구하는 것을 먼저 벗에게 베푸는 것을 할 수 없다. 평범한 덕을 행하는 것과 평범한 말을 삼가는 데에 모자람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고 남음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아니한다. 말은 행함을 돌아보고 행함은 말을 돌아보아서 서로 일치하도록 해야 하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아니하겠는가."  

 

2. 군자 위도(爲道)의 참 도량(道場)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사람도 그냥 "평범한(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사람입니다. 앞 장에서 말한 匹夫匹婦의 性을 바탕으로 하여 이제 찬찬히  사람과 사람 관계를 살펴 나아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성찰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드렸듯이 이른바 대가들이 풀어놓은 중용은 지나치게 고답적이고 관념적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중용을 격리시키려는 저의를 가진 것처럼 온갖 현학으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허나 중용은 匹夫匹婦의 性이 발원지이고 거기서 부자, 군신, 형제, 친구 등과 같은 인간관계의 전형으로 자연스레 흘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중용이 어려운 것은 신비한 경지를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보다 나를 앞세우는 탐욕으로 가로막히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소통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남을 관통하려고만 하지 남을 흡수하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용은 남의 자리에 서 보는 것입니다. 남의 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할 바를 먼저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내 마음(忠)이 그대로 '먼저 헤아린 남의 마음(恕)'이어야 중용입니다. 나와 남 사이에 그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야 중용입니다. 내게 필요한 꼭 그것만큼 남에게  필요한 꼭 그것이 서로 유쾌하게 오가야(去來) 중용입니다.  

 

부부가 性을 나눌 때 일어나는 관통과 흡수는 동일한 원리로 부자, 형제, 친구, 군신 관계에 적용됩니다. 대통령의 정치 행위가 부부의 性 행위보다 고급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자잘한 일상사에서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이루어지는 소통이 그대로 중용입니다. 사실은 그 사소함에 마음을 온통 담는 게 어려워 공자는 여기서도 "못하겠다."고 사양합니다.  

 

3. 자연스럽게, 그러므로 공자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흐릅니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을 소통의 "서로 주체"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자신과 마주섬으로써 자신의 그릇을 넓힌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관통과 흡수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모순을 통합하는 역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大同을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언제라도  자신의 어두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웅얼거림에 귀 기울입니다. 군자는 천하를 위해 찰나찰나 자신의 내면을 흔듭니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흔들림으로써 깨어 있는 군자의 영혼은 정확하게 중용의 축을 가리킵니다.  

 

이런 성찰은 남과의 소통에서 온 깨달음입니다. 거꾸로 남과의 소통은 이런 성찰을 통해 더 깊고 넓어집니다. 궁극은 천하무인(天下無人), 즉 타자화 되는 존재가 없는 생명연대입니다. 그런 세상이 올 때까지 군자는 독실함을 생활 기조로 삼아 벗어나지 않습니다. 중용은 결코 자격증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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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2장 본문입니다.  

 

君子之道 費而隱.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能焉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 일개 부부의 어리석은 수준에서도 알 수가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일개 부부의 못난 수준에서도 행할 수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천지가 아무리 커도 사람은 오히려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큰 것을 말하면 천하에 실을 수 있는 것이 없고, 작은 것을 말하면 천하에 쪼갤 수 있는 것이 없다. <시경>에서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거늘 고기는 못에서 뛴다." 하니, 그 위와 아래로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군자의 도는 그 실마리가 부부 사이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땅에 나타난다.  

 

2.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君子之道 費而隱)." <중용>을  최초로 읽었을 때 가장 감동을 받았던 문장입니다. 사실 이 한 문장으로 중용은 끝입니다. 뒤에 따라오는 부연 설명은 사족에 지나지 않지요. 위대한 것과 사소한 것의 차별을 단박에 부수는 압권입니다. 명시적 질서와 암시적 흐름을, 거시 구조와 미시 운동을, 천지 거래와 부부 소통을 한 눈에 꿰뚫는 비수입니다. 대칭과 모순으로 이루어진 우주 이치를 역설로 통합하는 초절정고수의 일식(一息)입니다.    

 

이 말을 色卽是空으로 바꾸면 세존의 깨침이 되고 疎而不漏로 바꾸면 노장의 통찰이 됩니다. 사상의 심오함이나 사유의 자재함에서 공맹(孔孟)이 노석(老釋)에 못 미친다는 말은 통속적 편견일 뿐입니다.  문명에 직접 발 담그지 않는 언어가 문명을 빚어가는 언어보다 영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적 실천을 염두에 둔다면 세련미가 덜한 표현이 동원력 면에서는 더 우월할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중용>의 중용다움은 "압도하되 제압하지 않는" "평범한" 어기(語氣)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용을 설파하는 언어 자체의 중용이 아닐까요? 어눌함에 실린 탄탄함!  

 

3. 사실 費와 隱의 대칭/모순구조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중용>은 우뚝 솟은 텍스트입니다.  그래서 많은 해석가들이 이 영광의 빛 아래서 멈춰 섭니다. 그러나 세계가 대칭/모순구조로 이치를 삼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계는 결코 구조만이 아닙니다. 세계는 운동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운동을 위해 구조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운동은 찰나찰나 대칭구조를 깨뜨림으로써 그 역동성을 유지 확산해 갑니다. 費와 隱의 대칭/모순구조를 역설로 통합한다는  말이 바로 이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費와 隱의 대칭/모순구조를 깨뜨림으로써만이 역설적 통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즉 운동으로서의 세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허다한 지성들이 구조의 신비에만 주목한 것이지요.  

 

이런 오류는 앞서 말씀드린 바, "명사적 독법"에 함몰된 교과서적 '먹물'들이 반성 없이 답습한 해석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중용을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라 읽는 마음결로 여기 "費而隱"을 보면  역시 隱을 동사로 읽으면서 그 방향으로 강조하게 됩니다. 은밀이라는 명사도 아니고 그런 상태를 지시하는 형용사도 아닙니다.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단호한 결단이 전제되는 실천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앞장의  遯世不見知而不悔와  같은 맥락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중용의 도가 실로 위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그 최고의 덕을 실행에 옮기면서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권력으로 삼지 않습니다.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감춤으로써 "평범함"에 깃듭니다. 전 우주적 보편성을 가진, 그래서 편재성을 지닌 위대한 덕이 사소한 일상으로 내려올 때 진정한 중용이 이루어집니다.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는 동사의 의미는 큰 덕을 작은 일의 수행에도 적용한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오래전에 본 영화 <간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중대한 국사를 논의하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양이 다리를 다쳤다며 들어오자 간디는  동일한 진지함을 유지한 채 양 한 마리를 치료하기 위해 아이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납니다. 조국의 독립과 양 한 마리 치료, 이 엄청난 대칭! 간디는 큰 일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감춥니다. 그리 함으로써 위대함과 사소함의 대칭을 일거에 무너뜨립니다. 신약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은 일에 충심을 다한 자가 큰일에도 충심을 다한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費而隱을 명사적 독법으로 읽으면 실천적 의미가 명상 범주로 축소될 뿐만 아니라  올바른 방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야 개인과 사회 모두를 이끄는 실천덕목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게 됩니다. <중용>은 잘난 인간을 위한 처세훈을 설파하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참된 소통을 통해 평등의 원리를 구현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마그나 카르타입니다.  

 

소수의 잘난 인간들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허나 그들은 결코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위해 세상을 망치는 저 오만한 상위 1%의 제후적 독선에 맞서는 견결한 저항전선이 바로 오늘의 중용입니다. 甲男乙女의 겸손한 연대로 대동세상을 일구는 평범무비의 소통이 바로 중용입니다. 그뿐입니다.   

 

4. 그런데 주목할 것은 부부와 성인을 대비시킨 점입니다.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켰다면 아무도 그 자연스러움에 토를 달지 않겠지요. 하필 왜 부부일까요?    

 

뜬금없어 보이지만 사실 匹夫匹婦의 소통이 모든 인간관계 소통의 출발점입니다. 이는 너무나 보편적 진실이라서 오히려 늘 묻혀 지고 말지만  적어도 부부 개념에 앞선 그 어떤 인간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여기 부부 언급은 하등 의아할 게 없습니다.  

 

물론 부부관계의 핵심은 사랑이고 다시 그 사랑의 핵심은 성적인(sexual) 것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성교야말로 인간 존재 자체와 소통의 발원이자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sex)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한자어 중 이 性  자 만큼  위대한 쓰임새도 없을 것입니다.   

 

부부의 성은 이렇게 위대하지만 그 자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실 성적인 수치심이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강하나 성교를 감춤/드러내지 않음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좀 더 내밀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존재와 소통의 시원을 일부러 드러낼 일은  아니지요.  

 

다른 것도 매한가지 입니다. 숨 쉬는 것, 먹고 싸는 것, 잠자고 일어나는 것, 말하고 듣는 것, 이 모든 것이 거룩한 일임에 틀림없지만 아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성교는 이들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므로  더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권력, 돈 , 지식처럼 드러낼 경우 아마도 인간 세상은  파국을 맞게 될 것입니다. 대놓고 性을 권력,  돈, 지식 문제와 결합한다면 가장 잔혹한 억압체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아주 하찮게, 아주 조용히 말하지만 부부는, 부부의 性은 중용의 요체이자 뇌관입니다! 그래서 성인도 알 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경지가 있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5. 가만히 보면 이 장에 또 하나의 개념 顚覆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인과 군자의 구별입니다. 앞장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군자 개념이 성인의 상위 개념입니다. 여기 군자는 중용의 완전성을 전제한 요청적 개념이고 성인은 부부와 대비된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전복은 자못 의미심장한 바 있습니다. 문장의 형식에 따라 내용을 보면 중용이 일개 부부, 즉 匹夫匹婦라도 알고 행할 수 있는 사소한 것부터 성인조차 알고 행하지 못하는 광대한 것까지 포괄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행간의 강조점은 이와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의 이런 이의제기를 뒷받침 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부분입니다. 제12장 전체 문맥에서 보면 매끄럽지 못한, 불쑥 끼어들어간 듯한 느낌을 주는 문장입니다.    

 

군자의 언어를 천지가 감당하지 못한다는 내용인데 사실 중용의 실천적 측면,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보면 원리적으로 황당한 주장입니다. 마치 장자나 불경의 과장된 초거대 담론적 수사를 보는 느낌이 들지요. 이런 이해가 잘못일 가능성을 십분 인정한 상태에서 우리 식 이해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부분을 양보 문장으로 봅니다. 즉,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중용의 이치를 그렇게 추상화, 신비화 할 까닭이 없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매가 날고 땅(못)에는 물고기가 뜁니다. 천지 일은 그냥 그러합니다. 중용 또한 천지간 일일 뿐입니다. 중용의 최고 경지가 신비 차원까지 올라가서 그런 게 아니고 부부의 性처럼 구태여 드러낼 일이 아닌, 그러나, 아니 그래서 정녕 숭고한 것이기 때문에 성인도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성인이라고 이 문제, 즉 性을 더 고상하게 알고 행할 리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중용 또한 이와 같습니다. 아니 바로 군자의 도는  匹夫匹婦의 性, 그 평범하고 사소한 소통으로 영원 회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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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1장 본문입니다.  

 

子曰 索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 君子遵道而行 半途而廢 吾弗能已矣.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唯聖者能之.  

 

공자는  말씀하셨다. "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일은 후세에 칭술함이 있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군자가 길을 따라서 가다가 길을 반쯤 가서 그만두기도 하지만 나는 그만둘 수 없다. 군자는 중용에 의지하므로 숨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하여도 후회하지 아니하니 오직 성인만이 할 수 있다."   

 

2. 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일은 세상에 알려지기 위해 "특별히" 하는 행동입니다. 나아가 그런 행동들로 점철된 삶의 흐름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 권력과 부와 명예가  결합하겠지요. 이런 풍조를 일컬어 "셀러브리티 컬처(celebrity culture)"라 합니다.  

 

무슨 수를 쓰든 일단 "뜨면" 만사형통인 세상이 점입가경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연예계에서나 일어나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떠야" 대통령도 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황색 언론은 물론 주류 언론조차  특정인을 '신'으로 만드는 짓 따위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이미지와 실제 내용의 괴리가 그 어느 때보다 심한 세상입니다. 심지어 그래야 마땅한, 그래서 더욱 조장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뜬" 사람들이 하는 일은 일일이 결단과 업적으로 미화되어 뉴스 첫 머리를 장식하곤 합니다.    

 

그 시대정신은 막강한 힘으로 군림합니다. 무슨 짓으로든 일단 셀러브리티가 되면 단박에 인간적인 품위까지  격상되는 기적(!)을 맛볼 수 있으니 거기에 어찌 사회적 힘이 붙지 않겠습니까? 어떤 젊은 연예인이 (자신이 귀족이라는 의미를 전제하고) 비연예인인 사람들을 "평민"이라 했다니 가히 알 만하지요.  

 

게다가 요즘은 CEO 개념이 탁월한 사람, 저 셀러브리티를 묶는 범주가 되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 대통령을 CEO라 하니 다른 분야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대통령이 국민을 기업 차원의 경영 대상으로 삼는 일이 의미하는 바를 안다면 함부로 할 말이 아닐 텐데도 이미 우리사회는 이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게 "드러나 세상에 알려진" "특별한" 사람들이 조장해낸 생각입니다. 당연한 듯 보이지만 실은 "은벽하고 괴이한" 생각입니다. 처음부터 죄다 잘못된 것은 아닐 테지요. 변화된 맥락을 안중에 두지 않는 "특별함"이 일을 그르치게 한 것입니다.   

 

3. 군자의 한결같은 중용 실천은 맥락의 변화를 유연하게 살피면서 다함없이 이어집니다. 중용의 길을 따라가다가 반쯤에서 그만두는 것은 군자가 행할 바 아닙니다.  아무리 해도 "뜨지" 않자 중용 실천을 그만두는 자는 사이비 군자입니다.    

 

어차피 중용의 도는 "특별한" 프로세스를 구사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습니다. 아니 당최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소통을 통한 평범함의 추구가 중용의 도라면 정작 세상에 알려지는 주체는  대동으로 바뀌는 사회 자신일 것입니다. 군자는 자신을 숨겨 대동 세상 자체를 드러내는 겸손한 자입니다.    

 

앞 다투어 "세상에 알려지는 특별함"을 향해 내달리는 시대를 살면서 아무리 달려도 그 "특별함"에 이르지 못하는 절대다수의 사람이 참 주인인 세상을 꿈꾸며 군자는 표표히 무대 뒤로 몸을 숨깁니다. 그 결단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인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어 세상을 발아래 두는 자가  군자 아니듯이 특별한 부류를 떠받드는 세상 또한 대동이 아닙니다.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탈세, 병역기피, 외도, 주가 조작, 거짓말을 일삼으며 죽기 살기로 "특별함"을 탈취하는 자들이 움직이는 이 反대동 세상에서 평범함을 지키는 길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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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0장 본문입니다.  

 

子路問强 子曰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寬柔以敎 不報無道 南方之强也 君子居之

衽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而强者居之 故君子 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자로가 강한 것에 대해 물었다. 이에 공자는 답하셨다. "남방의 강함인가? 북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너의 강함인가? 너그럽고 부드러운 것으로써 가르치고 무도한 자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이니 군자는 이를 택한다. 창검과 갑옷을 깔고 누워 죽어도 싫어하지 아니함은 북방의 강함이니 너의 강함은 이를 택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조화되지만 흐르지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가운데에 서서 기대지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2. 남방과 북방을 대비한 본문은 아무래도 후대 냄새가 납니다. 물론 고증과 무관한 관견입니다. 남북에서 남은 중원 또는 남송을 가리키는 漢族의 가치와 연결되고 북은 이른바 오랑캐의 가치와 연결되는 암시가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사실이야 어떻든 우리는 본문을 꿰뚫고 내용을  간취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군자는 유연하고 관대한 내면의 덕으로 강함을 삼지 힘으로 밀어 붙이는 외적인 제압으로 강함을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맥락이  서로 닿아서 문득 생각난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선친께서 들려주셨던 김굉집 부자의 일화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널 속이려 한다. 어떻게 그것을 막겠느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첫째, 감히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힘으로 누르는 것이지요. 둘째, 능히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식을 동원하는 것이지요. 셋째, 차마 속이지 못 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힘으로든 지식으로든 다 가능하지만 인격적 승복 때문에 속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지요. 최후의 것이 으뜸입니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로가 추구하는 강함은 춘추전국의 제후적 강함이었습니다. 공자는 그것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눈에는 과연 누가 자로일까요? 시장경제적 자유민주주의 기치를 내건 천민자본주의 헤게모니 블록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너그러움도 부드러움도 없습니다. 무도한 자가 아님에도 자신과 다르면 전광석화처럼 보복을 감행하면서 개혁이라 우깁니다.   

 

하필 왜 강함의  화두가 여기서 나온 것일까요? 우리 관점에서 보면 지당한 흐름입니다. 중용은 강자, 승자의 덕목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강자, 승자의 경직성에서는 결코 소통이 나올 수 없습니다. 소통 없이 "평범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두 평범함에 깃들 때 평등의 원리, 즉 大同이 실현됩니다.  

 

필요악(!)으로서 사회계층구조가 인격의 계층구조가 아님을 깨닫는 지배집단이 아닌 한 그들은 죄다 자로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로의 무리들이 제아무리 누구를 좌경이다, 급진이다 몰아쳐도 자신들이 턱없이 중용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3.  이제 본격적인 중용의 도가 나옵니다. "어울리되 휩쓸리지 않는다.", 또는 "어울리되 벗어나지 않는다."로 읽을 수 있는  和而不流는 아마도 和而不同과 같은 뜻일 것입니다. 개인적 느낌으로는 和而不流가 훨씬 역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제후적 가치, 천민자본주의적 시대정신과 함께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不倚) (우뚝) 서서 벗어나지 않는(中立) 꼿꼿함(矯)이야말로 군자의 강함이라고 갈파합니다. 제 생각으로 중립은 가운데 선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대지 않고 (우뚝) 선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中에 대한 명사적 독법에 반대한다는 지론에 입각한 것입니다.  

 

4.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궁색함(塞)을 얼마든지 벗어나도 될 테지만 찰나찰나 중용의 실천에 깨어 있으려고 늘(不變)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간직하는 것이 군자의 기품입니다. 이 不變은 자기의무로서 결단입니다. 반대로 나라가 어지러울 경우 제후적, 천민자본주의적 가치가 군자를 유혹, 나아가 핍박할 것입니다. 이 때는 결연히(至死)  맞서서 본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습니다. 이 不變은 공적의무로서 저항입니다.   

 

꼿꼿함도 이처럼 時中하는 것입니다. 홀연히 君子豹變이란 <역경>의 말이 떠오르는데 망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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