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
R.뿔리간들라 지음, 이지수 옮김 / 민족사 / 1992년 12월
평점 :
품절


 

1. 저는 개인적으로  전혀 불교와 상관 없이 대칭성의 사유 양식을 탐색하고 연마하는 과정에서 원효에 도달한 특이한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과정의 절정 어름에 초기불교를 만났습니다. 원효로서는 빠알리어 경전을 전혀 대할 수 없었겠지만 초기불교 사상이 원효의 품을 벗어난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금까진.  하지만 좀 더 면밀하게 초기불교 쟁점을 살피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비록 제가 불교적 접근으로 원효를 만나 게 아니지만, 하여 그것을 불교사상이라 이름하지 않지만, 원효가 스스로 젖줄을 댄 샘이 붓다가 맞다면 , 붓다의 가르침을 관통하고 흡수하는 일은 더없이 유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reference의 결을 좇으며 초기불교의 속살로 다가가고 있는데 그 와중에 접했던 여러 가지 담론들이 어떤 공통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초기불교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들이 불교라는 정체성 안에서만, 특히 초기불교 가르침 안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게 붓다의 본디 가르침 맞아?, 그러면 그것으로 끝!, 이런 식이라는 느낌입니다. 非佛說이면 불교와는 상관 없다, 이런 것이지요. 더군다나 그 기준이 매우 逐字的입니다. 같은 뜻이라도 다른 용어를 쓰면 물리칩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지요. 행간을 보지 못하는....... 

 

하여 저는 붓다를 불교 경전과 그 주석서를 통해 이해하는 한편 붓다를 둘러싼 조건,  synchronic한 지평과 diachronic한 맥락을 살피기로 했습니다. 인류가 낳은 최고 지혜가 맞지만 붓다 또한 한 인간입니다. 그에겐 그의 삶의 정황이 있습니다. 문화가 있습니다.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상대적입니다. 그리고 한계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 아무리 붓다라고 해도 그의 가르침은 백과사전도 아니고 완벽한 논리에 터 잡은 철학 교과서도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印度的 사유라는 커다란 조건을 탐색해 볼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 가운데 R. 뿔리간들라의 <인도철학>을 손에 들었습니다.  

 

이 책은 오해 받고 폄훼되는 인도철학의 정수를 compact하게 석명한다는 취지를 담은 듯합니다. 베다에 대한 자세를 중심으로 인도사상 전체를 정통파와 비정통파로 나눕니다. 비정통파를 앞에 배치하고 정통파를 뒤에 배치하여 서술합니다. 그런데 비정통파에서는 불교를, 정통파에서는 베단따를 중심축으로 세웁니다. 두 부분에 대한 내용만으로 책 전체의 절반을 채웁니다. 그리고 뒤에 인도의 시간관과 역사관이란 장을 마련하여 불교사상과 베단따의 일치를 말합니다. 저자의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게 하는 구성이며 내용입니다. 물론 저는 이런 큰 흐름에 주의하려고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 인도적 사유의 전체적 지평과 맥락에서 붓다는 무엇인가? 이걸 물으려고 읽은 것입니다. 읽은 뒤 제 생각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2. 거칠게 말하면....... 모헨조다로 문명의 주체를 정복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아리안의 사유 체계인 베다. 그 베다적 사유의 有的 기조. 즉 불멸의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생각. 그것은 실제로 인도 사회의 영적 지휘집단인 브라만의 상징이며 그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정통입니다. 붓다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無的 기조를 유지합니다. 無常, 그리고 無我, 그 결절점에 苦. 이 세 가지가 붓다의 진실입니다. 無常도 無我도 브라만의 진실은 아닙니다, 苦는 더더욱 아닙니다. 붓다의 이 가르침은 그러므로 매우 사회정치적입니다. 매우 실천적입니다. 브라만의 카스트를 거부합니다. 평등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는 고대 공화주의의 패러곤입니다! 수드라와 언터처블의 고통을 현안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無常은  현실 삶의 불안입니다. 그들의 無我는 현실 생명의 위태함입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고통을 외면한 그 어떤 교설도 邪道이며, 그 어떤 질문도 無記의 대상일 뿐입니다.  

 

붓다는 스승이지 학자가 아닙니다. 붓다는 땅에서의 삶을 말하지 구름 위의 꿈을 말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실천을 말하지 이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제자들은 스승의 살아 있는 말을 서둘러 죽은 언어로 봉인하여 경전을 만듭니다. 경전은 소수 엘리트, 특히 크샤트리아의 독점 재산이 됩니다.  아뿔싸, 어느덧 불경이 베다가 되고 크샤트리아가 브라만이 됩니다! 하여 경전은 구름위로 올라갑니다. 수드라, 언터처블은 속수무책입니다. 이 흐름이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상좌부와 대중부가 갈리고, 소승과 대승이 갈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가 붓다의 원음을 보존하고 있다는 말은 매우 신중하게 의미부여를 해야 합니다. 붓다의 고구정녕한 가르침을 지켰는지 여부는 초기불교 정체성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 운동을 수행할 때,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붓다의 가르침과 그 실천 구조가 이 땅의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자로서 어찌 하면 바르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하는 내적 질문에 함몰되면 사회동원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사회동원력 문제는 이미 불교가  대승, 소승으로 갈릴 때 물은 바 있는  뼈아픈 질문입니다. 대승이 자신을 그리 부르고 상대방을 소승이라 한 게 100% 악의가 아닌 한, 소승으로 지목된 집단은 역사적으로든, 현안 의식으로든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사회동원력을 지니는 철학적 내용과 종교적 실천을 담보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대승이라 떠들던 너희가 불교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느냐는 식의 책임론은 답이 아닙니다.

 

만일 그 문제에 답변을 내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대로 소승이 맞습니다. 소승이 맞다면 초기불교는 애당초 붓다의 가르침을 구어 전승에서 시작하여 빠알리어 문자로 독점한 크샤트리아 중심의 장로(테라) 집단의 독선적 종교가 맞습니다. 어떤 이들은 초기불교를 테라와다 불교라 하면서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모양이지만 테라와다 불교는 그대로 소승불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테라와다 불교는 재가불자의 깨달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측근에서 가르침을 간수하고 전승시킨 기득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집단적 정체성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한 이상 빠알리어 경전을 강조하면 할수록, 아비담마를 중시하면 할수록 초기불교는 엘리트 불교, 주지주의적 이성 불교, 유명론적 개별자 불교로 남을 가능성은 짙어질 것입니다.  이 위험성은 명백하게 붓다와 반대 방향을 지시합니다. 그러므로, 엄중한 베다 정통성을 거부하고 평등한 생명의 닙바나 공동체를 지향한 것이 붓다의 길이거늘 오늘의 그 제자들은 서로 자신이 붓다의 진정한 계승자라 하면서 스승의 길을 거스르고 있지 않은가, 준렬하게 물어야만 합니다.  

 

대승불교는 적어도 나가르주나 이후 천년 이상 베다적 가치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12세기 이후 이슬람 침공과 맞물리면서  안타깝게도 인도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를 단순화하여 힌두교에 흡수 당해 사라졌다는 식으로 몰아버리면 안 됩니다. 그 과정에서 대승불교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그 연장선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타고 우리에게 다가온 대승불교를 두고 나가르주나는 허무주의다, 대승불교는 힌두교와 습합되었다, 심지어 대승경전은 非佛說이다.......이리 말하는 것은 너무 경솔한 인식입니다. 나가르주나가 붓다의 원음과 다른 용어, 생각을 구사했다 하더라도 이는 논의의 진행과 사유의 심화 과정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사유가 전개된 논쟁적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드러난 텍스트만 보고 쉽게 말하는 것은 피상적인 태도입니다. 옳든 그르든 힌두교는 인도의 무의식입니다. 인도 땅 한복판에서 힌두 무의식을 100% 떨어내고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 불교에 적용되었다고 해서, 가령 너희가 알고 있는 관음보살은 사실상 힌두신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성숙한 태도가 아닙니다. 만일 초기불교가 정말 100% 순수 불교라면 그 환경이 대승불교처럼 정통파 사상체계와 항시 맞대고 싸워야 하는 절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뭐가 순수불교냐 이런 게 아닙니다. 순수불교라면 뭘 해야 하느냐 이런 겁니다.  붓다의 본디 가르침을 알면 그걸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정녕 초기불교가 붓다의 본디 가르침이 맞다면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나라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함께 말해야만 합니다. 스리랑카, 타이, 미얀마....... 거기서 불교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나라들처럼 우리나라에도 초기불교가 왕성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런 생각을 대강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책을 살펴보니 불교철학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에도 저자 자신이 빠알리어 경전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공백이나 불균형이 있을 수 있겠다, 싶더군요.  하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만으로도 필요한 통찰을 주기엔 넉넉하다고 봅니다.

  

3. P. 리꾀르는 사유 진화의 단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1차 소박성(la 1ère naïveté)->비판(la critique)->제2차 소박성(la 2nde naïveté). 저는 이것을 그대로 제1차 초기불교->대승불교->제2차 초기불교로 대치해 보았습니다. 제1차 초기불교는 물론 역사적 초기불교입니다. 말 그대로 소박 불교입니다. 원형 복원, 불가능이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대승불교라는 비판의 단계, 즉 부정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스리랑카 불교일 수 없습니다. 스리랑카 불교에는 원효가 없습니다. 제2차 초기불교는 비판, 즉 대승불교를 안고 가야 합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그게 도저한 현실입니다. 무엇을 비판했는지 다시 직면하면서 통과해야 합니다.  

 

겉 모습이 같다고 해서 제1차 소박성과 제2차 소박성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제2차 소박성은 부정의 부정입니다. 부정의 부정은 한 차원  높아진 긍정, 즉  無碍自在한 선택과 양립의 비결정성, 고졸한 기품입니다. 동그라미 한 개와 선 몇 개로 사람을 그리는 네 살 짜리 꼬마와 장욱진이 다르듯. 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불교 지성과 대중의 진지한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됩니다. 저는 두 가지 정도를 우선 먼저 간절하게 기대해 봅니다.   

 

 (1) 문헌비평 - 불경도 문헌입니다. 시대 상황과 사람의 의도에 따른 수정, 가필, 오류의 가능성은 어디에든 있습니다. 따라서 문헌 비평은 필수입니다. 

 

 (2) 인문사회학적  토대 - 불경만 알겠다고 하는 사람은 불경도 모릅니다. 인간과 사회의 구체적 정황(context)을  읽는 안목을 갖추어야 합니다.  

 

빠알리 경전이든 산스끄리트 경전이든 붓다의 가르침이 맞는지, 그렇다면 그게 어떤 구체적 정황에서 나왔는지, 그렇게 나온 가르침이 사물의 보편적 이치에 맞는지, 결국 오늘 여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것들을 묻지 않는 상태의 모든 신뢰와 주장은 '네 살 짜리 꼬마의 그림'이지 '장욱진의 그림'이 아닙니다. 진실을 현실의 발걸음으로 좇아가려는 사람은 늘 이렇게 물어야만 합니다.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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