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지음 / 바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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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 코너로 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다음엔 인문 신간, 그 다음엔 사회 신간, 그리고 철학과 종교를 돌아 마지막으로 한의학, 대략 이런 순서지요. 한의사인데 거꾸로 됐나요?^^   

강남 영풍 시 코너에서 엊그제 이 시집을 보았습니다. 그 동안 분명히 있었을 텐데 제 눈에 이제서야 들어온 것일 테지요. 사실 특히나 시집은 시절인연이 확실히 있는 모양입니다. 남들 다 알고 있는데 혼자만 뒤늦게 살 떨려 하는 게 시에서는 그닥 허물이 안 되는 듯하니 말입니다. 

2. 이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받은 느낌은, 마치 운전 한 몇 년 하면 자신이 운전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운전하게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극적으로 말하면 남의 시가 아닌 내 시를 오랜만에 다시 읽는 것처럼, 어떤 일치감에 실려 흐르듯 읽었다고나 할까....... 아니 좀 더 팽창시킨다면, 팽창시켜서 사실은 좀 더 정확한 표현인데, 하염없이 읽었다는 게 맞습니다.  

보통 남의 시를 읽으면 문 앞에 서기만 해도 스르륵 열리는 경우는 거의 없고, 좀 두드리면 안으로 활짝 열리면서 주인장이 웃음을 띠며 맞아주거나, 드물게는 와락 달려들 듯 밖으로 열리며 꿰뚫고 들어오지요. 그런데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의 경우는 그냥 처음부터 문이 열려 있었다거나, 아예 문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십 편을 그렇게 읽어 내려가다가, 문득,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 이 시인이 나와 같은 묶이의 사람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답으로 떠올랐습니다. 모국어를 통해 드러내는 삶과 세상에 대한 태도, 또는 자세가 같은 게 아닐까?,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요.  

수많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턴가 저는 스스로 식물성 인간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식물적 생명감각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식물에 대한 감수성, 친연성이 남다릅니다. 가령 한의원 개원할 때 축하용으로 받은 난을 비롯한 여러 식물들, 대개 일 년 이내에 죽지요. 제 경우는 오년 지난 아직도 살아 있는 난이 있습니다. 단순히 관리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식물적이어서 제 곁의 식물들과 함께 생명력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게 맞지 싶습니다.  

식물적 생명력의 본령은 "받아들임"입니다. 한 번 뿌리내린 곳에서 그 생을 마쳐야 하므로 삶의 온갖 조건, 이른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동물은 조건을 박차고 옮겨 가면 그만입니다. 식물은 그럴 수 없지요.  

시집의 제목이 된 시에서 시인은 그 "받아들임"의 흐름을 참으로 물처럼 유장하게 풀어냅니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 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채워넣고 

떠나라.

 

밑줄 그은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시가 됩니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 말고 다른 것을 넣어도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핵심 내용인 그 부분을 제외했습니다. 가령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의 마지막 네 행, 

 

....... 

마음속에  한 여자 살고 있네. 

바람이 세차도 날려가지 않는 여자 

그 여자의 마음속에  

나는 없네.   

 

이 처절한 사실도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섭섭함 버리고 생각해보고, 중얼거려보고, 사랑하고, 길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텅 빈 수숫대처럼 온 몸에 바람소릴 채워 넣고 떠나야 합니다. 물론 수숫대는 바람소릴 채울 뿐 떠나진 못하지요. 사람이기에, 사람한테니까 그리 말한 것입니다. 이 떠남은 바람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받아들임"의 절정 아니던가요. 

3. 식물의 생명력은 이렇듯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받아들임"은 속성상 가림이 없습니다. 겨울도 받아들여야 하고 여름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가림 없이 받아들이면 그 생명은 모순으로 차고 넘칩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정확하고도 풍요롭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모순의 공존, 저 도저한 역설의 삶으로 나아가는 자재함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예요, 여기예요, 손짓한 적 있씁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또 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 

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 또한 아득해질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갈망하면서도 왜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사랑은 기다림만큼 더디 오는 법 

다시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갑니다.   

 

기다릴수록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다시 기다림의 삶으로 나아가는 이것. 인생의 비대칭적 대칭.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무애(無碍). 시인은 마침내 식물적 생명감각을 완성합니다. "받아들임"이 공중제비 돌아 "꿰뚫음"과 만나는 뫼비우스 공간, 바로 그 푸른 지평선을 열어제친 것이지요.  

4. 그 경계적 성취는 제게 이런 문학적 풍경화를 건네줍니다. 김재진은 정호승과 마종기의 경계다! 정호승은 수직으로 솟구치고 마종기는 수평에서 떠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김재진은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는 길어도 대부분 연 구분이 없습니다. '설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재진의 생명감각이 그런 것이지요. 길어져도, 심지어 통속적으로 반복해도, 늘어진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반대로 선문답 같이 칼에 베이듯 툭! 떨어지는 말도 's라인'을 그리지 않습니다. 산문과 운문이 서로 누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제가 하염없이 읽어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일은 그의 산문을 읽어보아야겠군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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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스 웨이 - 넬슨 만델라의 삶, 사랑, 용기에 대한 15개의 길
리처드 스텐절 지음, 박영록 옮김, 넬슨 만델라 서문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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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가 누구한테 소개 받았다며 사다 달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다 읽은 뒤 별다른 말이 없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독서 흐름에 약간의 공백이 생겨 그 틈을 메우려고 우연히 집어들었습니다. 

목차를 일별하다가 열 네번째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부분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무슨 내용이 들어있을지 짐작하면서 거기부터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인전이든 회고록이든 남 이야기 잘 안 읽는 제 습관에서 보면 비교적 신속한 결단(!)이었습니다.   

2. 그러나 정작 큰 울림을 느낀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용기를 다룬 제1장 내용과 이미지를 다룬 제5장입니다. 제게는 이 두 장이 한 흐름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용감한 척하면 용감해진다."는 말과 "겉모습은 실체를 구성한다."는 말이 같은 내용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제1장에서 만델라가 "두려운 게 없다고 해서 용기가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세심히 살피지 않으면 진의를 모른 채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두려움 없는 상태는 그냥 미분화된 감정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기는 미분화된 감정 차원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뜻이 그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용기는 마음에 두려움을 지닌 상태에서 몸으로 그 두려움을 떨쳐내는 결단을 요구하는 무엇입니다. "누군가는 용감한 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 말이 근거가 됩니다. 그 필요를 알아차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용기라는 사건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결국 용기는  누군가 지니고 있는 덕목으로서 명사적 존재가 아니라 찰나찰나 결단을 통해 발휘되는  동사적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용감한 척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위선을 떠는 행위가 아니고, 애써 결단을 내리는, 그래서, 분화된, 이성과 의지까지 알아차리는 '고급한 감정' 차원의 행위입니다.  

바로 이런 행위, 즉 "겉모습"이 두려움을 밀어내는 용기의 역동적 "실체"를 구성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진실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고 깨닫고 습관으로 만들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말들의 연결이 전혀 무의미한  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3. 저는 개인적으로 타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 자신의 상처와 punctum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인의 슬픔과 요구, 심지어 공격까지 품어 들이는 흡수의 감수성이 지나치게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흡수의 마음은 용기보다는 관용을 요구합니다. 용기는 강인함, 단단함에 방점이 찍히고 관용은 너그러움, 부드러움에 방점이 찍힙니다.  

용기는 관통하는 힘입니다. 바로 이 "관통"이 제 삶의 긴절한 화두가 되기 시작한 최근의 흐름에서 이 책은 조금 더 구체적인, 한 걸음 더 나아간 도움을  제게 주고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끌어내고 품어 들이는 만큼이나 나의 고통을 드러내고 꿰뚫어 나가는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낄 때, 대체 어찌 하면 그리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고뇌하게  되지요. 

만델라의 길에 이정표가 이렇게 붙어 있습니다. 

"관통력 있는 척하라!" 

또는, 

"관통력 있는 겉모습을 갖추라!" 

4. 일단 이것만으로도 제게 이 책은 그야말로 대박입니다. 그밖에도, 게임은 길다, 사랑은 차이를 만든다, 자기 자신만의 텃밭을 가꿔라, 이 부분도 좋았습니다. 누구든 자기 자신만의 상처와 punctum이 있을 테니 그런 채로 이 책 앞에 서면 맞춤한 울림을 맛볼 수 있겠지요.  

5. 사족. 왜 문학동네가 이 책에 <만델라스 웨이>라는 한글 이름을 달았을까, 궁금하네요. 번역자의 뜻일 수도 있긴 하지만. Mandela's Way를 영어로 읽을 수 없는 독자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없는 바에야 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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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8장 본문입니다.  

 

子曰 愚而好自用 賤而好自專 生乎今之世 反古之道 如此者 及其身者也 非天子 不議禮 不制度 不考文 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誰有其位 苟無其德 不敢作禮樂焉 誰有其德 苟無其位 亦不敢作禮樂焉 子曰吾說夏禮 杞不足徵也 吾學殷禮 有宋 存焉 吾學周禮 今用之 吾從周.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으면서 자기가 쓰이기를 좋아하고, 천하면서 자기가 마음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옛날의 도로 돌아가려고 하면 이와 같은 자는 재해가 그 몸에 미치는 것이다." 천자가 아니면 예를 논하지 아니하고 법도를 제정하지 아니하며 문자를 고정하지 아니한다. 지금 천하의 수레는 궤가 같고 글은 문자가 같고 행위에서는 윤리가 같다. 비록 그 위치에 있으나 진실로 그에 맞는 덕이 없으면 감히 예악을 만들지 못한다. 비록 그에 맞는 덕이 있으나 진실로 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또한 감히 예악을 만들지 못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하(夏)의 예를 말할 수 있으나 기(杞)에서는 증거 삼을 수 없다. 내가 은(殷)의 예를 배웠으니 송(宋)은 그것을 보존하고 있다. 내가 주(周)의 예를 배웠으니 오늘날 그것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나는 周를 따른다."  

 

2. 사리에 맞지 않는(愚) 선택을 하고도 밀어붙이거나(用), 백성의 눈높이를 좇아가지 못하면서도(賤) 소통을 거부하거나(專), 진화를 거듭하면서 달라진 오늘 상황 (今之世)에 눈감은 채 한사코 구시대 가치(古之道)를 고집하는 권력자는 반드시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고 하는 말이기나 한 것처럼 섬뜩합니다. 주제넘고 독선적인 권력자들에게 날린 직격탄입니다.   

 

3. 국가 규범과 질서를 확립하고 공적인 문화 콘텐츠 기조를 짜는 일은 덕을 갖춘 주권자가 할 일입니다. 대의정치에서는 이런 일이 소수 피택자에게 위임되며, 그 정점에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이 있습니다. 전제주의 시절 天子라 이름 한  절대권력자든 오늘날 대통령이든 그 정상의 위치만으로는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정당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덕이라 합니다.   

 

<중용>의 맥락에서 말하는 덕은 당연히 중용의 실천력일 것입니다. 중용은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쌍방향 소통으로 온 생명이 평등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집단적 실천입니다. 그리고 그 중용의 깃발로서 천자도 대통령도 존재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중용에 반한다면 천자도 대통령도 무의미한 존재일 따름입니다.  그 무의미성은 위임의 철회로 현실화됩니다. 주권자가 직접 집단 중용을 빚어가기 시작했다면 상황 변화는 질적으로 아주 가파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재앙(烖)을 맞는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4. 夏禮든, 殷禮든, 周禮든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시중(時中)하여 오늘 쓰기에(今用) 합당한가, 따를만한가(從), 그것이 판단 기준입니다. 오늘을 사는 백성의 의중과 상관없는 가치는 그것을 진리라 하든, 과학이라 하든, 국위라 하든, 특정 세력이 주려 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는 주권자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이미 그 부분에서 위임 한계를 일탈한 이상 피위임자는 권한이 정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용의 기수, 주권자의 대표단수인 공자가 잘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그것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나는 周를 따른다(今用之 吾從周)."  

 

5. 여기 周는 이 땅의 평범한 백성입니다. 그 주권자의 뜻입니다. 그 뜻을 거스르며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우매한 짓이 목하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夏禮일까요, 殷禮일까요? 참으로 부끄럽고 슬픕니다. 온갖 거짓말과 부정부패, 그리고 삼류 정치 쇼로 떡칠이 된 이 지배집단한테서 무슨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럼에도 이른바 진보정치학계의 좌장으로 불리는 사람이 최근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있는 한 오늘의 상황을 민주주의 위기라 볼 수 없다."  

 

세상에나! 수천 년 전 공자의 탄식이 오늘 그대로 우리 귓전을 때리고 있는데 듣는 자가 없습니다........오호, 단장애재(斷腸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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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7장 본문입니다.  

 

大哉. 聖人之道. 洋洋乎發育萬物 峻極于天. 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待其人而後行. 故 曰苟不至德 至道不凝焉. 故 君子 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而崇禮. 是故 居上不驕 居下不倍. 國有道 其言 足以興 國無道 其默 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  

 

크도다. 성인의 도여. 양양하게 만물을 발육하여 그 높음이 하늘에 닿았다. 넉넉하고 크도다. 예의 삼백 가지와 위의 삼천 가지가 그 사람을 기다린 후에 행해진다. 그러므로 "진실로 지극한 덕으로 하지 아니하면 지극한 도는 실행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며 광대함을 이루어 정미함을 다하고 고명함을 극도로 하여 중용을 실천하며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며 돈후함으로써 예를 숭앙한다. 이 때문에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배반하지 아니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그 말로써 그 몸을 일으킬 수 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그 침묵이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이미 밝고 또한 어진 것으로써 그 몸을 보존한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2. 전체적으로 대구(對句)를 통해 속뜻을 전달하려는 형식을 취한 장입니다. 하지만 對句가 그리 치밀하지 않고 일관성을 잃은 듯한 메시지가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많은 해석이 두루뭉술한 순접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對句의 속살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문맥에 일관된 흐름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3. 우선 성인의 도와 예의, 위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 仁과 禮의 관계와 같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군자의 도는 이상형으로서 어떤 실체(substance)처럼 인식되고 예의, 위의는 실천 과정처럼 인식됩니다. 이는 후대 주희의 체용(體用) 대비와 맞물리는 것이겠지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무리 위대한 성인의 도라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실천 없이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4. 이런 빛에서 그 아래 문장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며 광대함을 이루어 정미함을 다하고 고명함을 극도로 하여 중용을 실천하며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며 돈후함으로써 예를 숭앙한다(故 君子 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而崇禮)."   

 

하지만 어조사 이(而)를 앞뒤로 해서 배치된 말의 내용이 누가 봐도 상반된 것인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접으로 처리해서 대구를 통한 강조 의도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덕성이 존귀하게 되고,  넓고 큰 경지에 이르고, 높고 빛남이 극에 달하고, 이미 갖추어진 옛것을 익히고, 돈후한 것은 이상적이고 당위적인 경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묻고 배우며, 사소한 것까지 곡진히 살피며, 평범함에서 어긋나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알아 나아가며, 예법을 지키는 것은 부단한 닦음, 깨어 있는 실천 감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인의 도란 찰나찰나 치열한 실천 과정으로 증명되는 것이지 관념적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반적 대구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각각 而 뒤에 오는 말이 더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溫故而知新! 이 말은 이미 溫故에 무게가 실린 채 그 의미가 정착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순접으로 읽은 데서 비롯한 오류입니다.   

 

성인의 도가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완성된 실체적 존재로 관념화, 박제화 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 바로 溫故而知新입니다. 물론 순 임금과 같은 성인의 이상형이 실존했다는 전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순 임금은 순 임금 자신의 실천을 한 것뿐입니다. 그 예를 본받되 우리는 우리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게 知新입니다. 바로 그 知新이 관건입니다. 성인은 각자 자신의 성인입니다!  

 

그러므로 늘 묻고(問) 배우고(學) 사소한 것까지 곡진히 살피고(盡精微) 평범함에서 어긋나지 않고(中庸) 세세한 예법 하나까지 지키는(崇禮) 치열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이기도 하고 자긍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도를 적확하고 치열하게 실천하면서도 자랑하지 않으니 겸손이요, 비록 성인이란 자의식은 한사코 내려놓지만 당당하게 평범함에 깃드니 자긍입니다.  

 

5.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배반하지 아니한다(居上不驕 居下不倍)"는 말이 바로 겸손과 자긍을 역설의 연금술로 달여 낸 것입니다. 다만 저는 배(倍)의 뜻을 달리 새깁니다. 윗사람의 교만과 아랫사람의 배반은 썩 어울리는 대칭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倍는 비속하다, 더 나아가 비굴하다는 뜻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교만과 대립항이 될 수 있습니다.  

 

6. 국유도(國有道) 이하 문장 역시 종래의 읽기를 답습하면 전체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그 말로써 그 몸을 일으킬 수 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그 침묵이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이미 밝고 또한 어진 것으로써 그 몸을 보존한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國有道 其言 足以興 國無道 其默 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리 읽으면 아무리 되새김질해도 제10장에서 말한 바,  "나라에 도가 있으면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드러내어 말함으로써 더욱 분발하게(興) 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알고 있음에도 덮어주어(容) 장차 바른 길로 나올 여지를 남겨둔다."  

 

이런 해석은 제6장에 나온 순 임금의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는(隱惡而揚善)" 실천과 일치하기 때문에 타당성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문장이 제26장 말미에 오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7. 정국이 혼미할 때 흔히 원로들에게 자문(諮問)합니다. 원로란 무엇입니까? 중용 텍스트 안에서 순 임금과 같은 존재입니다. 순 임금이라는 사표를 통해 공자의 중용 실천이 현안이 되듯 원로들은 오늘 우리 현안에서 중용을 실천하는 사표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여태껏 우리 현대 정치사에 등장한 원로들 면면을 보면 대개 이와는 동떨어진 인사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권력자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불러들인 까닭이지요. 그들을 어찌 순이라 할 것입니까?    

 

그러면 누가 순 임금입니까? 정녕 이 나라에 원로다운 원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자의 눈에 그 원로들은 불순세력 아니면 사탄의 무리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이니 모셔질 리 없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보면 이 땅에 살아 있는 순 임금은 오직 백성뿐입니다. 무슨 욕을 먹어도 묵묵히 제 삶을 지키는 이름 없는 백성, 그 숭고한 익명성이야말로 중용 실천의 사표이자 실현입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도리 없는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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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6장 세 번째(마지막) 문단입니다. 

詩云維天之命 於穆不已 蓋曰天之所以爲天也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蓋曰文王之 所以爲文也 純亦不已.  

 

<시경>에 이르기를, "오직 하늘의 명은, 아아 충실하여 그침이 없도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말한 것이고, "아아 뚜렷하게 나타나지 아니하는가, 문왕의 덕의 순일함이여!"라고 하였으니 대개 문왕이 문(文)이 된 까닭을 말한 것이다. 순일하고 또한 그치지 아니함이다.    

 

2. 목(穆)의 뜻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누구는 미(美)다, 누구는 심원(深遠)이다, 누구는 충실(充實)이다,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문맥에 답이 있습니다. 이 문단 전체의 맥으로 보아 穆도 純도 不已로 귀착된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不已는 제26장 전체 문맥에서 不息 또는 無息과 같은 의미군을 형성합니다.   

 

무엇이라 표현하든 온전한 도리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며 과정이기 때문에 수단화되어서도 안 되고, 결과적 상징물로 모셔져도 안 된다는 원칙을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 문맥에서 그 온전한 도리는 至誠이며 다른 표현은 至誠의 변주(variation)입니다. 결국 至誠不息 愈久無疆의  빛 아래서  부분적 이해를 조절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穆은 至誠의 범주와 동떨어질 수 없는 말입니다. 充實이란 뜻으로 읽는 게 비교적 타당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그냥 誠이라고 하지 않은 까닭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誠은 誠이되 사물의 이치를 가없이 맑게 드러내는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뒤에 文 임금의 덕을 純이라 한 것과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3. 文 임금 덕은 순수함입니다.  그의 정치적 실천은 하나하나 그 자체로 목적이므로 무슨 이득을 위한 수단이 아니어서 순수합니다. 백성과 온전히 소통하므로 그 기품이 투명하게 드러나서 순수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 不已입니다.  

 

4. 맑고(穆) 순수한(純) 소통이 끊임없이(不已) 넘실거리는 사회를 만드는 게 정치의 본령이자 목표입니다. 물론 정치 현실에서는 제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구사하는 권모술수와 이전투구가 불가피하게 나타나겠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사회의 정치를 보면 전자는 없고 후자만 준동하고 있습니다.   

 

감사원장 후보였던 사람이 사퇴하면서 뱉어낸 말들을 들어보면 그 부류 사람들은 대다수 시민과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기야 그들은 대다수 시민을 천한 쌍것으로 여기니 소통이란 개념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겠지요. 그런데 그런 고귀하신 분들께서 이토록 천한 쌍것들을 국민이라 이름 하면서 존숭의 제스처를 취하니 도대체 민주주의란 얼마나 알량한 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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