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 세계에 유례없이 국립대학교(인 서울대학교)가 원톱으로 부동 군림하는 고등교육 지정학이야말로 대한민국 상징적인 부역 풍경이다. 그 아래 자리 잡은 사학 가운데 실팍한 부역 서사를 지니는 몇몇 대학교 이야기를 해본다.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지닌 홍익대학교부터 시작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학교는 대종교 단군 신앙에 근원을 둔 민족주의 이념-홍익인간 이화세계-으로 해방 직후 세워졌다. 해방 직후 정치 공간은 민족주의 진영 주축이었던 홍익대학교가 반공주의·공산주의 모두에게 소외당하는 상황을 낳았고, 학교와 재단 소유는 물론 교육 이념마저 흔들리고 왜곡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49년 백범 김구 암살은 민족주의 진영에게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를 반민족주의 세력이 민족주의 진영에 가한 쿠데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대종교 총전교였으며, 홍익대학교 초대 이사장이었던 이흥수의 손자 이주혁). 이어서 1950년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을 일으킨 이승만 부역 정권은 홍익대 주요 인물들을 빨갱이로 몰아 축출했다. 한국동란이 발발하고 이들이 입북하거나 납북되면서 홍익대는 거점을 거의 다 상실했다. 전후 학교 상황이 더 어려워지자 그 틈새를 자유당 이도영과 그 세력이 파고들어서 학교를 접수하고 본디 대종교와 이흥수를 역사에서마저 도려내기 시작했다. 박정희 집권 이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저들이 조선총독부 마지막 학무국장이었던 특권층 부역자 엄상섭을 이사로 밀어 넣으면서 학교는 민족 자주에서 친일 부역으로 본성을 바꿔버리고 말았다.(이상 내용 출처: 프레시안) 한참 뒤 홍대 재학생 김승구에게서 우연히 촉발한 역사 되찾기 투쟁이 어느 정도 열매를 맺기는 했지만, 여전히 홍익대학교는 특권층 부역자 손아귀에 있다. 저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여태껏 저질러 온 짓이 있는 한,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경희대학교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이 학교는 본디 우당 이회영 6형제가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모체로 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3,900명 졸업생을 키워내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청산리 전투 김좌진 장군도 이 학교에서 배웠다고 한다. 해방 후 6형제 중 홀로 살아남은 성재 이시영이 신흥전문학원으로 계승하고 나중에 신흥대학까지 나아갔다. 한국전쟁으로 운영이 어려운 틈을 타서 자유당 쪽 인물인 조영식이 접수하면서 재단과 학교 이름 모두를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다. 조영식은 물론 그 아들 조정원도 경희대학교 역사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역사를 되살리고자 하는 여러 노력에 계속 묵묵부답이다. 이유를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누구나 그 주장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민족사학” 고려대학교. 그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본디 이용익(대한제국 탁지부 대신)이 설립했다. 보성이라는 이름을 고종황제가 직접 하사하고 황실 내탕금을 지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민족적 인재를 양성하는 데 설립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이용익은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교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 뒤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천도교 손병희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김성수가 인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김성수가 시작하고부터는 그 후손이 대를 이어가며 고려대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학교 이사장은 그대로 동아일보 회장이다. 말하자면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는 하나다. 김성수가 특권층 부역자였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상황에서 동아일보 사주가 점하는 사회정치적 위상을 보면 고려대학교를 어떻게 경영할지, 그렇게 경영되는 학교를 단칼에 ‘민족사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국민대학교 이야기도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 전형에 해당한다. 아래 내용은 뉴스타파(2019.7.25.) 박중석 <족벌 사학과 세습⑧> 일부를 그대로 가져왔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대한민국 대학 역사에서 국민대학교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립대학이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이 건립을 주도했다. 국민대학교 설립 기성회가 결성됐는데, 고문에는 백범 김구와 김규식, 명예회장은 조소앙, 회장에는 신익희가 선임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국민대학 설립을 미군정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해방 조국에서 임시정부의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키울 교육기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배움을 주지 못해 한으로 남았던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함도 담겨 있었다.
교사 터와 시설을 불하받지 못하는 등 당시 미군정청의 비협조에도 국민대학교는 1946년 9월 문을 열었다. 신익희가 초대 학장과 이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신익희가 물러나고, 반민특위가 좌절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국민대는 이승만의 비호 속에 친일 세력이 득세하면서 서서히 변질하기 시작했다. 총독부 관료 등 친일 인사들이 잇달아 학장 자리를 차지했다.
초대 학장 신익희가 물러난 국민대에는 친일 전력을 지닌 이들이 총장과 이사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2대 학장, 박이순은 일제강점기 군수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그는 국방헌금, 애국기 헌납자금 모금 등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1938년 5월 박이순은 황국신민으로서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독려하는 기고문을 썼다.
4대 학장 최문경도 일제 강점기 군수 출신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아버지 최연국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최문경은 박정희 정권에서도 잘나갔다. 외무부 차관과 대사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독립운동가에게 중형을 내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일제 판사 김세완도 국민대 학장과 이사장이 됐다.
독재에 부역했던 이들도 국민대 총장과 이사장을 꿰찼다. 1984년부터 4년 동안 국민대 3대 총장을 지낸 정일영은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유신정우회 의원을 두 차례 지냈다.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국보위 위원에 참여한 정범석은 그 이듬해 국민대 초대 총장에 올랐다. 박정희 정권 때 장관과 부총리를 거쳐, 전두환 정권에서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는 등 줄곧 군사독재에 부역했던 신현확도 4년 동안 국민대 이사장을 맡았다.
현재 국민대 이사장은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의 손자다.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국민대학을 친일 반민족 행위자와 독재 부역자들이 지배하다가, 이제는 재벌 후손이 쥐고 있다.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전문위원)는 말한다, “언젠가는 임시정부가 지향했던 대학을 만들지 못한 일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사립대학 부역 이야기를 이 정도에서 접는다. 그야말로 빙산 일각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대한민국 사립대학은 썩은 부분을 도려내면 먹을 만한 과일이 아니라 통째로 버려야 할 썩은 과일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는지 나로서는 아득하다. 끝내 해결은 되지 않고 적정한 해소만이 답일까. 참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