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립 중·고등학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2023424일 이전까지 불렸던 어느 중·고등학교 학교 교가 가사를 보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왜 그런지 단박에 알 수 있다.

 

먼동이 트이니 온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 강산에 원석 두 님이 나셔서

배움 길 여시니 크신 공덕 가이 없네

성남 성남 우리 모교 무궁탄탄할지어다

 

가사 중 원석 두 님은 설립자 김석원과 원윤수 두 사람을 가리킨다. 이 두 사람이 설립한 학교가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성남중·고등학교다. 김석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군인으로서 원윤수는 사업가로서 일제에 부역한 대표적 특권층이다. ‘일제 치하에서 광복의 원동력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한 민족학교 설립이라고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육군사관학교(일제) 준비 학교 특성을 위해 설립한 학교가 바로 성남중·고등학교다. [출처: 고발뉴스닷컴]

 

오늘날 성남중·고등학교는 어떤 은폐를 시도하고 있을까? 2023424일 새로운 교가를 제정해서 발표했다. 곡은 그대로 두고 가사만 바꾸었는데, 2절 가사는 이렇다.

 

의에 살고 의에 죽는 자랑스런 성남인

삼일칠의 정신 받아 자라나는 우리들

세우자 새 역사를 주인공은 우리들이다

성남 성남 우리 모교 무궁탄탄할지어다

 

의에 살고 의에 죽자는 교훈으로서 충무공 정신을 계승한다고 주장한다. “삼일칠 정신19600317일 성남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3.15 부정선거 규탄 의거를 기린다고 한다.

 

2023424일 성남중·고등학교가 벌였던 또 다른 행사가 있다. 1942년 만세운동을 펼쳤던 재학생 윤병운 외 7명을 기리는 <항일독립운동 공적비>를 교내 3·17민주공원 내 <3·17민주의거기념탑> 옆에 세웠다. 원승욱(원윤수 손자) 학교 법인 이사장은 의에 살고 의에 죽자는 교훈이 바로 독립투사 이분들이셨다.”라고 기염을 토했다.

 

충무공 정신이든 삼일칠 정신이든 항일독립운동 정신이든 설혹 가감 없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김석원과 원윤수가 특권층 부역자로서 그에 부합하는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 근원을 지울 수는 없다. 부분을 전부인 듯 말하는 협잡이 바로 전형적인 가짜 뉴스다. 특권층 부역 세력은 곳곳마다 깨알같이 이런 짓을 벌여서 역사를 희화하고 사회를 흑화한다.

 

이런 현장이 어디 성남중·고등학교뿐이겠는가. 중앙여중·고등학교(황신덕), 성신여중·고등학교(이숙종), 광신중·고등학교(박흥식), 영훈중·고등학교(김영훈), 휘문중·고등학교(민영휘), 풍문여중·고등학교(민영휘 증손 덕기), 상명중·고등학교(배상명), 화곡중·고등학교(나채성-나경원 아버지), 용문중·고등학교(김문희-김무성 누나)···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사학을 특권층 부역 집단 돈으로 세웠거나 접수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학은 식민지 시대에는 부역 행위 일환이었고, 대한민국 초기에는 신분 세탁과 세금 포탈 통로로 활용돼 특권층 부역 집단이 쌓아 놓은 기득권을 지키는 데 거의 독보적 수단이었다. 학교는 말할 필요조차 없고 교사, 학생, 심지어 학부모까지 부역과 수구 정신으로 물들게 하는 가장 강력한 채널로 작동해왔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부역 사학 그 본진은 결국 사립 중·고등학교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 있는 한 엄밀한 의미에서 공교육이란 이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라는 세대에게 참된 민주주의를 기대할 바도 아니다. 국토 전반에 걸쳐 똬리 틀고 검은 네트워킹하는 이 사악한 사학재단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영원한 식민지로 재생산해내는 자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000m 넘는 용문산을 마지막으로 산행에 해당하는 숲 걷기를 멈춘다. 더 가면 내가 숲에 들고나는 목적과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홀가분하게 다녀올 수 있는 길을 고른다.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까치 능선까지 간 다음, 생태 다리 두 개로 관악산과 연결해 놓은 길을 따라 숲 깊숙이 들어간다.



걷기 쉬운데다가 계곡 물소리가 들려 좋기는 한데 시끄럽다. 산악회 무리가 지나가면서 숲 전체를 흔들어댄다. 날카로운 영남 사투리는 특히나 귀에 거슬린다. 서둘러 능선에 올라 얼마쯤 걷다가 마당 바위를 지나자마자 길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되지 않는 소로로 접어든다. 얼마 가지 않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래, 이런 숲이어야 한다! 사위가 고요에 잠기자 비로소 내 몸과 공생하는 미소 생명들이 숲 생명들과 나누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살짝씩 길을 잃어가며 걷는데 물소리가 들려온다. 홀린 듯 다가가 물과 놀며 옮아가다 보니 또 길이 아니다. 애써 길을 찾고는 다시 물에 홀린다. 손 넣어 만지고, 한 움큼 떠먹고, 야릇한 충동에 휘감기며 이리저리 물길을 감듯 넘나들며 계곡을 내려온다.



인적 없는 상태로 한참 내려오다가 홀연 인기척을 느낀다. 나뭇가지에 가려져 있다 모습을 드러낸 인상 좋은 남자 사람 하나가 개울 건너편 바위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눈길이 마주치자 그가 묻는다. “정상 쪽에서 내려오시는 길입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가 말한다. “대단하시네요!” 그 흔한 등산화조차 신지 않고 평상복 차림으로 산 타는 늙은이 모습을 보고 그리 말했으리라. 내가 말한다. “이 길 너무 좋습니다.” 그가 답한다. “여기가 관악산 속 지리산입니다. 아는 사람 거의 없지요.” 과연 그렇다 싶다. 인사를 나누고 조금 내려오니 제법 낙차 있는 폭포가 기다린다. 거기서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울대 학생 생활관이 있다. 학생들이 관악산 속 지리산을 알면 좋으련만.

 

먼발치에서나마 강감찬 사당 향해 합장하고 식당을 찾는다. 한참 돌다가 비교적 큰 골목에 왜 보지 못했을까 싶게 떡하니 있는 추어탕집으로 들어간다. 어이쿠, 여기도 영남 사투리가 점령하고 있다. 물경 개신교도다. 여남은 명 앉아 큰 소리로 식사 기도하고 큰 소리로 정치 얘기한다. 나는 애먼 막걸리 맛이나 탓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 전 세계에 유례없이 국립대학교(인 서울대학교)가 원톱으로 부동 군림하는 고등교육 지정학이야말로 대한민국 상징적인 부역 풍경이다. 그 아래 자리 잡은 사학 가운데 실팍한 부역 서사를 지니는 몇몇 대학교 이야기를 해본다.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지닌 홍익대학교부터 시작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학교는 대종교 단군 신앙에 근원을 둔 민족주의 이념-홍익인간 이화세계-으로 해방 직후 세워졌다. 해방 직후 정치 공간은 민족주의 진영 주축이었던 홍익대학교가 반공주의·공산주의 모두에게 소외당하는 상황을 낳았고, 학교와 재단 소유는 물론 교육 이념마저 흔들리고 왜곡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49년 백범 김구 암살은 민족주의 진영에게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를 반민족주의 세력이 민족주의 진영에 가한 쿠데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대종교 총전교였으며, 홍익대학교 초대 이사장이었던 이흥수의 손자 이주혁). 이어서 1950년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을 일으킨 이승만 부역 정권은 홍익대 주요 인물들을 빨갱이로 몰아 축출했다. 한국동란이 발발하고 이들이 입북하거나 납북되면서 홍익대는 거점을 거의 다 상실했다. 전후 학교 상황이 더 어려워지자 그 틈새를 자유당 이도영과 그 세력이 파고들어서 학교를 접수하고 본디 대종교와 이흥수를 역사에서마저 도려내기 시작했다. 박정희 집권 이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저들이 조선총독부 마지막 학무국장이었던 특권층 부역자 엄상섭을 이사로 밀어 넣으면서 학교는 민족 자주에서 친일 부역으로 본성을 바꿔버리고 말았다.(이상 내용 출처: 프레시안) 한참 뒤 홍대 재학생 김승구에게서 우연히 촉발한 역사 되찾기 투쟁이 어느 정도 열매를 맺기는 했지만, 여전히 홍익대학교는 특권층 부역자 손아귀에 있다. 저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여태껏 저질러 온 짓이 있는 한,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경희대학교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이 학교는 본디 우당 이회영 6형제가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모체로 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3,900명 졸업생을 키워내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청산리 전투 김좌진 장군도 이 학교에서 배웠다고 한다. 해방 후 6형제 중 홀로 살아남은 성재 이시영이 신흥전문학원으로 계승하고 나중에 신흥대학까지 나아갔다. 한국전쟁으로 운영이 어려운 틈을 타서 자유당 쪽 인물인 조영식이 접수하면서 재단과 학교 이름 모두를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다. 조영식은 물론 그 아들 조정원도 경희대학교 역사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역사를 되살리고자 하는 여러 노력에 계속 묵묵부답이다. 이유를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누구나 그 주장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민족사학고려대학교. 그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본디 이용익(대한제국 탁지부 대신)이 설립했다. 보성이라는 이름을 고종황제가 직접 하사하고 황실 내탕금을 지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민족적 인재를 양성하는 데 설립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이용익은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교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 뒤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천도교 손병희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김성수가 인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김성수가 시작하고부터는 그 후손이 대를 이어가며 고려대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학교 이사장은 그대로 동아일보 회장이다. 말하자면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는 하나다. 김성수가 특권층 부역자였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상황에서 동아일보 사주가 점하는 사회정치적 위상을 보면 고려대학교를 어떻게 경영할지, 그렇게 경영되는 학교를 단칼에 민족사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국민대학교 이야기도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 전형에 해당한다. 아래 내용은 뉴스타파(2019.7.25.) 박중석 <족벌 사학과 세습> 일부를 그대로 가져왔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대한민국 대학 역사에서 국민대학교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립대학이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이 건립을 주도했다. 국민대학교 설립 기성회가 결성됐는데, 고문에는 백범 김구와 김규식, 명예회장은 조소앙, 회장에는 신익희가 선임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11월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국민대학 설립을 미군정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해방 조국에서 임시정부의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키울 교육기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배움을 주지 못해 한으로 남았던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함도 담겨 있었다.

 

교사 터와 시설을 불하받지 못하는 등 당시 미군정청의 비협조에도 국민대학교는 19469월 문을 열었다. 신익희가 초대 학장과 이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신익희가 물러나고, 반민특위가 좌절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국민대는 이승만의 비호 속에 친일 세력이 득세하면서 서서히 변질하기 시작했다. 총독부 관료 등 친일 인사들이 잇달아 학장 자리를 차지했다.

 

초대 학장 신익희가 물러난 국민대에는 친일 전력을 지닌 이들이 총장과 이사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2대 학장, 박이순은 일제강점기 군수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그는 국방헌금, 애국기 헌납자금 모금 등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19385월 박이순은 황국신민으로서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독려하는 기고문을 썼다.

 

4대 학장 최문경도 일제 강점기 군수 출신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아버지 최연국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최문경은 박정희 정권에서도 잘나갔다. 외무부 차관과 대사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독립운동가에게 중형을 내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일제 판사 김세완도 국민대 학장과 이사장이 됐다.

 

독재에 부역했던 이들도 국민대 총장과 이사장을 꿰찼다. 1984년부터 4년 동안 국민대 3대 총장을 지낸 정일영은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유신정우회 의원을 두 차례 지냈다.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국보위 위원에 참여한 정범석은 그 이듬해 국민대 초대 총장에 올랐다. 박정희 정권 때 장관과 부총리를 거쳐, 전두환 정권에서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는 등 줄곧 군사독재에 부역했던 신현확도 4년 동안 국민대 이사장을 맡았다.

 

현재 국민대 이사장은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의 손자다.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국민대학을 친일 반민족 행위자와 독재 부역자들이 지배하다가, 이제는 재벌 후손이 쥐고 있다.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전문위원)는 말한다, “언젠가는 임시정부가 지향했던 대학을 만들지 못한 일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사립대학 부역 이야기를 이 정도에서 접는다. 그야말로 빙산 일각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대한민국 사립대학은 썩은 부분을 도려내면 먹을 만한 과일이 아니라 통째로 버려야 할 썩은 과일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는지 나로서는 아득하다. 끝내 해결은 되지 않고 적정한 해소만이 답일까. 참담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경성제국대학과 그 연장선인 서울대학교 인맥이 말글 부역에서 근본적 장악력을 행사한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서사를 교육기관, 교육자, 그 이전 교육 문제로 소급해가며 전개하도록 안내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문 다음에 기본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교육이므로 여기가 이야기할 바른 자리다. 교육기관 문제는 서울대학교를 필두로, 사립대학교, 중고등학교, 초등학교, 유치원까지 사학 집단을 이야기한다. 교육자 문제는 그 교육기관을 형성하고 소유하며 교육행위를 하는 부역자를 이야기한다. 교육 문제는 식민지 시절과 그 이후 부역자가 받은 제국 교육, 그리고 그들이 주도하는 현재 대한민국 교육 내용을 이야기한다.

 

1. 경성제국대학은 태생부터 음모였다. 큰 취지는 물론 세부 구성까지 식민지 교육에 적합하도록 기획한 교육 조직이다. 법문학부와 의학부만으로 출범하고 조선인 입학을 제한한 사실이 그 증거다. 전쟁에 유용하다고 판단해 뒤늦게 이공학부를 개설했으나 조선인 입학은 더욱 엄격히 제한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정이 이양해 경성대학으로 바꿨다가 1946년 서울대학교를 설립하면서 통합했다. 바로 이 대목이 결정적 문제다. 일제 부역자를 청산하기는커녕 그대로 흡수해 오늘날 서울대학교를 이 꼴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가 명실상부한 국립대학교이기 위해서는 경성제국대학교와 연을 끊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분야에서 이런 논쟁이 일어나듯, 경성제국대학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부역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험한 시절 대체 누가 무슨 능력-재력, 일본어 입시에 합격할 학습력-으로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실한 부역자 자녀 아니면 입학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하는 말도 사실이어야 한다. 20년 남짓 시간에 배출한 810여 명 졸업자가 고급 엘리트로서 그 뒤 어떤 지위를 누리며 살았고, 그 후손은 현재 어떠한지,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부역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저들 대부분을 부역 서사에서 제외할 이유란 없다고 본다.

 

오늘 여기서 서울대학교를 생각해본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이 나라를 통치할 무렵 육서당이란 말이 널리 떠돌았다.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 출신들이 나라를 쥐고 흔든다는 일차적 의미 뒤에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지금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없이 서울대학교, 특히 법대 출신만으로 두 의미 모두를 충족하고도 남는다. 저들은 경성제국대학 나와 부역하던 부조 또는 선배와 똑같은 의식 속에 있다. 저들은 정치적 보수 또는 극우 세력이 아니라 그냥 단세포적 부역 세력일 뿐이다. 단세포적 지식분자는 미망이다. 서울대학교 세계 순위(56)가 싱가포르국립대학(19)에도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제 사회 각 분야 이야기로 넘어간다. 사실 이 이야기만큼 중요한 무엇은 없다. 우리가 선 땅을 온전히 한 바퀴 돌면서 지평선을 응시해 눈앞에 어떻게 부역 온 풍경이 낱낱이 그 얼굴을 드러내는지 봐야만 한다. 여기에 관한 연구 또한 기대만큼 잘돼 있지 않다. 역사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특권층 부역자들이 많은 진실을 은폐했고, 그 증거를 인멸했기 때문이다. 분야마다 공부 질이나 양이 다르기도 하고, 내가 모르기도 하니 그 한계 안에서 체계화에 이바지하기 위해 최소한 기본적인 손대기나마 진행한다.

 

말글(어문) 분야 이야기로 시작한다. 말글 분야는 국어학이라는 학문 문제를 다룰 때 하면 되지만, 그 어떤 분야보다도 우선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가장 먼저 입 댄다. 말글 부역 풍경이야말로 모든 부역 풍경의 출발이다. 인간은 결국 말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진실을 간파한 제국주의는 식민지 토착어를 말살하는 전략부터 구사했다. 일제라고 어찌 예외였겠는가. 특권층 부역자도 여기부터 첨병 노릇을 시작했다. 물론 오늘날까지 저들은 그 짓을 지속·강화하고 있다. 그 속살을 살펴본다.

 

우리는 이미 오랜 세월 한자 식민지로 살아왔다. 우리 글이 없었던 탓으로 말하자면 불가피한 일이니, 식민지라 표현하는 일은 과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에도 5백 년 동안 한자가 공식 문자였다는 사실과 마주하면 유구한 특권층 부역 세력이 만들어 놓은 기득권 시스템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글이 공식 문자인 현재도 여전히 한자-어는 한글-말과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세력을 떨치고 있다. 이 바탕 위에 한자 의존도가 훨씬 높은 일본어가 들어와 식민 그늘은 더 어두워졌다.

 

일본어 식 말하기와 글쓰기가 깊숙이 자리 잡았고, 일본식 한자어가 우리식 한자어를 대체했으며, 일본 어휘를 우리 어휘인 양 쓴다. 일반 대중이 이런 오류에 휩싸여 있는 일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국어학자, 교육자, 전문적 글쓰기를 하는 지식인, 문학인, 언론·방송인 입에서 그런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일은 실로 참담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도리어 언어 대중을 호도하니 말이다. 설상가상 미군정 이후 영어가 또 다른 지배 언어로 등극했다. 영어식 훼손은 더욱 큰 위력으로 우리 말글 목을 조른다.

 

말글 부역 본진은 물론 특권층 부역 집단이다. 저들 내부 공식 언어는 당연히 일본어와 미국식 영어다. 유학을 통해 습득한 저들 종주국, 아니 조국 언어는 의당 다른 근본 없는” “들 언어와 결별해야 했다. 그리고 근본 없는 것들은, 일본어·영어식 한국어쓰게 하면 감지덕지할 일이라고 여겨 만든 조직이 다름 아닌 국립국어원이다. 공식적으로 표방한 목적과 일반인이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국립국어원은 어지러운 국어 상태를 고의로 방치 심지어 유도하고 있다. 그 결정적 증거가 표준국어대사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큰사전이 널리 쓰이는 길을 원천 봉쇄해버렸다. 이는 조만식을 위시한 자주 인사들이 민립대학 운동을 벌이자 이를 무력화하려고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던 사건과 그 맥이 닿아 있다. 실제로 그 경성제국대학 부역 인맥이 국립국어원을 장악했고, 지금까지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출신 철밥통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아베 노부유키가 말한 전형적인 좋은 정책이다. 좋은 정책을 통해 식민지 말글살이는 제국 입맛에 맞게 발전하리라 굳게 믿는다.

 

221은 국제 모국어의 날이다. 개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성 요소이자, 공동체 생명·문화 구성을 담당하는 언어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다양성을 수호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정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 약 6,000종 가운데 절반이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으며, 실제로 2주마다 1개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영어 지배 구도가 굳어지고 있어서다.(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이에 맞서 프랑스·독일·러시아는 자국어 보호를 천명하고 나섰는데 우리는 이 지경이다. 아베의 축원은 과연 영검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