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회 각 분야 이야기로 넘어간다. 사실 이 이야기만큼 중요한 무엇은 없다. 우리가 선 땅을 온전히 한 바퀴 돌면서 지평선을 응시해 눈앞에 어떻게 부역 온 풍경이 낱낱이 그 얼굴을 드러내는지 봐야만 한다. 여기에 관한 연구 또한 기대만큼 잘돼 있지 않다. 역사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특권층 부역자들이 많은 진실을 은폐했고, 그 증거를 인멸했기 때문이다. 분야마다 공부 질이나 양이 다르기도 하고, 내가 모르기도 하니 그 한계 안에서 체계화에 이바지하기 위해 최소한 기본적인 손대기나마 진행한다.
말글(어문) 분야 이야기로 시작한다. 말글 분야는 국어학이라는 학문 문제를 다룰 때 하면 되지만, 그 어떤 분야보다도 우선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가장 먼저 입 댄다. 말글 부역 풍경이야말로 모든 부역 풍경의 출발이다. 인간은 결국 말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진실을 간파한 제국주의는 식민지 토착어를 말살하는 전략부터 구사했다. 일제라고 어찌 예외였겠는가. 특권층 부역자도 여기부터 첨병 노릇을 시작했다. 물론 오늘날까지 저들은 그 짓을 지속·강화하고 있다. 그 속살을 살펴본다.
우리는 이미 오랜 세월 한자 식민지로 살아왔다. 우리 글이 없었던 탓으로 말하자면 불가피한 일이니, 식민지라 표현하는 일은 과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에도 5백 년 동안 한자가 공식 문자였다는 사실과 마주하면 유구한 특권층 부역 세력이 만들어 놓은 기득권 시스템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글이 공식 문자인 현재도 여전히 한자-어는 한글-말과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세력을 떨치고 있다. 이 바탕 위에 한자 의존도가 훨씬 높은 일본어가 들어와 식민 그늘은 더 어두워졌다.
일본어 식 말하기와 글쓰기가 깊숙이 자리 잡았고, 일본식 한자어가 우리식 한자어를 대체했으며, 일본 어휘를 우리 어휘인 양 쓴다. 일반 대중이 이런 오류에 휩싸여 있는 일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국어학자, 교육자, 전문적 글쓰기를 하는 지식인, 문학인, 언론·방송인 입에서 그런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일은 실로 참담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도리어 언어 대중을 호도하니 말이다. 설상가상 미군정 이후 영어가 또 다른 지배 언어로 등극했다. 영어식 훼손은 더욱 큰 위력으로 우리 말글 목을 조른다.
말글 부역 본진은 물론 특권층 부역 집단이다. 저들 내부 공식 언어는 당연히 일본어와 미국식 영어다. 유학을 통해 습득한 저들 종주국, 아니 조국 언어는 의당 다른 “근본 없는” “것”들 언어와 결별해야 했다. 그리고 근본 없는 것들은, 일본어·영어식 한국어‘나’ 쓰게 하면 감지덕지할 일이라고 여겨 만든 조직이 다름 아닌 국립국어원이다. 공식적으로 표방한 목적과 일반인이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국립국어원은 어지러운 국어 상태를 고의로 방치 심지어 유도하고 있다. 그 결정적 증거가 표준국어대사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큰사전이 널리 쓰이는 길을 원천 봉쇄해버렸다. 이는 조만식을 위시한 자주 인사들이 민립대학 운동을 벌이자 이를 무력화하려고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던 사건과 그 맥이 닿아 있다. 실제로 그 경성제국대학 부역 인맥이 국립국어원을 장악했고, 지금까지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출신 ‘철밥통’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아베 노부유키가 말한 전형적인 “좋은 정책”이다. 좋은 정책을 통해 식민지 말글살이는 제국 입맛에 맞게 “발전”하리라 굳게 믿는다.
2월 21은 국제 모국어의 날이다. 개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성 요소이자, 공동체 생명·문화 구성을 담당하는 언어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다양성을 수호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정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 약 6,000종 가운데 절반이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으며, 실제로 2주마다 1개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영어 지배 구도가 굳어지고 있어서다.(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이에 맞서 프랑스·독일·러시아는 자국어 보호를 천명하고 나섰는데 우리는 이 지경이다. 아베의 축원은 과연 영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