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시사저널은 현재(2020) 국내 30대 그룹(자산총액 기준)에서 오너가 있는 기업 총수와 후계자 등의 최종 학력을 전수조사했다. 24개 그룹 중 63%15곳의 총수가 미국 대학 출신이었다. 하지만 실제 체감되는 비율은 훨씬 높다. 국내파 총수들은 대부분 70세 이상 고령의 1~2세대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기업 3~4세 경영이 본격화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비율은 향후 100% 가까이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후계 구도에 있는 예비 총수들은 물론 그 자녀들에게도 미국 유학은 필수로 여겨진다. 미국 유학파 총수·후계자 중 경영학 석사 출신이 상대적으로 많지만, 학교는 겹치는 곳 없이 골고루 분포돼 있다. 어느 대학이냐보다 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풀이된다.···

 

재벌 총수와 후계자들이 너도나도 미국 유학길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조사본부장은 과거와 달라진 환경에서 경영 수업을 제대로 받으려다 보니 비즈니스 스쿨 쪽으로 특화된 미국을 선택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본부장은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예전처럼 하면 된다정신이나 주먹구구식으로 경영해선 안 된다. 그렇기에 시스템을 제대로 갖춰 큰 기업을 운영하는 미국의 흐름을 배우고 오려는 것이라며 대기업들이 (한국 특유의) 오너 경영의 장점은 어느 정도 가져가면서 미국식 선진 경영을 접목하는 과정에 있다고 덧붙였다.···

 

유학은 재벌가 교육의 오래된 특징이다. 해방 전후 극심한 혼란기에 대기업을 일군 창업주들은 외국과의 교류, 선진 문물 도입 등을 강조 또 강조했다.···이는 자녀 교육에도 적용됐다. 2세대부터 상당수가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전 미국, 일본 등에서 수학했다.

 

오너 2세대 시대가 저물어가고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지금도 재벌가 자제들의 유학은 활발하다. 아예 선택이 아닌 필수 요건이 됐다. 일본 유학은 거의 자취를 감췄고 미국으로 집중됐다. 더 나아가 요즘 트렌드는 조기 도미(渡美). 3세까지 주로 한국에서 중·고등·대학교 과정을 마친 후 미국으로 나갔다면 4세 이후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한국을 떠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오세형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본부 팀장은 “(유학을 통해) 재벌 체제의 장점과 미국의 선진 경영 시스템을 접목하고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며 대기업의 행태를 보면 정작 미국에서 경영학이나 경제학의 본질, 자본주의 원칙 등을 배워 오는 총수는 없는 듯하다고 꼬집었다. 홍성추 재벌 3저자도 3세 이후의 재벌가 자제들을 가리켜 온갖 특혜를 누리며 살기만 했고 기업 경영과는 거리를 둔 채 유학 등의 시간을 거치며 한국의 사회·경제 전반에 대해 익숙지 않다입사 후 바로 임원이 되고 차후에 오너가 될 이들에게 바른말을 해 줄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미국 유학생 서사 결정판이다. 김종영을 다시 인용한다. “학벌 인종주의로 물든 한국 사회에서 한국 엘리트들에게 최고의 지적 등급을 부여하는 곳은 미국 대학이다.” 이와 다른 어떤 말로 대한민국 교육 부역 서사 고갱이를 표현할 수 있을까.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내 경우 김종영식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 또한 제국 논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본질주의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내팽개치지 말고 우리 공동체 생태적 실재를 옹글게 담을 고유성을 어떻게 찾아 보전하고 육성할지 곡진하게 고민해야 한다. 미국에 있다면 한국엔들 왜 없겠는가 말이다. 현재는 물론 미래에 가장 결정적인 문제, 그 교육 서사를 새로이 써 나아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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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실 경성제국대학과 일(본토) 제국대학 출신자보다 긴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집단은 미(제국) 대학 출신자다. 구한말 개화기에 이미 시작되어 식민지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압도적 대세를 형성했다. 대한민국 시대 미국 유학파는 본디 미국 유학파 후손에 일본 유학파 후손이 더해져서 특권층 부역자로 동일 정체성을 구축했다. 오늘날에는 친일·친미 구별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 이들 손아귀에 있는 대한민국 현재와 미래는 과연 무엇인가?

 

김종영(경희대 사회학과 교수)은 저서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 박사 1호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이래 미국 박사 학위는 한국 사회에서 출세의 보증수표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 박사는 미국 박사를 알아보고, 서로 챙겨주며 네트워크를 이룩한다. 한국의 엘리트 계층에게 미국 학위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상징자본이 되고 있다.미국 학위는 한국 엘리트 집단의 배타적인 지위재이며, 이것이 없으면이너 서클에 들어가기 어렵고 배제되거나 소외되기 쉽다.즉 미국 학위는 한국 기업에서 엘리트와 비엘리트를 분할하는 상징적인 징표가 되고 있다.”

 

한국적 학벌주의(한국 학부 학위)와 미국 학위(명성 높은 미국 연구중심대학 박사 학위) 선호 현상이 만난 글로컬 학벌 체제가 미국 유학파에게 한국 사회 패권을 장악하는 힘으로 작동하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저자는 미국 유학파를 지배받는 지배자또는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으로 규정한다. 문화 영역을 지배하는 지식인은 스스로 지배계급에 속하면서도 경제 영역을 지배하는 자본가에게 지배당하는 모순 속에 있다는 말이다.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한국 학계의 지적 식민성과 전근대성 속에서 탄생한다 () 트랜스 미들맨 지식인의 주요 생존 전략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받아들여 한국의 로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미국 유학파가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을 입신출세에 이용만 할 뿐 지식과 실천에서 실질적 내용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요식적 학위만 노리고 유학 가는 경우가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부 목적으로 가도 현실에서 저들이 탁월한 연구 결과를 생산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원천적으로 식민지 지식인이 맞닥뜨리는 한계 탓이다. 이 결정적 어둠이 낳는 결론은 무엇인가?

 

요컨대 미국 유학파는 지적 식민지 상태인 대한민국에서 선한 얼굴과 악한 심장을 동시에 지닌 트릭스터(trickster) 위상을 점하나, 궁극적으로는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주의를 추수하는 특권층 부역 집단이다. 이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등급을 분류하는 기계인 대학과 지식을 비판하거나 혁파할 어떤 이성도 의지도 없이 학벌 인종주의로 물든 한국 사회에서 한국 엘리트들에게 최고의 지적 등급을 부여하는미국 대학에 충성한다. “미국에 쏠린 한국 사회 체제와 그에 기생하는 지배계급 재생산 구조”(한겨레 이재성 지자)를 맹렬히 떠받친다. 어찌 이렇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과정을 돌아본다.

 

개화기부터 시작된 미국 유학은 1905년까지 수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이미 어떤 경향성을 띠고 있었다. 김우재(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논문 <식민지 미국 유학생의 오리엔탈리즘과 한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갑오개혁으로 일본에서 공부 중이던 유학생들은, 아관파천 이후 역적의 손에 의해 파견된 유학생이라는 낙인이 찍히자, 상당수가 미국으로 도주 유학을 떠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헌식, 이범수, 임병구, 여병현, 이하영, 안정식, 박희병, 이희철 등으로 미국 유학생 대부분은 선교사의 지원을 통해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기독교계를 통한 미국 유학은 망국 시기에도 활발해져 바로 이 시기에 이승만을 비롯해 윤병구, 신흥우, 박용만, 민찬호, 정한경, 유일한 등이 유학길에 오른다.···

 

이들 제2기 미국 유학생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은, 그들 대부분이 결국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갑오개혁의 실패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들은 신분적 주변성과 사상적 이단성으로 인해 유교전통을 비롯한 전제군주제와 양반 지배체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즉 전통의 질곡에 항거해 근대적 가치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혁명적 지식인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는 없었다. 이들은 분명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벗어나 있었지만, 관료로의 출세를 원하는 면에선 일본 유학생과 대동소이했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인문과학 또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정규 대학 교육을 받았으며, 기독교를 매개로 미국의 문화에 적응했던 미국식 사고와 가치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통해 갖게 된 꿈은 한국적 기독교 국가의 건설이었다.···

 

메이지 시대···일본 근대적 지식인 대부분은 종교를 교육의 일환으로 여겼으며 기독교보다 과학에 더 친화된 입장을 견지했다.···자유 민권 사상에 친화적이었으며, 영미식 민주주의에 천착했다. , 2기 조선의 미국 유학생과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았던 일본 지식인 집단이 과학과 민주주의를 선택했다면, 향후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어 나아가야 했던 창조적 소수자였던 제2기 미국 유학생 집단은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선택한 셈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종교가 전제된 학문은 결국 거기에 종속된다. 종교가 전제된 정치는 결국 거기에 종속된다. 모든 제도 종교는 수구적이다. 종교에 볼모 잡힌 학문도 정치도 수구로 빠져든다. 대한민국은 이 진리를 너무도 확실하게 역사와 사회에 새겨넣고 있지 않은가. 김우재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본다.

 

“1919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해외유학에 대한 개방책으로 선회했고, 당시 향학열에 불타던 국내의 학생들은 앞다퉈 사비유학을 떠나게 된다. 1920년대 일본을 제외한 해외유학생은 약 436명으로 나타나는데 이 중 대부분인 332명이 미국 유학생이었다.

 

미국 유학은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에 밀려 이등 시민으로 전락한 한국인들에겐 출세의 기회이자 신분 상승의 기회로 여겨졌다. 이 당시 유학생들의 전공 분포를 보면 드디어 과학기술 분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1925년의 조사표에선 여전히 사회과학 분야가 대다수이지만, 공학과 자연과학 유학생이 유의미한 숫자로 등장하기 시작하며, 이런 비율은 1929년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1910년대 대부분 유학생이 신학과 의학에 집중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점차 실용 학문으로 유학생들의 관심이 확대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이 시기의 미국 유학은 학위나 명예를 위한 유학에서 벗어나 실력양성에 주력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인문학을 비롯한 신학과 의학 분야에 대한 선호도가 많은 것은, 식민지 조선의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성 때문이다. 이렇게 1900년 전후에 태어나 일본 혹은 미국으로 유학할 수 있었던 인물 중에서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라고 불릴만한 인물들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유학생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순수할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도미 이전에 이미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과학 그 자체의 역사와 의의보다 종교와 과학이라는 주제를 통해 과학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당시 동아시아와 미국까지 휩쓸었던 사회진화론의 영향력 속에서 유학생 대부분은 진화론을 민족의 실력양성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만 다루었다.···나라를 빼앗긴 이들 유학생에게 과학기술을 통한 근대화는 너무나 먼 기대였다.

 

장차 대한민국을 건설하게 될, 그리고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가 될 이들 미국 유학생들은 기독교와 자유주의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실용주의와 과학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동의하는 새로운 근대화된 인종이었다. 이들보다 먼저 미국에 유학했던 윤치호의 문명관 또한 문명개화 의식, 민주주의 인식, 기독교 의식, 그리고 황인종 의식으로 집약되어 있었다. 사회진화론을 근거로 결국 친일협력의 논리로 이어지는 윤치호의 모습이 이 시기 미국 유학생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적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동시에 이들은 사회주의에 강한 비판의식을 보였다. 1920년대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사조가 급속도로 확산될 때, 미국 유학생들은 이에 단호히 반대했고 그 근거로 내세운 논거들 역시 실용주의적 과학 정신과 자본주의의 사유재산 옹호론, 기독교의 종교 도덕과 자유주의였다.

 

이승만의 반공 논리 또한 미국 유학생 집단에겐 당연한 귀결이었다.···미국 유학생들은 향후 남한 자본주의국가 건설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그룹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공유하던 자유주의에 기초한 반공 논리는 향후 한국에서 펼쳐질 역사적 전개에 결정적인 방향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 앞에서 다시 묻는다: 이 미국 유학파 손아귀에 있는 대한민국 현재와 미래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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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7 08: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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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앞서 경성제국대학을 학교 자체만으로 다루었다. 800여 명 졸업자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거기 없다. 이 문제를 다룬 연구가 있으나 세부적 이야기보다 여기서는 상징적인 내용 하나만 하고 지나가겠다. 경성제대 법과 출신 고등문관 시험 합격자들이 보인 행보 이야기다. 장세윤이 쓴 논문 <경성제국대학의 한국인 졸업생과 고등문관 시험> 요약 일부를 인용한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경성제대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주로 법과 출신 인사들이 주로 고등문관 시험(행정사법과)에 응시합격했는데, 이들 70여 명의 합격자들은 일제 통치기구의 중견간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제 통치집단의 주변 엘리트로 포섭되었지만, 간접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의 정관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성제대 법과 출신 고등문관 시험 합격자들의 해방 이후 행적을 검토한 결과 상당수 인물들이 이승만의 3선개헌과 315부정선거, 그리고 박정희의 516쿠데타 정권 참여와 유신체제의 지지,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정권 참여 등 한국현대사를 굴곡지게 한 고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밝혀졌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적지 않은 경성제대 고등문관 출신 인사들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협력하고 한국의 민주주의, 나아가 한국현대사의 발전에 부정적 역할을 수행한 사실은 일본 식민지 제국대학 체제의 본질과 기능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조선 왕족, 귀족, 지주, 식민지 부르주아 후손이 경성제대보다 더 많이 몰려간 곳은 일본 본토 제국대학이었다. 일본 본토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대략 784, 학업을 중도 포기한 이들까지 더하면 1,000명이 넘는다고 본다. 경성제국대학 졸업자보다 더 높이 대우받은 최고 엘리트 집단인 이들에 관해 정종현(동국대 교수)이 쓴 제국대학의 조센징(휴머니스트, 2019)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본다. 이 책 연구는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도쿄(163), 교토(236) 399명에 국한된다.

 

본토 제국대학 출신 유학생들은 식민지 조선에 돌아와 사법ㆍ행정 관료나 교육자로 크게 활약했다. 도쿄제국대 졸업생 64, 교토제국대 졸업생 96명이 관료가 됐다. 교수직을 거친 사람은 도쿄제국대 53, 교토제국대 46명에 달했다. 광복 이후 이들은 정부 요직에 발탁되거나 정치권과 사법부 등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했다. 이들 대부분은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 제국과 식민지 체제를,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과 군부 독재 체제를 작동시키는 유용한 부품으로 작동했다.

 

이 책에는 본토 제국대학 출신이 한국 사회에서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두 가문 이야기가 있다. 우선,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대법관과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지냈고 두 차례나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이회창 가문. 그 할아버지는 충남 예산의 지주였고, 큰아버지 태규는 교토제국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아버지 홍규는 조선총독부 검사서기를 거쳐 해방 후 검사를 했다. 외삼촌 김성용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일본 군수성 관료를 지냈고, 이모 김삼순은 홋카이도제국대학을 나왔다. 장인 한성수는 1942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해방 이후 대법관, 대법원장 직무대행을 지냈다. 본가·외가·처가 모두 화려한 배경을 가진 이회창 가는 제국대학과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로서 "본가·외가·처가가 획득한 제국대학, 고등문관 시험,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의 종합적 구현체".

 

이 책은 최초로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경성방직 사장이 된 김연수도 '제국대학'이라는 '사회자본' 도움을 받아 성공한 경우로 본다. 그는 제국대학 네트워크 도움으로 사업을 확장해 축재할 수 있었다. 일본 패전 직후 만주에서 돌아올 때 남만 방적 물품을 일부 건질 수 있었던 것도 대학 후배인 일본인 철도국장이 화차 열 량을 배정해 준 덕분이었다. 전시체제기에 마침내 김연수는 "민족의 이익과 일본 제국의 이익 다르지 않다는 입장에 서게 됐다." 광복 이후에도 이 가문 자산은 줄지 않았다. 뒷날, 도쿄제국대학 출신 김상협(김연수의 둘째 아들)이 전두환 정권 국무총리를 지낸 사실은 제국대학이 "한국 사회 지배 엘리트를 재생산하는 제도로도 기능"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국대학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분야는 교육과 학술이다. “오늘날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을 가르친 교수들의 학문 계보를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제국대학 출신들과 만나게 될 확률이 높다.” 어쩌면 이보다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일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인 민관식이란 인물을 매개로 벌어졌다. 민관식이 한 가장 큰 일은 고교평준화. 문교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74년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고교평준화를 검토한다. 고교평준화 지시는 왜 내려졌을까? “한국 현대사에서 입시제도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을 정도로 권력자의 자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바뀌어왔다. 1958년생인 박정희의 외아들 박지만의 성장에 따라 한국 사회의 입시제도가 바뀐 것은 우연일까?” 박지만이 중학교에 진학할 시기에 맞추어 박정희는 중학교 입시 준비로 극성을 부리던 초등생 과외 열풍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를 채택했다. 중학교가 무시험 입학제로 전환되자 중학교 입시 열풍은 고등학교로 방향을 틀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박정희는 고교평준화검토를 지시했다. 박지만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민관식은 그 해결책을 일본에서 찾았다. 문교부 직원을 파견해 고교 배정 입학제도 실상을 조사하게 하고, 일본 정책을 한국에 맞도록 변형해 시행한 제도가 바로 고교평준화였다. “제국대학 유학생 민관식에게 일본은 급할 때 참조할 수 있고, 참조해야만 하는 늘 앞서가는 근대()의 표상이었던 셈이다.” 빼놓을 수 없는 사실 하나 더. 민관식은 대한체육회장도 지냈다. 그가 1966년 태릉선수촌을 만들었다. “국가 엘리트 육성 장치인 제국대학과 국가 대표를 입소시켜 집중 육성하는 태릉선수촌의 체육 엘리트 육성 시스템은 그 세계관과 실제 작동방식이 흡사하다.”

 

나는 박지만보다 두 해 먼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진학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바꿔댄 제도에 가차 없이 희생당한 장본인이다. 196875, 당시 문교부 장관 권오병이 관료적 경상도 억양으로 중학교 무시험 입학을 발표하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나는 주저앉아 방성통곡했다. 가난뱅이 우등생에게 그 제도는 저주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아니 그 뒤에도 몰랐다.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가 특권층 부역 집단 음모라는 사실, 그게 거대한 파행 교두보였다는 사실. 첫 단추가 잘못 채워져서 뒤틀려버린 내 인생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오늘은 눈물 아닌 핏물이 온 영혼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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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교 중심으로 살핀 부역 서사를 인물 중심으로 다시 본다. 교육자로 출세한 부역자 명단과 그 내용을 요약한 뉴스타파 기사를 인용한다. https://newstapa.org/article/fxFny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경진, 김원근, 박필병, 서병조 뿐만 아니라 일제 판사와 검사 출신의 계철순, 고재호, 김갑수, 김세완, 이호, 정재환, 그리고 조선총독부와 만주국 관료 출신의 김영훈, 박일경, 윤태림, 이인기, 최문경, 박이순 등이 해방 후 학교를 설립했거나 대학의 총장, 이사장 등을 지낸 것으로 파악됐다.

 

일제강점기 기준 경력으로 볼 때 교육·학술 분야에서 활동한 친일 인사가 29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종교계에서 친일 활동을 한 인사가 21, 총독부 관료와 군수 출신 16, 일제 검사와 판사 출신이 6, 중추원 참의 등 일제 고위직이 5, 경제계 4명 순이었다.

 

학교별로 보면, 동국대학교에서 총장, 이사, 이사장 등을 지낸 인물 8명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표됐거나 친일인명사전 등재 인물로 나타났다.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권상로, 일제 판사 고재호와 김갑수,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이종욱,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법요를 열고 시국강연회에서 강연한 조계종 승려 김영수, 임석진, 허영호 등이다.

 

이화여자대학교는 6명이 친일 인사가 ()총장, 이사, 이사장을 지냈다.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김활란, 이숙종, 서은숙, 일제에 국방헌금 1만 원을 내고 경기도군용기헌납발기인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순흥, 미영격멸간담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변홍규 등이다.

 

숙명여자대학교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이숙종과 임숙재, 친일 판사 고재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김두헌, 일제 군수 윤태림, 만주국 관료 출신의 이인기 등 5명이 총장과 이사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의 총장과 이사장 등을 거친 친일파도 있다. 일제 징용과 학도병, 징병을 독려한 조동식은 상명학원 초대 이사장(1945), 성균관대학교 초대 이사장(1947)을 거친 뒤, 1950년 동덕여자대학교를 설립했다. 성신여대 설립자 이숙종은 성신여대 이외에도 숙명학원(숙명여대) 이사장(1964), 이화여대 이사(1952)를 맡았다. 신봉조는 이화예술고등학교를 설립(1953)하고, 상명학원(상명대) 이사장(1954), 이화학원 상무이사(1961) 등을 지냈다.

 

고황경, 곽종원, 김영훈 등 15명은 1968년 박정희가 공표한 국민교육헌장을 사회에 구현했다는 공로로 박정희와 전두환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또 김준보, 윤태림, 조재호, 최문경 등은 5·16 혁명이념을 교육 현장에서 구현한 공로로 박정희에게 훈장을 받았다. 수여일은 19631217일인데, 박정희가 쿠데타 성공 후 대통령에 당선돼 임기가 시작된 때였다. 박정희가 초대 총재를 맡은 ‘5.16 민족상 재단의 이사와 심사위원을 맡거나 5.16민족상을 받은 인사도 송금선, 이병도 등 모두 5명이었다.

 

뉴스타파는 해방 후 대한민국 교육 분야에서 활동한 친일 인사 87명의 명단을 인터랙티브 페이지로 제작해 공개한다. 짙은 붉은색 배경으로 표시된 인물은 친일 부역 행위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 정권에 부역한 이력도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독재 부역 이력과 훈장 내역도 이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 인물 사진을 클릭하면 이들의 친일 행적과 해방 후 교육 관련 이력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포함된 인물인 경우 반민규명위원회가 2009년 작성한 결정 보고서 원문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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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도저히 여기서 이야기를 접을 수는 없다. 사학재단 문제를 좀 더 들여다보고서야 발길을 돌릴 수 있겠다. 능력 한계로 말미암아 내 연구 자료도 아니고 인용한 자료조차 그렇게나 따끈따끈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아래 실은 글은 2014년 고발뉴스닷컴(필자는 아이엠피터’)에 실린 내용이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특권층 부역자 정권이 들어선 오늘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하리라는 추정을 보탬으로써 증폭된 문제의식이 공유되기를 간절히 빈다.

 

사립 초중고등학교 재단의 수익용 자산 규모는 4조 원가량이다. 수조 원이 넘는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학재단이 재단전입금으로 내놓은 돈은 총 1,342억 원에 불과하다. 서울지역 사립고등학교 재단전입금 상태를 보면, 재단전입금 0.00%인 학교가 전체 199개교 중 무려 17개교다. 1% 미만 재단전입금 가지고 학교 운영하는 사학재단이 124개교로 전체 60%를 넘는다. 기본적으로 사학재단은 자기 재산을 출연하여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 돈은 거의 내놓지 않으면서 학교를 운영하니 재정이 좋을 리 없다.

 

법정부담금은 교직원 연금 부담금, 건강보험 부담금, 재해 보상 부담금 등으로 사학재단이 기본적으로 내야 할 돈을 말한다. 2011년 사립 초중고교 법인이 부담해야 할 법정부담금 2,797억 원 중 실제 사학법인이 납부한 금액은 615억 원으로 전체의 22%에 불과하다. 전국 1,723개 학교 중 법정부담금을 단 한 푼도 내지 않은 학교가 173개교(8.5%), 0%~5% 미만 학교가 574개교(33.3%), 5% 이상~10% 미만 학교가 313개교(18.2%), 100% 완납한 학교는 188개교(10.9%)에 불과하다.

 

사학재단의 가장 큰 문제는 학교를 가족 재산으로 여기며 세습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부를 축적하는 방법에는 각종 편법과 비리, 불법이 동원되고 있다. 2011년 서울시교육청 감사 결과를 보면 사학비리는 단순 비리가 아니라 범죄다. 예컨대 진명학원 진명여고이사장은 수익용 기본재산 45천만 원을 횡령했고, 학교 돈 88,630만 원을 친척에 무단 제공했다. 발전기금 22천만 원을 개인 채무 변제 등에 사용했다. ‘상록학원 양천고는 바지 사장을 내세운 급식 비리 88천만 원’, 옹벽 공사, 소화 배관 공사를 통한 금품 수수 7천만 원등 각종 비리를 저지르며 부를 축적했다. 사학재단은 비리를 저질러서 아버지가 이사장직에서 물러나도 부인이나 아들, 딸이 그대로 이사장직을 승계한다. 진명학원 이사장도 비리로 물러난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들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에 비리 사학재단이 늘어난 근원에는 친일 부역 집단이 있다. 민족 교육과 인재 양성을 표방하며 설립했던 학교 중 일제강점기 동안 살아남은 학교 대다수는 저들이 부역을 실천한 학교들이다. 해방 이후 사립 초중고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이유는 당시 재원이 없어 학교를 세우지 못하자 부역 지주들에게 토지 몰수 대신에 학교 세우고 법인화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은 돈 없이 학교를 세울 수 있어서 좋았고, 부역 지주들은 토지 몰수 대신 자기 재산을 그대로 사학재단에 귀속시켜 부를 세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겨서 노났다. 사학재단을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을 의무화해 놓고 재원을 부역 사학 기증 구조로 만들었기 때문에, 혈연이나 인척 비리가 생겨도 손을 대지 못한다. 사학재단들은 부역 집권층과 손잡고 재산과 특권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전방위적으로 하고 있다. 사학재단 비리를 고발했던 교사들은 진실을 밝힌 대가로 오히려 해임되고, 복직 판정을 받아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다. 2003년 서울시교육청 감사 결과 비리가 밝혀진 동일학원을 비롯한 사학재단들은 문용린 교육감에게 고액 정치기부금을 냈다. 왜 사학재단 비리가 근절되지 못하고 오히려 각종 특혜를 받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사립학교라면 어디든 내 의심을 피해 가지 못한다. 아프지만 내가 나온 고등학교부터 촘촘히 톺아 보았다. 자료에 한계가 있어선지 부역 흔적을 찾지 못했다. 진즉 지웠을까? 모를 일이다. 끝까지 의심을 풀지 않겠다. 각성한 부역자로서 변혁에 참여할 trickster로서 살아가기 위한 필요 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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