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앞서 경성제국대학을 학교 자체만으로 다루었다. 800여 명 졸업자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거기 없다. 이 문제를 다룬 연구가 있으나 세부적 이야기보다 여기서는 상징적인 내용 하나만 하고 지나가겠다. 경성제대 법과 출신 고등문관 시험 합격자들이 보인 행보 이야기다. 장세윤이 쓴 논문 <경성제국대학의 한국인 졸업생과 고등문관 시험> 요약 일부를 인용한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경성제대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주로 법과 출신 인사들이 주로 고등문관 시험(행정사법과)에 응시합격했는데, 이들 70여 명의 합격자들은 일제 통치기구의 중견간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제 통치집단의 주변 엘리트로 포섭되었지만, 간접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의 정관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성제대 법과 출신 고등문관 시험 합격자들의 해방 이후 행적을 검토한 결과 상당수 인물들이 이승만의 3선개헌과 315부정선거, 그리고 박정희의 516쿠데타 정권 참여와 유신체제의 지지,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정권 참여 등 한국현대사를 굴곡지게 한 고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밝혀졌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적지 않은 경성제대 고등문관 출신 인사들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협력하고 한국의 민주주의, 나아가 한국현대사의 발전에 부정적 역할을 수행한 사실은 일본 식민지 제국대학 체제의 본질과 기능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조선 왕족, 귀족, 지주, 식민지 부르주아 후손이 경성제대보다 더 많이 몰려간 곳은 일본 본토 제국대학이었다. 일본 본토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대략 784, 학업을 중도 포기한 이들까지 더하면 1,000명이 넘는다고 본다. 경성제국대학 졸업자보다 더 높이 대우받은 최고 엘리트 집단인 이들에 관해 정종현(동국대 교수)이 쓴 제국대학의 조센징(휴머니스트, 2019)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본다. 이 책 연구는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도쿄(163), 교토(236) 399명에 국한된다.

 

본토 제국대학 출신 유학생들은 식민지 조선에 돌아와 사법ㆍ행정 관료나 교육자로 크게 활약했다. 도쿄제국대 졸업생 64, 교토제국대 졸업생 96명이 관료가 됐다. 교수직을 거친 사람은 도쿄제국대 53, 교토제국대 46명에 달했다. 광복 이후 이들은 정부 요직에 발탁되거나 정치권과 사법부 등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했다. 이들 대부분은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 제국과 식민지 체제를,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과 군부 독재 체제를 작동시키는 유용한 부품으로 작동했다.

 

이 책에는 본토 제국대학 출신이 한국 사회에서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두 가문 이야기가 있다. 우선,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대법관과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지냈고 두 차례나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이회창 가문. 그 할아버지는 충남 예산의 지주였고, 큰아버지 태규는 교토제국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아버지 홍규는 조선총독부 검사서기를 거쳐 해방 후 검사를 했다. 외삼촌 김성용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일본 군수성 관료를 지냈고, 이모 김삼순은 홋카이도제국대학을 나왔다. 장인 한성수는 1942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해방 이후 대법관, 대법원장 직무대행을 지냈다. 본가·외가·처가 모두 화려한 배경을 가진 이회창 가는 제국대학과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로서 "본가·외가·처가가 획득한 제국대학, 고등문관 시험,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의 종합적 구현체".

 

이 책은 최초로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경성방직 사장이 된 김연수도 '제국대학'이라는 '사회자본' 도움을 받아 성공한 경우로 본다. 그는 제국대학 네트워크 도움으로 사업을 확장해 축재할 수 있었다. 일본 패전 직후 만주에서 돌아올 때 남만 방적 물품을 일부 건질 수 있었던 것도 대학 후배인 일본인 철도국장이 화차 열 량을 배정해 준 덕분이었다. 전시체제기에 마침내 김연수는 "민족의 이익과 일본 제국의 이익 다르지 않다는 입장에 서게 됐다." 광복 이후에도 이 가문 자산은 줄지 않았다. 뒷날, 도쿄제국대학 출신 김상협(김연수의 둘째 아들)이 전두환 정권 국무총리를 지낸 사실은 제국대학이 "한국 사회 지배 엘리트를 재생산하는 제도로도 기능"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국대학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분야는 교육과 학술이다. “오늘날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을 가르친 교수들의 학문 계보를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제국대학 출신들과 만나게 될 확률이 높다.” 어쩌면 이보다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일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인 민관식이란 인물을 매개로 벌어졌다. 민관식이 한 가장 큰 일은 고교평준화. 문교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74년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고교평준화를 검토한다. 고교평준화 지시는 왜 내려졌을까? “한국 현대사에서 입시제도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을 정도로 권력자의 자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바뀌어왔다. 1958년생인 박정희의 외아들 박지만의 성장에 따라 한국 사회의 입시제도가 바뀐 것은 우연일까?” 박지만이 중학교에 진학할 시기에 맞추어 박정희는 중학교 입시 준비로 극성을 부리던 초등생 과외 열풍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를 채택했다. 중학교가 무시험 입학제로 전환되자 중학교 입시 열풍은 고등학교로 방향을 틀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박정희는 고교평준화검토를 지시했다. 박지만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민관식은 그 해결책을 일본에서 찾았다. 문교부 직원을 파견해 고교 배정 입학제도 실상을 조사하게 하고, 일본 정책을 한국에 맞도록 변형해 시행한 제도가 바로 고교평준화였다. “제국대학 유학생 민관식에게 일본은 급할 때 참조할 수 있고, 참조해야만 하는 늘 앞서가는 근대()의 표상이었던 셈이다.” 빼놓을 수 없는 사실 하나 더. 민관식은 대한체육회장도 지냈다. 그가 1966년 태릉선수촌을 만들었다. “국가 엘리트 육성 장치인 제국대학과 국가 대표를 입소시켜 집중 육성하는 태릉선수촌의 체육 엘리트 육성 시스템은 그 세계관과 실제 작동방식이 흡사하다.”

 

나는 박지만보다 두 해 먼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진학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바꿔댄 제도에 가차 없이 희생당한 장본인이다. 196875, 당시 문교부 장관 권오병이 관료적 경상도 억양으로 중학교 무시험 입학을 발표하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나는 주저앉아 방성통곡했다. 가난뱅이 우등생에게 그 제도는 저주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아니 그 뒤에도 몰랐다.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가 특권층 부역 집단 음모라는 사실, 그게 거대한 파행 교두보였다는 사실. 첫 단추가 잘못 채워져서 뒤틀려버린 내 인생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오늘은 눈물 아닌 핏물이 온 영혼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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