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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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에 비해서는 심심하게 흘러가는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이라기보다 인간 내면의 슬픔과 공허를 끈질기게 파헤치는 책 같다. 신흥종교에서 구원의 실마리를 얻은 남자가 흑마술을 이용해 죽은 딸을 부활시키기를 원한다. 그의 제물로는 4세가량의 여아가 희생된다.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한데 파벌(캐리어vs논캐리어) 간 갈등이 한몫한다. 더불어 매스컴은 무책임한 보도를 쏟아내면서 수사에 방해가 될 뿐이다.

여기까지는 지금 시점에선 특이할 만한 점이 없지만, 영리기업화된 신흥종교를 매우 구체적으로 취재한 흔적이 있다. 영민했던 사람들이 왜 신흥종교에 빠지는지, 삶과 재산을 탕진하면서도 그에 심취하는 이유를 심도 있게 다뤘다.

제목만 봤을 때, 사람이 통곡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생각했었다. 자식이 죽었을 때, 나라를 잃었을 때 정도일까. 여기서는 냉담한 주인공의 방식으로 통곡하는 순간을 그렸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통곡한다.

책 표지에 이 책의 결말을 밝히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다. 냉담하고 느리게 흘러가던 소설이 15페이지 정도를 남겨놓고 갑자기 급물살을 만난 듯 빠르게 진척된다.

구원을 바라는 마음, 사라진 것을 부활시키고 싶은 마음, 과오를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통곡하게 만드나 보다. 냉정하게 보게 되지만, 책장을 덮고 나선 싸늘한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희망 없는 세상을 견디는 방법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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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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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에게 인기 많은 시집인 건 알았는데, 간기면을 펴 보고 놀랐다. 2019년 1월에 1판 1쇄를 찍었는데 2월 18일에는 무려 5쇄를 찍었다. 기대가 커 한 장 한 장 시집을 넘겼다.

대부분이 산문시. 어렵지 않은 말로 행간을 이어 나가는데, 그리고 있는 마음과 정서가 너무도 공감 가는 것들이라 놀랐다. 한 번쯤 또는 여러 번 나를 괴롭혔던 질문과 감정들. 그것들의 사이를 이 시집이 메워주는 기분이었다. 행간의 사이마다 생각할 여백이 생겼다. 다른 시를 읽으면서도 이런 적이 있었던가 묻자면, 이 시집이 처음이었단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항상 남겨지는 입장이었다고 생각했다면, 실은 거기 남겨두고 떠난 것은 나 자신이란 생각도 들었다. 발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고뇌하고 고통받고 고투하는데, 시인의 믿음대로 라면 언젠간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 성실한 희망의 목소리가 참 좋았다. 계속해서 걸어도 된다고, 꿈을 향해 가도 된다고 말해 준다. 어떤 문제의 안쪽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바깥쪽에도 있어봤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시선을 키워주는 것 같아 좋았다. 소장해야 할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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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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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놓고 한참 안 읽다가 8년이 흘러 읽었다. 쉽게 넘길 수 있는 페이지가 아니었다. 심연을 획득하는 시구들, 주요한 메시지를 흘려버리듯 눙치는 시였다. 감상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비유가 있었다. 생각이 병이라는 시인 자신의 말처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시들이 보였다. 여러 편의 시가 눈에 들어왔고, 몇 편은 필사를 하며 읽었다. 그중 마음을 치고 갔던 말은 "다들 사소하여 다들 무고하다"는 말. 마음을 괴롭히는 무언가, 어떤 존재가 과연 내게 그토록 무게감 있는 존재들인가 생각하고 말았다. 표시해 놓은 페이지를 언젠가 다시 들춰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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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 알마 인코그니타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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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철거된 타이베이의 중화상창. 그곳에 살았던 아이들의 삶을 단편소설로 엮은 책. 아날로그 감성과 과거에 대한 향수를 몽환적으로 그려낸 이 소설집에는 육교 위의 마술사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가난하고 북적대고 아직 모진 세상을 만나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에게 마술사는 마술을 보여주며 신비한 세계를 꿈꾸게 하고, 아이들이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하는 인물이다.

중반부까지의 단편들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죽음을 맞이하고, 후반부까지는 중요하게 등장한 동물들이 죽는다. 과거에는 살아남았더라도 현재에 와 죽음을 맞은 이, 과거로부터 몇 년의 삶을 유예 받았으나 뒤에 죽은 이, 다시 만났으나 헤어지게 되는 이, 키우던 동물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마술사를 흉내 내지만 변수가 들어가 실패한 이, 몰래 들어온 길냥이가 사라져 죽음을 맞는 이 등. 중화상창에는 소박하게 그리고 끈적임이 느껴지게 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지금의 한국 콘텐츠에서는 보기 어려운 정서라 생각한다.

과거의 건물을 잘 부수지 않는 대만임에도 중화상창은 철거했다고 한다. 타지에서 타이베이에 올라온 이들이 처음 맞닥뜨린 랜드마크, 과거 타이베이의 영광을 상징했던 건물. 이 건물은 철거되고 타이베이101 등 새로운 대만이 등장했을 것이다.

우리는 부순 것,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한다. 그 때 사라진 것이 물질 뿐만은 아니기에. 잊었던 정서, 그리운 것들, 버려두고 가야하는 것들을 소설 속에 그려내고 있다. 아름답게 안녕이라고 할 수 있기를, 냉정하게 이별할 수 있기를, 그 성장통을 거쳐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있기를 소망하게 되는 촉촉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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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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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벵골 출신으로 미국에서 자라고 생활하는 작가 줌파 라히리. 그에게 이민자 문학의 거장이라 이름 붙이자, 그럼 거주자 문학이 따로 있느냐라고 반문하는 작가다.

가족이라는 삶의 마지막 보루이자, 천형 같은 관계를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같이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딸에게 아버지가 거부하는 모습, 남동생을 자식처럼 보살폈던 누나가 알콜 중독 때문에 결별하는 모습, 동향의 남자를 흠모했던 유부녀가 자살을 거두었던 장면 등. 각각의 단편들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의 관계들을 섬세하고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개인을 불편하게 하고 짐처럼 느껴지는 그 관계들이 단절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내일을 향해 열어 둔다. 혹자는 그것을 휴머니티라고 부르는데, 각 단편마다 훅하고 던져주는 깊이가 있다.

한편, 2부에서는 헤머와 코쉭이란 인물을 3부작으로 다루는데, 이들의 사랑은 결국 코쉭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죽음으로 인해 관계 맺지 않고 마음속에만 남겨지는 이, 가족을 구성하지 않고 끝냄으로써 아련하게 남겨지는 이의 삶이 이 가족이란 관계를 맺음하는데 가장 적격이지 않겠나 싶었다.

이런 단편소설을 읽는 것은 항상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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