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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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작가이다. 1954년에 18살 대학생이던 시절 쓴 소설을 지금 읽는데도 시대의 변화를 크게 느끼지 못하겠다는 것이 놀랍다.

생트로페에서 아버지와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는 세실에게는 아버지의 연인 엘자와 뒤늦게 도착한 안이 곁에 있다. 젊은 청년 시릴을 알게 된 세실은 제멋대로의 삶을 즐기고 싶지만 우아하고 품위 있는 안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안은 바람둥이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결혼을 앞두고 있다. 안에 대한 반발로 세실은 자그마한 복수를 결심하고, 아버지는 결국 천박하게 여겼던 엘자와 한눈을 팔고 이를 발견한 안은 자신도 그의 정부에 불과했음을 알고 깊은 슬픔을 느낀다. 파리로 향하던 안은 자동차 사고로 죽고(작가의 회고에서 사강은 안이 핸들을 절벽 쪽으로 일부러 틀었다고 말한다.) 세실은 안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그녀가 떠나고 난 후 다시 보는 시릴이 얼마나 시시한지를 느낀다. 뜨겁고 비극적인 여름을 보내고 난 세실은 말한다. 슬픔이여 안녕이라고. Bonjour Tristesse.

의외인 점은 슬픔이여 안녕의 ‘안녕’이 굿바이가 아니라 봉주르라는 점이다. 뜨거운 시절을 보내고 주인공은 담담히 슬픔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 쉽게 읽을 수 있고, 진지한 잣대로 보자면 시릴과 엘자가 왜 이리 어리석게 움직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도 있지만, 저잣거리에 나와 있는 인간의 마음이란 이렇지 않을까 공감하게 되는 면이 분명 있다.

강렬하고 날카로운 순간의 욕망을 느끼고 감지하는 세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얼마나 나의 욕망을 읽고 있는지 묻게 되며, 지나온 세월만큼 슬픔과 인생의 무게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묻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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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사람을 얻는 기술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정영훈 엮음, 김세나 옮김 / 원앤원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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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스페인에 살았던 철학자 발타자르 그라시안. 그가 쓴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즉, 원문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목차만 살펴봐도 살벌할 정도로 현실적인 조언들이 있는데, 일부는 마음에 새기게 되는 말이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착한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 사람은 자신의 명망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 극단적으로는 교활해져야 한다고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 영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내심을 모두 오픈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

일부는 현실 세계에서 충돌하는 내용들이 있다. 이 시대가 명예와 명성을 과연 17세기 스페인처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 자본이 최우선인 시대에, 명예와 명성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초반 챕터와 후반 챕터에 충돌하는 내용이 있으니 판단해 가며, 살아온 환경과 처한 위기에 맞게 적용하면 좋겠다. 고전적인 명성 관리에 대한 기본지침을 파악할 수 있어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가 조언한 대로 살고 싶지는 않다.

내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기준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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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 좀 빌립시다 문학동네 시인선 55
이현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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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호 시인의 시집은 두 번째로 읽는다. 처음 읽었던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에서 부드러우면서도 근성 있는 내면이 느껴져 그의 작품을 찾아 읽고 있다. 역시나 이 시집에서도 그의 끈질긴 고민과 고뇌가 은근하게 느껴진다. 그의 사색이 공허하지 않은 노래로, 그 뜻을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느낀다.

‘인간의 마음으로 끝내 완성할 수 없는 영원이란 말을 나는 발음해보고’ 싶었던 시인의 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지만 완벽을 위해 그 문장을 남기지 않는다’는 봉쇄수도원의 구절. 그리고 ‘마음이라는 이생의 풍토병’을 앓고 있는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이번 시집에서는 특히 4부가 마음에 와닿았다. 두고두고 펼쳐 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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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닭 연구소 문학과지성 시인선 310
장경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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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린 시인의 시에는 독특함이 있는데, 그 본질은 자본주의에 종속된 삶에 대한 성찰이라 생각한다. 전작과 비교할 필요는 없겠지만, 역시 장경린 시인이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작품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작가의 시를 계속 팔로우하고 싶게 만드는.

특히나 이번 작품에서는 <회전문>과 <사랑한 후에> 그리고 <토종닭 연구소>가 좋았다. 삶으로부터 탈주한 줄로만 알았는데 다시 갇히고 마는, 나를 빨아들이고 마는 회전문 같은 삶. 그에 대한 통찰이 좋았고, 영원히 탈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구조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꾸 생각하게 만든다. <사랑한 후에>에서는 마지막 행, 통곡하던 벽이 어찌나 마음을 치고 가던지. 사랑이 끝난 후에 흐느끼다가 벽을 치며 울던 그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울음이 그려졌다.

몽유도원도 작품 연작도 대한 늬우스 연작도 인상 깊게 읽었다. 다음에는 어떤 작품이 나올는지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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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7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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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사전>으로 유명한 김소연 시인의 시를 접한 것은 처음이다. 시를 읽으며 이토록 부드럽고 깊은 세계가 있다니 놀라웠다. 아침마다 몇 편씩 읽었다. 나를 힘겹게 하는 일을 만나면 문득 시의 한 구절이 떠올라 잠시 생각을 느리게 했다. 감정이 올라와 다투고 싶을 때, 김소연 시인의 시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갖게 한다.

특히 <연두가 되는 고통>의 한 구절,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이 마음을 쳤다. 무슨 뜻일까 고민했었는데, 나 역시 누군가의 흉터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긴 흉터는 무엇일까. 타인이 내게 남은 흉터 속에 그 사람들은 살고 있고 영원히 회피하거나 도망치며 살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식구들>의 ‘이해한 세계는 떠나야 한다’는 구절을 읽으면서는 그 흉터들을 이해하고 그 기억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는 시들. 굉장히 많은 시들을 필사하고 다시 읽었고, 또 읽고 싶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황현산 선생님이 발문을 쓰셨는데 이를 읽는 재미도 있다. 다른 비평가처럼 시를 해석하고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고, 편지 형식의 말이라 더 좋았다.

소장해야 하는 시집.

이해한 세계는 떠나야 한다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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