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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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사숙하는 영역과 범위는 우주만큼이나 넓다.

작고하신 허수경 시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 시집이 더욱 그러하다. 모국어를 쓰지 않는 독일에 살았던 시인이 5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생각하고 기록했던 시들이다.

시인은 ‘나’와 ‘당신’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무엇입니까를 물었으며, 시간에 대해, 떠나온 것에 대해, 사이에 대해 숙고하고 있다. 이 시들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도 없거니와 그저 시인이 고민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나 역시 내게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당신’이라 칭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이 내게 지니는 무게는 무엇인가, 나는 여전히 여름 속에 서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수 년 전의 여름이 고대 빙하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인가, 벌레를 털어버리듯 내가 떠나보낸 것들에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얼마나 긴 어둠 속에 있어야 나는, 언어로 집을 짓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같은.

내게 시인들은 시를 통해 해답을 일러주기도 했고, 답 없는 끈기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내 마음속에서 한 꺼풀 더 아래로 내려가라는 가르침을 주기도 했는데. 시인의 이 시집은 내게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틈새와 사이, 극과 극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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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허우잉 지음, 신영복 옮김 / 다섯수레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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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대혁명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 그중에서도 인텔리겐챠 계급을 다룬 소설. 문화혁명을 10년 대란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른 후, 역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인텔리 계층을 다루고 있다.

위화의 <인생>이 농민계층의 중국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대약진 운동의 고통과 실패를 보여준다면, 다이허우잉은 지식인들이 겪은 문화대혁명의 고통을 그려낸다.

작가 자신이 역사의 격랑 속에서 처절하게 투쟁하고 부르주아 휴머니즘을 주창하는 수정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비난받은 경험이 있다. 격동 속에 무수히 경험하고 관찰했었기에 인간 만상이 핍진하게 그려졌다.

등장인물들은 다양하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역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 철저하게 고민하고 실행하는 인물, 회피하는 인물, 패배를 받아들여 사는 문제에만 집중하는 인물, 사상적으로 뛰어나지 않지만 모략을 만들어 반대자를 위협하는 모습 등.

그러나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계급투쟁, 노선투쟁, 문화혁명에 대한 재평가가 아니다. 그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삶을 보여주고, 인간의 삶은 역사처럼 간략할 수 없으므로 그들이 영혼을 되찾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더불어 마르크스주의가 휴머니즘과 양립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방관자, 기회주의자, 패배를 경험한 현실주의자, 사상적 기반은 약하고 복지 부동하는 당 고위 인사 등의 부정적 인물조차 안쓰러운 마음으로 보게 된다. 그들이 겪은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진실’과 ‘마음 부칠 곳’은 각자 다른 법이다.

이 책의 재미는 긍정적 인물보다 부정적 인물을 관찰하는 데에 있었다.

자신이 상처 준 사람에게 ‘용서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뻔뻔함, 그가 최후에 흘리게 되는 눈물, 잃을 것을 잃고 되찾을 것을 되찾았다고 하는 자오젼후안의 서사는 흥미롭다. 방관자, 배신자, 이기주의자인 자오젼후안은 소설의 시작과 끝을 차지하는데, 이 배치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자오젼후안에게는 반성과 심판이 필요했고, 그 이후에는 이런 인물조차 끌어안는 인간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었을지. 휴머니즘을 깊게 고민했던 작가는 이 배치를 통해 더 많은 인간을 끌어 안는 방향을 긍정했다고 본다. 그 인간은 물론, 수용 가능한 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주인공 쑨위에와 허징후는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남은 이들임에도 타인에 대한 마음을 닫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자신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지키며 역사와 인민과 관계를 맺고 살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정도로 잃어봤기에 도전에 응전할 수 있으며, 문화대혁명의 상처로 인해 ‘얼굴이 두꺼워져’ 어떤 모욕도 이겨낼 수 있다.

인물 한 사람 한 사람마다에 격동이 느껴졌다. 우리 시대는 이런 격동과 치열함을 촌스러운 것이라 조소한다. 그러나 인물들의 철저한 고민과 처절한 경험은, 사회는 물론 역사와 종횡으로 관계를 맺은 개인이 살아가는데 필요하다.

쑨위에의 15살 딸 한한은, 왜 우리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역사는 어깨에 짐을 지우는지 한탄했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함께 돌리고 더 성숙한 어른이 되어 오늘보다 나은 미래와 관계할 것이라 소망한다. 이 소설이 중국에서 발표된 것이 1980년. 한한이 성장해 89년 천안문 사태를 맞았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한한이, 부모 세대의 고뇌와 삶을 보며 자기 인식과 생각의 개성을 키워나갔다면 천안문 사태에서 자기만의 입장을 가졌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은 곧 한한의 삶이 되고 개인의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나도 한한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는 것, 역사는 물론 나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나만의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들 격동적인 인물들을 보면서 어떤 순간에든 선택은 나의 몫이지만, 그에 대한 책임 역시 전적으로 내게 있다는 것을 무겁게 받아들이게 된다.

역사의 격동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고민하고 그 결과를 삶으로 증명했던 인간을 향해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신영복 선생의 번역이라 더 부드럽게 읽을 수 있었다.

이루어 내려면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돼.

허징후가 쑨위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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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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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나는 현실에 참여하진 못하면서 책을 읽으며 삼라만상을 고민하는 백면서생이다. 친구는 혁명의 장으로 떠나지만 나는 조르바를 만나 크레타 섬에서 새로운 인간과 가치관을 배우고 경험한다. 조르바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도자기를 굽는데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를 잘라 버릴 정도로 그 순간에 모든 것을 던지는 사람이다. 국가, 종교, 영원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이라면 자유롭게 살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신도 악마도 모두 같은 것이라 여기며, 순간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런 조르바도 노동에 대해서는 자신이 맡은 임무에 대해서는 철저히 열심히 한다. 그러나 나와 조르바의 케이블 매설 및 통나무 운반 사업은 실패한다. 백면서생이던 나는 이 실패를 통해 변화한 모습을 증명한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자유로운 사람. 두려운 것이 없어진 사람. 조르바와 나는 그날 해변에서 포도주와 양고기를 먹으며 호탕하게 웃어버리고,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이별을 한다.

주인공 나는 몇 건의 죽음을 목도한다. 수도원에서 발생한 살인, 동네 과부에 대한 비뚤어진 사랑에 자살한 남자, 그 남자를 위해 마녀사냥하듯 과부를 죽이는 동네 경찰, 떠나간 4대 열강국의 제독을 그리워하면서도 여염집 부인이 되고 싶었던 오르탕스 부인의 병사, 수도원에 불 지르고 떠나와 죽은 수도승, 혁명의 장에서 성공을 앞에 두고 폐렴으로 사망한 친구.

그들의 죽음 속에는 삶의 부조리, 삶의 규율이 가르친 부조리, 목적성의 허망함 등이 모두 녹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자유롭게 사는 인간이 되지는 못했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조르바가 사소한 녹암을 보러 오라고 했을 때,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조르바가 생에 단 한 번뿐일 기회라고 말했음에도 말이다. 조르바가 말했다. 당신 같은 펜대 쟁이들은 책을 읽고 소매상점 같은 머리 때문에 지옥에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결혼을 원치 않았던 조르바는 25세의 러시아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가졌고, 산투르를 남긴 채 죽는다. 주인공 나에게 지나가는 길에 산투르를 가져가라는 유언을 남긴 채.

인간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소설. 왜 자유로워야 하는지, 지금 나를 옭아매는 규율과 규칙, 온갖 이성이 무의미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 과연 내게 지금, 외국에 있는 귀한 친구가 예쁜 돌덩이가 있다며 보러 오라고 한다면 나는 보러 갈 것인가?라고 묻게 된다. 일단 시간과 경비는 문제가 없다. 조르바가 부른다면 나는 달려가고 싶다. 그와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이제껏 알아오던 세계와 다르며, 한 번뿐인 인생에서 최고의 쾌락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조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조르바도 책임은 지고 살았다. 타인에 대한 연민을 느꼈고, 그 연민 때문에 지키지 않을 약속을 했다. 조르바는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인간의 선한 본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그 심성을 갖고 살 수 있을 것인가 묻게 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유롭고, 지금 두려워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의리, 불합리한 것에 대한 저항, 안쓰러운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어주고자 하는 인간성이었다. 조르바가 가진 미덕은 그러했다.

한 가지 더, 이 책이 주는 미덕이 있다. 주인공의 나이가 35세이고, 조르바의 나이가 65세이다. 주인공은 그때까지 백면서생으로 살았고 조르바를 만나면서 변화를 겪으며, 조르바의 죽음 이후에도 한 번 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조르바는 65세까지 자유롭게 살았으면서도 이후로도 삶의 모험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파문당했다. 이 책에서도 자주 신과 악마는 같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몇 차례 종교재판에 회부된다는 협박도 받았으며 <최후의 유혹>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맹렬히 비난받고,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작가의 인생에서 실재 만났던 조르바, 그를 모델로 쓴 이 소설, 조국과 종교계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글을 썼던 작가이자 정치가이자 사상가.

조르바의 투박하고 거침없는 열정만큼이나 작가가 실천한 삶이 존경스러운 책이다.

나의 삶도 계속해서 실천하고 행동하고 경험하는 삶이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그리고, 작가의 묘비명에 적혀있듯,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일 때 두려운 것이 없으며 비로소 자유로운 인간이 되리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P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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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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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출간되어 절판됐던 책이 11년 만에 다시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구입해서 읽었다.

674층 빌딩, 인구 50만 명의 도시국가 빈스토크를 배경으로 연작 소설마다 각기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2020년 현재 가택연금 상태인 전직 대통령’과 그 시대가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야만의 시대였다. 물질 만능의 환상은 사회 약자의 희생을 당연시 여겼고,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연대를 조롱했다. 용산 참사와 크레인에 올라간 노동자의 절규, 북한에 대한 맹목적 적대감, 바보 대통령의 죽음. 국가 권력의 폭력보다 더 참담한 것은 그 모든 비극에 조롱과 물질 만능의 욕망으로 답한 사회의 스피커와 붕괴된 상식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배명훈 작가는 그 시대를 상상력 풍부한 소설로 그려냈다. 소설이 그려낸 이야기는 재기 발랄하다. 재미뿐 아니라 냉소적인 지성과 끈끈한 감정이 느껴져 쉽사리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현실은 비참했지만, 각각의 소설들에서는 체증처럼 얹힌 것들을 상당 부분 해소해 준다. 풍자와 냉소, 때로는 따듯한 인간성을 통해.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 편에서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화자와 등장인물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이 편을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찌 보면 이 소설집을 통틀어 가장 올드 한 감성이 그려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시대를 지나온 후에 읽으니 가장 감정이 뜨거워지는 작품이었다. 민소가 구조될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결말은 안도의 한숨을 자아냈다. 한편, 잉여들의 자발적 행위는 종종 비웃음을 사지만, 이곳에서는 뜨거운 연대로 그려진다.

같은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이 속속 그 시절을 표현한다. 영화, 드라마, 시, 소설, 미디어 논평 등. 그들은 각기 다른 그릇에 자기들만의 색깔을 담아 수신자에게 다양한 감정을 선사한다.

배명훈 작가가 그려낸 시대는 소설로서 일단 재미있다. 풍성한 상상의 세계를 접할 수 있어 이채롭다. 씁쓸한 그 시절의 욕망을 차가운 시선으로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는 관점이 좋다.

‘그 시대’는 우리 사회에 트라우마를 남겼는데 그 상처 중 하나가 극단적 편 가르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타워>에서는 당신이 만약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방관자만은 아니라고, 그래서 당신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당신의 상황과 판단을 존중한다는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 읽기 전에는 작가의 풍성한 상상력을 배우고 싶었지만, 읽은 후에는 다른 입장에 배타적이지 않은 태도에 감동받았다.

배명훈 작가를 SF 작가로 분류하는 평가를 접하는데, 이 책이 SF 장르로 분류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어떤 작가를 규정하는 말들은 좀 더 신중했으면 좋겠다.

<타워>는 상상력 풍부한 풍자소설로 읽힌다.

그중에는, 이번에야말로 빈스토크가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판을 막을 의인 열 명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 위치에 몸을 숨기려 하기 때문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로 한 날. 그렇게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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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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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은 참 깊이 느끼고 생각한다. 

같은 단어도 비슷한 상황도, 마음으로 생각해 그것을 가장 적확한 언어로 표현해 낸다는 데서 존경을 느낀다. 이병률 시인의 이 시집이 그랬다.

여러 작품 속의 화자는 안간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비를 피하려고>에서는 원하는 일을 하면 벌이가 안 되는 처지에, 세상의 비를 피하려고 잠시 다른 일을 하다가 퇴직하는 순간이 그려진다. 비가 오는 날 사무실 짐을 챙겨 나오는데 그것이 바닥에 쏟아지고, 그를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벌레라 생각할 것이라 인식하는 화자가 있다. 남루한 순간에 화자는 자신을 기웃거리는 존재라 자조한다.

이 서글픈 현실을 아등바등 살아감에도, 다른 시들에서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다시 태어나거든>에서는 ‘이번 생애는 한 덩어리의 완전한 혼자가 되어라’고 굳건한 고독을 격려하고,

<내가 쓴 것>에서는 자리를 비운 사이 카페 안 익명의 사람들 덕분에 ‘쓸 수 없어서 시일 때가 있다’는 각성의 순간을 맞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이 온다>를 통해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라며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구아수 폭포 가는 방법>에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린다.

세상은 기대와 다르게 굴러갈 때가 많고, 대부분의 삶은 쓸쓸하지만 내 마음 한곳을 비워 기다림을 둔다면 사람과 연결되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 스스로 생의 쓸쓸함도 넉넉하게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마침내 만날 사람에게 나 역시 그 사람이 닫지 못하는 문을 닫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남루한 현실이 결코 초라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시집.

안간힘을 내어 살아가는 와중에도 사람의 자리를 남겨두고, 내 스스로는 완전한 혼자가 되어 타인의 상처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격려하는 것만 같다.

시의 화자들은 고독하고 힘겨운데, 시인의 시를 읽으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게 된다.

은근한 힘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시집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P44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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