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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평점 :
병자호란을 맞아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와 그를 따른 척화파 김상헌, 주화파 최명길, 산성 안 대장장이 서날쇠, 청나라 역관 정명수 등을 중심으로 삼전도의 굴욕까지를 다루고 있다.
역사에서도 알다시피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왕과 고매한 사대부는 전투 준비조차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청과 싸우자고 재촉하고, 최명길은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지만 척화파들은 그를 역적이라 싸운다. 굶어 죽어가고 얼어 죽어가는 산성 안에서 그렇게 왕과 사대부들은 말 잔치를 벌릴 뿐인데, 심지어 우연찮게 발견된 벤댕이 젓을 어떻게 나누어줘야 할지를 왕과 상의하기도 한다.
한편, 성안에 사는 대장장이 서날쇠는 왕의 피난 행렬이 당도하기 전에 가족을 단속해 성 밖으로 내보내고, 자신의 할 일을 한다. 김상헌의 요청으로 병장기를 만들고, 쇠바늘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에 대바늘이란 해결책을 내놓고, 삼남의 군을 모으기 위해 스파이의 길을 걷기도 한다. 유일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자 실천주의자인 서날쇠.
흥미를 끌었던 장면 중 하나는, 방편 없이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길 바라는 조선은 모욕적인 청나라 칸(홍타이지)의 서신에 답신을 준비한다. 그러나 역사에 길이 남을 문서에 이름을 올리기 싫은 선비들은 임금에게 똥얘기 가득 담긴 문장을 올려 곤장을 맞고 글을 못 쓰는 상태가 되고, 자결에 가까운 심장마비로 죽음 덕분에 오욕을 피하는 사람이 있고, 미친 척하고 안시성의 예를 들어 문장을 짓는 사람이 있다. 보다 못한 최명길은 청나라를 황극이라 칭하며(하늘의 의미) 군대를 물리라는 간곡한 뜻을 지닌 문장을 쓰는데 조정에선 이것은 문장이 아니라며 다시 한 번 말잔치가 벌어진다. 허나 최명길은 말한다. 내가 쓴 것은 문장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글이 아니고 길이다.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나가기 위한 길이 될 것이라 말하며 치욕을 견디는 최명길. 그러나 그 문장은 내지르는 문장을 좋아하는 홍타이지의 심사를 건드려 대포로 응징 받지만, 어쨌든 항복의 성문이 열리는 시간을 앞당긴 것은 사실이다.
말잔치 속에 빛나는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이토록 무능했던 왕과 권세가들이 청나라에서 눈을 트고 온 소현세자를 독살했을 것이란 역사를 생각하며 암울했던 한 시대를 생각한다.
김훈의 전작 <칼의 노래>에 비해 인조를 비아냥거리거나 못난 왕으로 그리지는 않는데, 각자의 심사를 묘사하지 않아도 그 상황에 울고 있고 헛된 말을 오가는 모냥 만으로 충분히 무능함을 알 수 있다.
김상헌이 죽였던 나루터의 사공, 그 사공의 딸 나루가 산성으로 오는데, 나루와 김상헌을 드라마적으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 절제를 아는 작가의 힘이라 하겠으며,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나라 군대보다 더 생존을 위협했던 왕 일행이 돌아가고 봄을 맞이한 서날쇠와 나루, 나루의 미래를 생각하며 혼자 웃음 짓는 평민의 삶으로 마무리한 결말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