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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이상하게 국내 소설을 자꾸 등한시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폴링인 폴> 책도 표제인 폴링인 폴만! 읽고는 책꽂이 행이었으니 나도 참 한심하다. 그래서 올 8월은 여름이 들어간 국내 도서 3권 읽기와 피철철 국내 도서 3권 읽기로 나름 계획을 세웠다. <여름의 묘약>이후 <여름의 빌라>가 그 두 번째 책인 셈이다. 제목과 표지에 훅 끌려 들여놓고 보니 폴링인 폴의 작가였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여덟 편의 단편들은 섬세한 일상과 작은 감정선들이 돋보인다. <시간의 궤적>편에서 떠올린 가슴 아픈 인연, <여름의 빌라>편에서 느낀 관점의 차이, <고요한 사건>편을 보며 떠올린 망각의 즐거움, <폭설>편에서 다시 돌아본 한 개인의 삶, <아직 집에 가지 않을래요>편에서 공감한 체념 속 꿈틀대는 욕망, <흑설탕 캔디>편에서 닮고 싶었던 놓치고 싶지 않은 욕망, <아주 잠깐 동안에>편에서 볼 수 있는 선과 내재된 이기심의 충돌,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편에서 꿈틀대던 본능의 속삭임.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이야기들을 읽는 동안 <폴링인 폴>의 나머지 단편까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의 궤적>을 읽다 보니 <폴링인 폴>이 언뜻 비친다. 작년 2월에 읽었음에도 기억이 선명한 것은 이 단편에서 느꼈던 감정이 시간의 궤적에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공통분모를 찾길 좋아한다. 낯선 공간에서 의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공통점을 발견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시간들은 솔직함과 무심 앞에 정체를 드러낸다. 각자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되기까지의 상황을 지켜보며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느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 속에 남은 씁쓸함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흔적으로 남아 나의 일부를 건드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먼 타지의 땅(프랑스)에서 찾아낸 언니와 나 사이의 공통점(상실을 뒤로하고 떠나온)은 그들의 시간을 하나로 만들어 주었고 각자의 모자람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불완전한 선택의 운명대에 놓일 수밖에 없고 그 실체를 가늠하지 못한 채 흘러간다. 그렇듯 남겨진 자(나)와 떠나는 자(언니) 사이에 놓인 격차는 물리적 거리보다 더한 거리감으로 그들 사이를 벌려 놓는다. 그렇듯 위기는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고 적절한 궤도에 안착하게 된다.
비 오는 날, 그대와 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 될거예요.라는 노랫말이나 퍼붓는 비를 보며 펼쳐 든 우산 속으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던 그 순간들이 궤적으로 남아 한 번씩 나를 흔들 것이다.
표제작이자 찌릿하게 저렸던 <여름의 빌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벽 앞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얼마큼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게 된다. 폭력이든 무력감이든 부정적 상황은 나를 소멸시킨다. 현실이 버거웠던 한국 부부는 독일 부부의 초대로 여름의 빌라에 초대된다. 하지만 유명 관광지의 모습은 각자 부부의 눈에 다르게 다가오게 되고 누르지 못한 불편한 마음이 말로 터져 나오고 만다. 허망했던 여름의 빌라의 기억이 치열한 현재의 삶 속에 떠밀릴 때쯤 독일에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어쩜 그리 인간은 참 쉽게 어리석음과 가까워지고 참 어렵게 깨닫는 것일까.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p.68
부부에겐 망고를 맛있게 먹던 원숭이를 보며 느낀 순간의 즐거움보다 캄보디아 아이들을 동물원의 원숭에 비유하며 비참하게 바라본 것이 더 기억에 남는다. 다 같이 즐긴 순간이었음에도. 하지만 독일 부부의 손녀는 그 귀엽던 원숭이와 함께 사는 집을 그림으로써 여행의 즐거움을 지속한다.
비정규직이라는 불안하고 억눌렸던 감정이 안타깝게도 삶의 즐거움마저도 빼앗아가버렸다. 편지를 읽고 난 뒤 자신들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던 타인의 삶을 알게 된 후 타인을 향한 공감의 문을 열게 된다.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p. 56
할머니의 우아함의 돋보였던 <흑설탕 캔디>는 할머니가 남긴 일기를 토대로 손녀가 할머니의 인생을 재구성한 글이다. 할머니는 떠났고 할머니의 생이 담긴 일기장에서 손녀는 할머니가 그토록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남들 눈엔 신여성이다 뭐다 해서 원 없이 하고 픈 거 다하면서 산 것 같지만 자식 앞에 선 어쩔 수 없이 또 희생이란 걸 해야 할 때가 있다. 어찌 보면 <폭설>편에서 어린 자식을 두고 외국으로 떠나버린 엄마와 대조적이다. 아들을 따라나선 외국행.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할머니의 마음을 움직인 건 음악이었다. 할아버지의 피아노 소리는 타국 땅에서의 외로움을 씻어 주는 계기가 되고 소통의 연결고리가 된다.
백발의 단발머리를 고수하던 할머니. 다재다능했던 할머니. 옛날이야기를 각색까지 해 가며 들려주던 할머니.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 남자친구까지 만드는 재주가 있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다시 생명이 움트듯 꿈틀대는 욕망 앞에 무너져가는 육체를 원망할 때는 짠하고 서글퍼졌다.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p.198
하지만 인생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들 덕에 끌어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p.201
브뤼니에씨가 마지막으로 할머니에게 전한 작별의 말은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했어요."가 아니었을까.
한편씩 읽으며 멈칫멈칫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가 주는 힘이란 우리를 둘러싼 겹겹의 다름과 층층의 편견 속에서 오해를 발견하는 것이 경계를 허무는 일임을 깨닫게 되고 결국은 서로의 세계로 자연스레 섞여 들어감으로써 나를 돌아보게 된다. 특히 각 단편에서 드러난 거침없던 인물들을 보며 더는 이해 못할 일이 무엇이랴라는 생각까지 더해진다. 더는 FM 적인 삶안에 나를 가둘 필요가 없음을, 나조차도 그런 단편적인 사고의 틀을 타인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는 사실까지도 더불어 생각하게 된다. 선을 지우고 새로운 선을 긋는 일이 나를 한층 더 성숙하게 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