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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평점 :
도와주세요!
여기 아무도 없어요?
만약 인생이 시간의 흐름대로 쌓아 올린 페이스트리 같다면 나는 어느 지점에 잠시 들르고 싶을까. 좋았던 시절? 혹은 무언가 바로잡고 싶은 시절? 혹은 망각의 기억 속에 꽁꽁 묻혀 있던 어느 지점?
소설 속 가상 프로그램처럼 무의식이 끄는 대로 가는 거라면 나의 무의식은 어느 지점을 서성거리게 될까.
고작 육십의 나이에 알츠하이머 위험 진단을 받은 이마치 여사는 치료를 위해 대안 치료를 받게 된다. 불치병과도 같은 알츠하이머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의사 제제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한 그녀는 VR이 재생되는 동안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아니 진짜 마주한다. 마흔세 살의, 마흔 살의, 서른한 살의, 스물다섯 살의, 열다섯 살의, 아기 때의 이마치를.
이쯤 되니 활성화된 기억을 토대로 남은 기억을 유지하게 된다는 치료의 본래 목적보다는 거울 치료가 되어 그 이상의 성과가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된다. 기억의 오류와 오해가 낳은 상처에서 새 살이 돋아나지 않을까 하는.
가족에 대한 환상을 무참히 깨준, 오로지 자신의 인생에만 충실했던 어머니로 인해 이마치의 유년기는 두 어둠이 존재했다. 언니의 죽음이라는 어둠을 피해 극장의 어둠으로 숨어들며 삶이 전환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연극은 환희이자 살아갈 이유가 되고 어린 시절 불행은 독한 거름이 되어 견딜 정신력이 된다. 모든 감정은 오로지 연기할 때만 쏟아붓는다. 정작 현실에서 그녀의 감정은 늙을 대로 늙어 무감각하고 지쳐있다.
이마치는 삶을 마치(march) 행군(march)하듯 밀고 나갔다. 정작 배우로써 커리어와 명성이 쌓여갈수록 진짜 삶에서는 자꾸만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그러다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아들의 실종. 거듭되는 가짜 삶 속에서 그녀는 점차 소멸되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초라한 노파-p.103)가 되어 혼자서 서서히.
진짜 내 집은 어디죠?
기억은 왜곡투성이다. 게다가 알츠하이머로 인해 이마치의 기억은 구멍투성이다. 출현한 작품을 떠올릴 만큼의 기억력이 있지만 정점에서 그녀의 삶은 텅 비어 있었다. 가상공간이지만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60층 아파트에서 그녀를 위한 길잡이가 필요했다.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죽박죽되어 혼란스럽던 시점에서 노아의 등장은 경계의 구분점이 된다. 자신을 몰아붙이던 시간들과 외면하고만 싶었던 시간들과 맥락도 없는 조각조각의 기억들 속에서 갈팡질팡할 때 노아는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간다. 마치 스스로 진화하는 AI처럼.
영화 <원더랜드>가 떠오른다. 출구가 없는 가상공간에서 일어난 결정적 오류가 치유의 길이 돼주던 그런 스토리였던 것 같다. 인간이든 기계든 불완전함을 극복하면서 발전하는 거니까.
인간의 기억은 부정적인 것에 훨씬 더 민감해요. -p.243
가상체험으로 그녀의 기억이 재정비되어갈 때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인생이 실상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또한 삶이 고통으로 가득했다는 사실도.
지나치게 스스로에게 고약하고 가혹했던 시간들 속에서 진짜 사랑을 놓아버린 사실도. 덕분에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엄마에게는 화끈하게 복수를 한다. 반면 그나마 그녀를 그럴듯한 유년으로 포장해 주었던 마치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마저도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씁쓸히 발걸음을 옮긴다. 낭만이 낭설이었다니.
연기는 그녀를 살게 했지만 진짜 삶은 놓치고 살았다. 패턴화된 삶을 현실에까지 끌어다 놓은 것이다. 가상현실도, 꿈도 내가 원하는 대로 재정립이 가능한데 왜 진짜 삶도 가능하단 걸 모르고 살았을까.
이마치's life March. 차가운 이마치의 내면을 서서히 깨운 건 K의 존재였다. 봄빛의 따스함처럼 되살아나 그녀의 마음이 녹아가는 과정이 아름답다. 특히 가상공간에서 느낀 삶의 허기는 긍정적 신호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본능뿐이다. 한때 라파트멍 60층 그녀의 공간을 가득 채운 빵 냄새. 진짜 집에서 딸은 작은 머핀으로 변한다. -p.281 그마저도 쇠맛이 되어 사라질지라도.
무엇보다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즐거웠다. 상상의 완결판은 나의 마치편이란 생각이 든다. 영상화하기 완벽한 소설이다.
*출판사 제공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