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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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 전 중학생 딸아이는 서서히 가족에서 친구라는 세계를 옮겨가며 제법 내 속을 썩였었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아이의 문은 단단했다. 비움과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던 그때 눈에 들어온 책이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였다. 제목에 내 감정을 담아 이 책을 선물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과연 책을 펼치기나 할까 하는. 다행히 책을 읽었고 다음 책인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도 <죽이고 싶은 아이>도 밀어내지 않았다. 휴대폰에 모든 관심사가 쏠린 딸아이에게 이번 작가의 신작이 반가운 건 당연할 터. 이참에 미처 읽지 못했던 첫 번째 책을 꺼내보았다.

며칠 전 채널을 돌리다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을 보며 이런 생각에 잠겼었다. 아날로그 정서가 그립다는. 나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함에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박스가 있다. 상자 가득 담긴 편지와 쪽지들은 마치 누군가의 영혼이자 그 시절의 나를 유일하게 떠올려주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가속도를 내며 편리함이라는 장점을 자랑했지만 그만큼 우리의 정서는 속도에 반비례하여 일그러진 채 관계의 틈을 심하게 벌려 놓았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그런 아날로그적 감성에 타임슬립을 더한다. 현재의 편지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도달한다는 플롯은 영화 <시월애>와 책 <나미야의 잡화점>의 감성을 닮아 있지만 가족이라는 존재는 더 많이, 더 자주 이해해야 137.p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기까지 그 느린 시간의 틈에서 조바심 나는 설렘을 떠올린 채 지금은 쓰지 않는 편지의 정서를 즐기며 은유가 은유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나갔다.

은유는 엄마의 이름조차 들은 바가 없이 15년을 지나고 있다. 입을 닫아버린 어른들 때문에 은유는 중2병을 넘어 반항의 수위가 높아져만 간다. 그러다 난데없는 새엄마의 등장에 시한폭탄이 되어가던 중 아빠는 뜬금없이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쓰라는 제안을 한다. 아빠를 흉보고 가출 결심까지 적어놓은 편지는 은유에게 도착한다. 1년 뒤의 미래가 아닌 500원의 동전이 탄생하고, 연탄가스를 걱정하고, 습니다를 읍니다로 쓰던 1982년 과거의 은유에게 말이다.

자칫 작위적 설정(과거를 바꾸려는 어설픈 시도)에 식상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작가는 그 지점을 조심스레 비껴가며 운명의 접점으로 향한다. 침묵과 무관심에서 기인한 은유의 투정과 하소연은 10살이었던 은유에게, 12살인 은유에게, 16살인 은유에게, 대학생인 은유에게 껑충껑충 전해지며 세상의 중심에 서 있던 은유를 더 너른 공간으로 이끈다. 과거의 은유는 누구보다 미래의 은유에게 적극적이다. 그 노력이 때로는 무모하다 못해 저돌적이라 웃음이 났지만 진심이 흘러가는 방향에 마음이 달콤해진다.

요즘 사회에서 꼭 필요한 화두는 '다정'이다. 가장 따스한 안도감에 마음이 일렁이던 지점이 새엄마의 이름이 등장했을 때였다. 다정씨덕에 아빠는 뒤늦게 잃어버린 미소를 되찾는다. 다정씨덕에 편지의 기적이 탄생했다. 어쩌면 과거의 은유가 보낸 선물이 다정씨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다정씨는 특별한 존재다. 아날로그적 다정함으로 관계의 꼬인 실타래가 풀려가는 과정을 보며 회복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아빠와의 시간이 떠올라 마음이 아려온다. 그땐 나도 어렸다. 선을 긋는게 최선이고 합리적인 삶이라고 자만했다.

그때로 돌아갔을 때 혼자가 아니었다면 달라졌을지도.

'1년 뒤 나에게, 1년 전 내가'보낸 편지에서 확신했듯 모든 게 바뀌었다. 은유는 아빠를 이해하는데 기적이 필요했지만 기시적 삶 속에서 필요한 건 대화다. 짐작은 쓸데없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비록 현재를 치유하기위해 세계를 건널 수 밖에 없었지만 편지가 흐릿해져갈수록 선명해지는 진실에 은유의 성장통을 보상받는 기분을 느꼈다.

아빠가 이제라도 딸에게 게으른 안부를 물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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