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816

글 제목신춘추전국시대의 간쟁(諫諍)


2500년전, 천하는 춘추전국시대()였다.

평화보다는 전쟁이, 안녕보다는 불안이, 화목보다는 분쟁이 일상이었다.

2500년이란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나는 춘추전국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바야흐로 디지털 춘추전국 시대로 도래했다.


춘추시대의 전차 대신 피드(feed)가 질주하고, 제자 백가들의 세치 혀는 알고리즘으로 증폭되고 있다

춘추시대 타임라인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분노는좋아요로 정량화되고, 서사는 짧은 영상으로 압축된다.

이 소란의 중심부에서 정치는 가속 페달만 밟고, 브레이크는 고장나 버렸다.

어쩌다 우리는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정치는 본질적으로 갈등 조정의 기술이다

그런데 조정 이전에 선택이 온다. 선택은 감정으로 쉬워지지만 결과는 감정으로 망가진다.

분노는 즉각적 보상을 주지만 장기 비용을 숨긴다.

서사는 결집을 만들지만 서사가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진실은 전리품이 되고, 제도는 장식이 되어버린다

그때 우리의 공동체는 이미 추락 궤도에 접어들게 된다.


원칙은 사람보다 앞서야 했다.

이름을 지우고도 설득되는 문장인지, 절차·법치·권한 통제가 지켜졌는지, 독립기관이 두려움 없이 일할 수 있는 구조여야 했다.

바로 그것이 정명(正名)이고, 최소한의 방호벽이다.

원칙이 무너지면 좋은 의도도 흉기가 된다.

승자의 자만은 법을 도구로 만들고, 패자의 집착은 절차를 폐지하려 한다

승자든 패자든 둘 다 결국 제도라는 다리를 불태워 버린다.


수치(數値)는 말의 검증서다. 국가의 말은 지표로 환산될 때만 현실이 된다.

물가, 가계 이자부담, 전월세 상승률, 청년고용의’, 수출·투자 흐름, 재정수지와 국채금리, 환율 안정성, 안보 사건과 억지력등.

이 모든 항목에 대해 분기마다 개선되는지, 악화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설명이 길수록 숫자는 짧아져야 한다.

책임은 말이 아니라 추세선으로 져야 한다.


두 축을 곱해 보자

(원칙과 정당성) × 성과(수치와 실력)법치·성과로 나오면 신뢰, 법치·성과가 되면 개선 전제 조건부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답이 법치·성과로 나오면 위험한 효율이니 거부해야 하고, 법치·성과 라면 반드시 교체해야 한다.

이 매트릭스가 투표 한 번의 계산을 넘어, 매일의 시민 행위가 되면 선동은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선동은 감정의 시계를 앞당기지만, 지표는 시간을 정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도자에게 요구할 것은 간단하다.

서사를 줄이고 데이터 대시보드를 늘려라. 공약은 KPI로 번역하고, 분기별 목표-실행-검증을 공개하라. 실패하면 즉시 대안 플랜 B로 전환하라. 사면·인사·감사의 기준을 규칙으로 명문화하라. 외교·안보·경제의 돌발 변수엔 자동 안정화 장치를 걸어라. 법원과 감사, 통계기관의 독립을 권력의 외벽으로 삼아라. 그 외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지지율은 단지 지연된 붕괴일 뿐이다.


야당과 비판자에게도 주문이 있다.

분노를 원칙으로 냉각하라. 감정적 언행을 줄이고, 기록·판례·절차로 말하라. ‘순교 서사를 절제하라.

폭력과 불복의 유혹에서 물러서라. 중도를 설득할 언어는 언제나 근거다.

근거가 약하면, 오늘의 환호는 내일의 고립으로 돌아온다.


시민의 자리는 더 중요하다.

뉴스는 하루 20분만, 가계의 숫자는 매일 10분 이상.

가족의 KPI, 현금흐름, 부채 금리, 식비·주거비, 건강·관계가 정치 뉴스보다 먼저다.

의견을 말할 때는 출처·기간·비용·대안을 함께 제시하라.

이름을 가리고도 설득되는 문장만 남겨라. 내 가족과 이웃이 모여 공동구매와 돌봄·비상연락망을 공유할 때이다. 국가는 이런 작은 질서의 합이다.


역사는 경고한다. 오왕 부차의 패망은 월왕 구천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결과 때문이 아니었다. 측정하지 못한 자신감, 절차를 압축한 효율, 반대의 목소리를 무시한 오판이 무너뜨렸다. 반대로 구천은 분노를 연료로 삼았고, 치욕의 순간을 끝내 견뎠다. 그는 감정을 안으로 묶었고, 냉정을 유지했다. 마침내 월왕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살아남음은 때로 승리보다 어렵다.


지금 우리의 정치도 이와 같다. 선동은 빠르고, 숫자는 느리다.

선동은 박수 소리를 모으고, 숫자는 침묵 속에서 신뢰를 쌓는다.

선동은 지도자를 영웅으로 만들고, 숫자는 제도를 신으로 만든다.

우리가 택해야 할 쪽은 분명하다. 원칙 위에 서고, 수치로 말하는 세상. 브레이크가 작동하는 세상. 느리지만 도착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와 서사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원칙이며, 수치다.

선동과 감정에 휩쓸려 원칙과 수치가 사라지면 2500년전에 사라진 춘추시대의 나라들과 다르지 않게 되어 버린다.

신춘추전국시대,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 by Dharma & Maheal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5-08-19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힐님은 항상 과거에서 현재를 읽고 미래를 제시하네요. 온고지신이로세!!!

마힐 2025-08-21 11:15   좋아요 0 | URL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过去心不可得,现在心不可得,未来心不可得) 이란 구절이 나옵니다.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바가 없다는 뜻이라 합니다.
고정되지 않은 시간이니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없다는 뜻도 되지요.
잉크냄새님, 매 순간 좋은 시간 되십시요. ㅎㅎ
 

관노트: 711

글 제목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두번째 여행


회사의 일을 함께 마친 나는 동료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기로 했다.


어라, 차 키가 없네. 집에다 놓고 왔나 보네. 동료들아, 잠시 기다려. 집에 가서 열쇠 가지고 올께.”

아니, 엘리베이터에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할 수 없다. 계단으로 올라가야 겠다. 7층에 다 올라왔다. , 근데 여기가 어디지? 주상 복합이라니원래 우리집이 이런 곳이 었었나? , . 우리집은 서쪽 끝에 있지. 그쪽 복도로 가자.


아니, 사람이 왜 이리 많지? ? 우리 절 신도님들 이신데?  이제 보니 지O이 아버지 장례식장에 가려는 분들 이잖아. 나도 가야 될 것 같은데아이고, 지금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떻 하냐? . 민O아, 너를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다. 내 부탁하나 있는데 좀 들어줄 래? 안된다고? 네가 내 부탁 들어주면 앞으로 네가 원할 때 나도 꼭 네 부탁 들어줄 께. 진짜라구. 그래? 고맙다. 저 건물 밖에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들 좀 집에 데려다 주면 고맙겠어. 정말 고마워.


, 문O법우님, 오랜 만이에요. O 스님 안녕하셨어요. 언제부터 계셨어요? , 저기 우리 절 신도님들이 차를 대절해 오셨네요. 지O이네 장례식 가려고 이렇게 들 많이 오다니, 혜자스님 오셨다.' 

"스님, 스님, 저어제가 혹시 안보이시나요? 스님, 혹시 옆에 계신 청 O 스님이 너무 밝으셔서 제가 안보이시는 것이 아닌가요

스님, 너무 배꼽 빠지게 웃으시는데요."

'아 저 보살님은 왜 스님을 발로 치 실까

각자 누구나 자기 차원에서 공부가 있구나.' 

"이제 지하로 내려 가시죠."


'아니, 지하가 이렇게 넓다니

무슨 광장도 이런 광장도 없는 것 같은데그런데 여기가 전부 장례식장이라니?

대문 안에 들어가니 정면에 불상이 모셔져 있네. 합장 삼배를 하고 들어가야지. 안에는 겉 보기와 다르게 진짜 넓고 사람들도 많구나.

지O이네 장래식장은 왼쪽이구나.


저 높은 사당안에서 스님들의 염불 소리가 들리는데, 조문객들은 사당 아래에 마당에 있었구나

이크. 웬 수레가 옆을 지나가지? , 저 수레에는 대나무가 잔뜩 실려 있네, 대나무로 화장을 할 때 태운다고? 그렇구나

그런데 비구 스님들 께서 직접 수레를 몰고 가시네. 잘못하면 쏟아 질 것 같은데, 다행이 전부 사당 앞에 잘 실려 왔구나. 이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자.


저기 상주인 지O이가 앉아 있네. 지O아, 심심한 위로를 표한다

아니 뭐야생각 보다 얼굴이 밝은데? 그래, 다행이다. 아버님이 이렇게 가신 것도 그나마 다행인 것 같구나. 그래

아 청년회 회장님. 정O아, 3배 해야 한다고? 위 사당에 계신 스님들께? 그래 알았어. 혜O 스님의 독경 소리가 들리네...


, 옆에 장례식장에 있는 저 사람. , 남대리, 15년전 전 직장에서 마지막이었는데 오늘 이런데 서 보게 될 줄이야?' 

"남대리 잘 있었어? 거기로 넘어 오라구요? 상주분의 호의는 고맙지만, 저는 인사만 하고 갈 겁니다. 남대리, 흰 드레스가 잘 어울리네. 아니, 임신했어? 신랑은? , 어디 잠시 나갔다고? 옆에 이 젊은 남자는 누구 신지? , 근데 남대리 한테 반말로 얘기하지 말라고요? , 네 알겠습니다. 꼰대 소리 안 들으려면 존댓말 해드려야죠. 알았어요. 앞으로 꼭 경어 쓸께요."

'아, 그런데 이제 의식이 돌아오는데….  에이, 꿈이 였구나.’

 

또 꿈이다.

일주일전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무덤 여행 뒤에 다시 또 지하 장례식 여행을 하고 왔다. 지난 번 꿈에서 혜자 스님께서는 조상이 바로 나라고 하셨다.

이번엔 아마도 그 전날 실제 지O이 아버님 부고를 보고 난 뒤 잠이 들었는데 그게 그대로 꿈으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어제 낮에는 가족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 봤다.

만약 윤회가 있다고 전제하고, 윤회 한번에 100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우리가 실제 문명의 역사는 대략 5천년. 그동안 100년에 한번 환생을 했다고 하면 50번 윤회를 한 셈이다. (그런데 겨우 50번의 윤회라니…)

그럼, 50번 윤회 가운데 현재 나의 가족이 만나게 될 확률을 대략 10프로로 본다면대략 5. 지금 나의 가족이 또 다시 똑 같은 가족으로 만난다면? 천년에 한 번이다.

아니, 뭐 엉터리 계산인 것은 확실하지만 지금 가족으로 다시 만나게 될 확율은 긴 역사 속에서 희박하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천년에 딱 한번, 맺어지는 가족의 인연이라 생각을 하니, 갑자기 너무 아련해진다.


부모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된다고 큰 스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또다시 지금 이대로 가족이 되려면 천년에 한번 맺어지는 인연일 수도 있다.

일기일회(一期一会, 생에 한번 뿐인 만남)이다.

내 부모, 내 아내, 내 자식, 내 형제 같은 인연은 정말 천년에 한번 또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인연이라니

정말 순간순간 마주하는 모든 인연들에 대하여 소중히 생각해야 겠다.

15년 전, 크게 의미 없었던 직장 동료도 꿈에 나오는 데, 언제 또 다시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로 헛된 인연은 없는 것 같다.

꿈이 그냥 꿈이 아닌 것 같다.

무덤 속과 장례식을 다니면서 나의 의식은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세계로 가는 것일까?


🖋 by Dharma & Mahea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관노트: 75

글 제목재난에서 살아 남으려면오직 Attention !


7월에 일본에서 큰 지진이 날 거라는 소식이 들린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TV에서 보았던 쓰나미가 곧 다시 몰려온다는 것이다.

설마재난이라…. 하지만 우리는 늘 불확실한 오늘을 살고 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처럼 또 다른 재난이 잇따라 일어날 것이다.

TV에 등장하는 재난의 피해자가 곧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는 현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나는 생존을 생각해본다

어떻게 똑 같은 재난을 겪는데 소수의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소수의 생존자는 운이 좋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생존은 운이 아니라, 위험을 눈치채고 움직이는 다른 능력, Attention덕분일지도 모른다.

Attention은 흔히집중이라고 번역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깊은 개념이다.

Attention수많은 정보 속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을 고르는 힘이다.

세상은 겉 보기에는 무작위 같아 보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리적인 법칙이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모든 영역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최근 들어 세상은 결국 패턴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패턴을 본다는 건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평소와 다른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게슈탈트 심리학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사람의 뇌는 조각조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그림을 보려고 한다.

그게 바로 패턴을 읽는 눈이다. 그리고 그 눈이 바로 Attention이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관() 이라고 불렀다

있는 그대로 보고, 거기서 길()을 찾는 눈이다.


AI도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AI는 문장을 분석할 때 모든 단어를 숫자로 바꾼다. 이걸 벡터(VECTOR)라고 한다. 그리고 그 숫자들이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를 계산한다. 그 계산을 코사인 유사도(Cosine Similarity)라고 한다.

비슷한 단어끼리 묶고, 그중 제일 중요한 단어를 고른다.

그 기술의 이름이 바로 Transfomer이다. (트랜스포머는 변화를 만든다)

왜냐면 AI가 언어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단어에 주의를 집중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무엇인가?”

사람도 바로 이러한 Attention으로 생존을 거듭해 진화를 해왔다.

우리 뇌는 늘 수많은 정보 중 “지금, 뭐가 중요하지?” 를 찾고 있다.

그렇게 확률적으로 높은 생존의 방법을 찾았고 그것이 진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300년전, 18세기 영국의 토마스 베이즈(1701~1761)라는 목사는 이 같은 생각을 수학적으로 풀어냈다.

“새로운 증거가 오면, 나는 원래 믿고 있던 생각을 고쳐야 한다.”

그가 내놓은 베이즈 이론은 기존의 도박의 확률을 계산하는 수학과는 전혀 다른 발상이었다

당시 그의 발표되지 않은 이론은 바로 이 시대 인공지능의 DNA가 되었다.


"Attention is all you need: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집중 뿐이다."  2017년 구글에서 발표한 이 <Transfomer> 논문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인공지능의 발전을 앞당긴 촉매제가 되었다.


18세기 창발의 시대에서 21세기 인공지능의 시대는 모두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GPT, 구글 제미니, 딥시크 같은 인공지능은 모두 인간과 같은 방식의 사고를 모방하고 있다

그 사고를 이루는 핵심이 바로 Attention이다.

우리는 그 원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결국 인류의 생존에서든, 인공지능의 진화에서든, 모두 Attention이 필요하다.

그렇게 Attention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알파요 오메가가 된 것이다.

패턴, 게슈탈트, () 그리고 Attention.

이 모든 말은 하나를 뜻하고 있다.

“불확실하고 혼란한 현실 속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신호를 찾으라는 말.”

그리고 그 신호를 놓치지 않는 것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자 바로 Attention이다.


생존이든, 변화이든, 또 진화이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Attention이다.

Attention 은 자각이자 깨어남이다.

동일본 지진 예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우선, 당황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켜봐야 한다. 나와 내 주위의 변화를. Attention!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오늘의 시대에서 Attention은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확실함이 아닐까?


🖋 by Dharma & Maheal   

패턴을 읽는 (Attention, ) 생존하고
연결을 모르는 (Isolation, ) 침몰하며
변환을 거부하는 (Stagnation, ) 백년을 표류하게 된다.

생존은 Attention()에서 시작해
Connection(
)으로 성장하며
Transformation(
)으로 완성된다." ( 문장은 DeepSeek-R1 AI와의 대화에서 공동 창작된 내용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5-07-05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attention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옛날 영어 교육의 잔재가 너무 많은 우리는 ‘어텐션-바우‘ 로 이어지는 고리를 먼저 끊어야 통으로 성장하고 변화로 완성될 수 있을 듯 해요.

마힐 2025-07-05 22:44   좋아요 0 | URL
전 어릴 때 성룡 영화 <프로젝트A>에서 어텐션을 처음 들었는데요.
그때 부터 어텐션은 ‘차렷‘ 인줄 알았습니다. ㅎㅎ
그런데 그 차렷이 ‘정신 차렷‘ 이었네요. 안 끊어 내도 될 것 같습니다. ㅎㅎ
 

관노트: 7 3

글 제목이승과 저승의 경계 사이에서


새벽 꿈이다.


나는 새벽 녘 산길에서, 혜자 스님을 만났다.

스님께서 나를 보시고는 급하다고 얼른 따라 오라고 하셨다.

스님은 앞장 서시며 아주 큰 무덤, 왕릉처럼 큰 무덤 안으로 들어 가시려 하셨다.

무덤 입구에서 나한테 후레쉬가 있냐?” 고 물으셨다.

때마침, 파란색 손전등을 나는 쥐고 있었고 등을 켜서 스님께 건네 드렸다.

빛이 그리 밝지 않는 것 같아서, 내 손의 핸드폰 후레쉬를 하나 더 키고 스님 뒤를 따라 갔다.

무덤 속은 캄캄했고 무척 넓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갔다.

그저 스님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가면서도 무서운 마음이 올라왔다.

스님께서는 그 어두운 무덤 속을 마치 전부 다 보이시는 것처럼 능숙하게 찾아 가셨다

꺽어 돌아가는 면이 많아, 나 혼자 왔다면 분명 길 잃어버리기 쉬웠을 꺼라 생각하면서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갔다.

드디어, 어느 제단 앞에 도착했다.

스님께서 어떤 의식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초를 켜고 향을 피웠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스님께서는 이제 괜찮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제단 바로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 가셨다.

방은 작지만 침대 하나가 놓여 있고, 홀로 수행하기 딱 좋은 토굴 같았다.

그때 내 뒤에서 묵직한 무언가 가 나에게 기대어 왔다.

순간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또 사람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스님, 여기 뭐가 제 뒤에 기대는 데요?” 하자, 스님께서는 그거 네 조상이야. 그리고 너 자신이야하셨다.

그 순간 기대는 그 무언가의 묵직한 무게가 나 육신과 합쳐지는 것이었다.

그 무게가 나에게 로 와서 합쳐져서 순간은 낯설었지만 곧 적응이 되었다.

, 조상이 바로 나로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께서 이제 나가자 하면서 무덤에서 나가셨다.

날은 어느 덧 밝아 지고 있으며, 아까 그렇게 미로 같았던 무덤도 사실은 그렇게 복잡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무덤 밖을 나오자 스님께서는 새들에게 무덤 안 재단에서 가져온 견과류 같은 것들을 나눠 주셨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귀속에 선명하게 들렸다.

곧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조상이 바로 내가 되는 꿈이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무덤 안의 여행이었다.



🖋 by Dharma & Maheal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5-07-0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을 이리도 생생히 기억하다니...
전 눈 뜨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마힐 2025-07-05 10:29   좋아요 0 | URL
그냥 그날 잠 설쳤다는 얘기예요.. ㅎㅎ
 

글 제목나만의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는가?

우리가 태어나자 마자 손에 책 한 권을 쥐고 있다는 상상을.

그 책은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새 책 말이다.


<태어나는 순간 손에 책 한 권이 쥐어져 있다.

아직 아무도 펼쳐 보이지 않은 새 책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책은 빈 공간이 아니다. 이미 출판이 된 책이다.

책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이 보인다.

이 책을 쓴 작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질 않는다.

온 우주를 통틀어 읽어야 할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다.

다른 어느 누구도 내가 가진 이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그들도 각자 자신의 책을 펼쳐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이미 완성된 듯 보인다.

책의 결말을 보고 싶어서 얼른 뒤 쪽을 펼쳐 보려 하지만 책을 넘길 수가 없게 되어있다. 한 장씩만 넘길 수 있게 설계된 구조의 책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런 식의 책을 만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어도 그저 우주 출판사라고밖에 읽을 수가 없다.

단지 분명히 작가의 이름은 내 자신의 이름만 확인할 뿐이다.

결국 나는 작가이자 독자임을 알았다.

독자인 나는 내가 쓴 책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작가였던 나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가 쓴 나의 글을 내가 읽어 가며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책 속의 주인공은 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나는 그렇게 책을 읽어야만 한다.> (나의 책 중에서…)


우리는 인생을 내가 설계하고 계획하고 실행하며 살아 간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인생은 이미 설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단지 이미 설계된 대로 실행할 뿐이었다.

내가 개척하는 미래인 줄 알았다. 열심히 살면 미래가 밝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으로 살아갔다.

하지만 이것은 환상이었다. 아니 그 또한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나는 단지 입력된 계획대로, 잘 짜인 프로그램대로 살아가는 시스템에 불과 했다.

누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인가?

그건 내 자신이었다. 그건 다름 아닌, 내가 만들어 놓은 우주적 시스템이었다.

미래의 나는 시간 상의 미래의 시점에서 온 나가 아니다.

나는 과거 현재 미래에 함께 존재하는 이다.

나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뜻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모두 잘 짜여진 프로그램 인 줄 어떻게 아는가?

라는 관념 속에 빠지면 이런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지를 알아 챌 수가 없다.

라는 관념부터 허상임을 알아채야 한다.

신이라 부르고 부처라 부르는 그 경배의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아채야 한다.

내가 그러한 경배의 대상임이 된다는 사실에 조금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나외에 우리 모두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미 완성된 책처럼, 읽고 있는 나 자신만이 현재 있을 뿐이다.

책의 결말은 이미 있지만 읽지 않고서는 결말을 알 수가 없다.

열심히 읽어야 한다.

열심히 읽는 것은 곧, 열심히 살아야 할 당위성이다.

책을 써내서 책의 결말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건 착각이었다. 책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결국 우리는 나만의 책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는 나만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이 아닐까?

 

 

🖋 by Dharma & Maheal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cyrus 2025-06-29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하지 않고도 책의 핵심 내용만 잘 뽑아내서 읽는 효율적인 독서법도 좋지만, 시간이 많이 소모되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완독법을 선호해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엔딩 크레딧이 다 넘어갈 때까지 남아서 본답니다. 제가 완독을 고집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책의 결말과 핵심 내용을 이미 알고 있어도, 저는 끝까지 읽어야겠어요. 오늘 마힐님의 글을 읽으면서 왜 열심히 책을 읽어야 하는지, 잠시 잊고 있었던 초심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