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2025년 11월 18일

제목:<위대한 개츠비> 를 통해서 읽는 세상



F.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 <위대한 개츠비> 는 개츠비라는 인물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심층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존재였다작가가 제이 개츠비위대한이라고 불렀 이유는 그가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라그의 열망이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사랑을 얻고 싶었고, 과거를 되찾고 싶었고,그 욕망을 위해 현실을 재창조했다. 

하지만 위대하고 순수한 욕망은 부패한 구조에서 출발하였다.

결국엔 그의 꿈은 환영과도 같았고, 그의 낭만은 범죄로 변하고 말았다.

개츠비의 비극은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걸 실현하는 시스템이 썩은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제프리 엡스타인이란 인물이 있었다. 이는 실존 인물로 1990년에서 2000년대에 걸쳐 그의 집, , 전용기에서 개츠비와 같이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전 미국 대통령(클린턴),현 미국 대통령(트럼프), 영국 앤드류 왕자를 비롯한 정치계 거물과 하버드, MIT등의 학계, 그리고  CIA ,그룹의 CEO, 연예인 등 전세계 엘리트들이 드나든 기록이 폭로 되었다.

화려한 네트워크 뒤에는 정말 묘하게도 제이 개츠비가 연상된.

개츠비는 허구였지만 엡스타인은 허구가 사실이였음을 증명해버린 실존인물인 것이다.

엡스타인은 개츠비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영역을 완성한 셈이다

그는 대통령, 왕실,과학자, 헤지펀드, CIA 같은 인맥을 넘나들며 세계 각층의 엘리트들의 비밀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정보 브로커였다

그리고 그는 미성년 소녀들을 이용한 성 범죄에 연루되어 교도소에서 수감되었다. 2019, 두번째 복역 중인 교도소에서 엡스타인은 석연치 않은 자살로 생을 마쳤다. 그는 게츠비의 위대함 넘어선 위험함으로 진화한 악의 최종 보스로 끝나버렸다.

 

하지만 죽은 그의 망령이 비트코인 시장을 흔들고 있다.

비트코인, 현재 오늘의 시세로 1개의 비트코인은 약 89,700 달러이다. 한화로 약 13천만원. 불과 한달 전만해도 17천만원대 였었다

비트코인 하락의 이면에는 흥미롭게도 죽은 엡스타인이 관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비트코인은 원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한 천재적인 인물에 의해 탄생 되었다. 블록 체인이라는 기술을 이용한 중앙은행에서 벗어난 화폐 방식으로 기존 달러 시스템을 뒤 흔들어 버렸다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베일에 쌓인 인물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그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정설이 되어버렸다

그가 만든 비트코인은 현재 국가와 은행 그리고 권력을 우회하는 시스템 알고리즘을 지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에 열광했던 이유가 기존 금융 카르텔이 통제하는 화폐가 아닌 탈중앙화된 자유 화폐를 추구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바램과는 달리 현실은 정반대였다

비트코인을 가장 먼저 사들인 사람은 다수의 서민들이 아닌 월가의 자본이었다. 가장 큰 수익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돈 없는 대중이 아닌 돈 굴리는 헤지펀드였다. 지금 비트코인을 ETF로 관리하는 것은 반체제가 아닌 블랙록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토시는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의 화폐 실험도 결국 금융 엘리트 카르텔에 흡수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미국 하원에서 공개된 죽은 엡스타인의 이메일에서는 비트코인 코어 개발자에게 엡스타인의 자금이 개발에 지원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저택에서는 비트코인 관련 논의가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이것은 비트코인이라는 혁명적인 서사를 깨뜨리는 것이며 코인 시장의 판을 설계 하는데 금융 카르텔이 관여했다는 말이 된다.

죽은 엡스타인이 살아있는 코인 시장을 흔들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의 망령이 코인 뿐만 아니라 권력과 욕망의 세계를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개츠비, 앱스타인, 사토시의 공통된 진실은 개인의 욕망이 권력에 의해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권력의 구조 이야기를 음모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글의 핵심은 음모론이 아니라 구조를 읽어내자는 것이다.

그림자 정부라는 실제 있는 없든, 권력은 항상 은밀하게, 부는 언제나 중앙에서 흡수를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구조가 이미 작동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누구이든, 우리는 이미 그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있는 최소한의 생존 방식은 장님이 되지 않고 구덩이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사토시는 카르텔의 일원일 수도 있고 카르텔에 저항한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엡스타인은 권력 카르텔의 시스템의 관리자였을 수도 있고 희생된 바지 사장이었을 수도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실패했지만 그가 보여주려 했던 꿈의 본질은 아직도 유효하다.

정말로 위대한 것이란 무엇인가?

지금의 시대는  명이라도 세상을 정확히 보려고 하는 깨어있고자 하는 사람일 것이다. 단지 눈만 제대로 뜨자

그것이 위대함의 출발이 아닐까?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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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18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욕망에 선악은 없어요. 그저 끝없는 추구만이 있을뿐이지요.

마힐 2025-11-18 21: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욕망엔 선악이 없어요. 그래서 순수한 욕망일 수록 위대해 지는가 봐요. 문제는 욕망을 설계해두고 이용하는 구조죠. 그래서 욕망 자체 보다는 욕망을 움직이게하는 판이 더 위험한 것 같아요. 그 판에서 누군가는 이익을 보고 누군가는 피해를 보게 되죠. 어쩌면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힘인지도 모르겠어요. 풀이 있어야 양이 뜯어 먹겠죠. :)
 

관노트

2025년 11월 14일

제목: 유리알 유희가 깨지는 순간


최근 한국 대학은 ‘AI 컨닝이라는 이름의 소동으로 술렁이고 있다. 명문대라 부르던 곳들마저 급히 금지령을 내리고, 시험 무효를 선언하며, 학생들을 단속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하지만 나는 이번 사건을 보며 전혀 다른 풍경을 떠올렸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완벽해 보였던 결정체가 아래 놓이는 순간 금이 간다. 투명한 구슬로 우주를 환원하고, 모든 지식을 정제해 완전한 체계라 믿었던 카스텔리안의 세계처럼, 한국 대학 교육 역시 AI라는 빛을  순간 화려한 표면이 무너져 내렸다.

논란은 학생의 부정이 아니라, 대학 스스로가 쌓아 올린 지식의 유희(遊戱)가 이제 유효하지 않다는 증거다.


AI가 등장한 순간 대학 시험이 붕괴했는가?
많은 대학 시험은 여전히 이렇게 구성 것이다.  강의 내용을 외워 적기, PPT 요약, 개념 재현 같은 이런 평가는 AI에게 아주 취약하다

대학이 신뢰해온 암기형 평가 구조는 AI 앞에서 유리알 처럼 깨졌다. 

문제는 학생이 아니라 시험 자체다.


따라서  AI 금지령은  사실 대학 교육의 파산을 감추는 조치라고  수밖에 없다.
AI 금지령은 사실상 우리 시험은 AI 등장 이후 의미가 없다” 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금지가 아니라 시험 설계를 새로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교수들은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유리알 유희> 카스텔리안처럼 우리의 대학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삶과 유리된 지적 유회에만 머물고 있는 셈이다. 이런 문제점을 간파한 유리알 명인 크네히트는 결국 카스텔리안을 떠났. 대학의 유리알 유희는 이제 깨졌다.


그렇다면 대학이 다시 질문해야 것들 무엇인가?
AI 시대의 교육은 기억이 아니라 사고·판단·설계 능력을 묻는다

AI 오류를 찾고, 모델을 선택하고, 인간만이 수행해야 할 결정을 내리는 능력

이제는 정제된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판을 그릴 힘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교수들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이번 논란은 학생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교수의 시대적 적응 문제다

지식 체계는 깨졌고, 교수들은 AI와 함께 새로운 질문을 구성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 이제 드디어 유리알이 깨졌다면 새로운 게임을 만들 때다.
AI 컨닝 논란은 대학 시험 구조가 AI 시대를 견디지 못했다는 선언이다

유리알이 깨졌다면 파편을 탓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적 판을 설계해야 한다

AI는 대학의 적이 아니라 대학이 본래 기능을 회복하게 하는 촉매제다.

앞으로 대학은 AI를 금지하는 곳이 아니라,  AI 너머의 사고를 만들어내는 법을 가르치는 곳으로 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시대의 카스텔리안은 스스로에게 제대로 질문을 던질 있을까?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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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14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든 그 사물이 깨지는 순간 그 실체(본 모습)과 함께 이를 뒤집어 쓴채 감추고 있던 민낯은 완전히 드러나는 법이겠지요. 1970년대 초반에 입학해 그 혼란한 시기에 툭하면 공강이라 군에 자원 입대해 전역 후 복학해서 대학을 졸업했던 그 시절에도 일부 교수들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지적을 받곤 했지요. 소위 유학파 교수라는 가면을 뒤집어 쓴 젊은 교수의 실력이 논란의 대상이었어요. 껍데기만 요란하고 실속은 깡통이란 이런 논란은 앞으로도 종식되지 않을 듯.ㅠㅠ

마힐 2025-11-15 01:0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제는 대학 교수들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스스로 변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요. AI 가 깨트린 건 학생들의 부정이 아니라, 대학 교수들이 의존해온 낡은 평가 체계와 전통적 교육 방식의 문제점이죠. 결국 앞으로는 ‘진짜 질문‘ 을 던질 수 있고, 사고를 확장 시켜 줄 수 있는 교수들만 살아남는 구조가 되지 않을까요?
호시우행님의 댓글 감사 드립니다. 깊어가는 가을, 좋은 주말 되십시요.

카스피 2025-11-16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I혁명으로 미국대학도 학생수가 감소하고 향후 의사나 변호사등의 전문직도 사라지고 기업들도 대규모 감윈을 준비중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큰 쓰나미가 올 판국에 한국대학은 겨우 (물론 심각한 사항이지만)시험 부정예나 신경쓰고 있으니 깝깝하긴 하네요.

마힐 2025-11-16 23:20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말씀대로 진짜 현실을 생각하면 숨이 막히죠. AI 때문에 사라질 직업, 붕괴되는 시험, 이렇게 흔들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쓰나미가 몰려올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요즘 이런 생각도 듭니다.
“시험이 무너진 게 문제일까, 아니면 시험이 중요해진 게 문제였을까?”
AI 컨닝으로 학생들이 부정했는지를 들킨 게 아니라,우리가 무엇을 ‘지식’이라 부르며 가르쳐 왔는지를 들킨 것 같아요.
만약 대학이 답을 외우는 곳이라면 AI가 당연히 더 잘하죠.
하지만 대학이 질문을 만드는 곳이라면? 오히려 AI는 가장 좋은 거울이 될지도 모릅니다. 결국 앞으로 살아남는 교수, 대학, 학생은 ‘지식 전달’이 아닌 ‘사고 확장’을 할 수 있는 쪽일 거라 믿어요.
지금은 갑갑하지만… 이런 균열이 오히려 길이 될 수도 있겠죠. ^^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같이 좀 더 지켜보시죠. _()_
 

<관노트>


날짜:2025 1113 (18525일, 중국생활 9443일)

오늘의정진:  시간의 의미, 알아내기


18525일, 한국 생활 9082일, 중국 생활 9443일.

숫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지난 줌법회에서 스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곧 중국에 의미를 알게 되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따져 봤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날 수와 한국에서 생활했던 날 수, 그리고 중국에서 생활해온 날 수를 모두 계산해 봤다.

내가 태어난 이후 오늘까지 18525일을 살았다. 그 중 한국에서 살았던 날은 9082일 이었다.

2000년 1월 7일, 내가 중국으로 취직해 온 날이다. 그날을 나의 중국생활 기준일로 잡았다. 군 제대 이후 배낭여행과 어학연수 기간도 있지만 그때는 한국에 적을 둔거라, 기준이 되지 않다고 정했다. 그렇게 따지니 나의 중국 생활은 오늘로서 9443일이다.

25년 8개월의 중국에서 삶.

중국에서 보낸 시간이 한국에서 보다 거의 년을 지낸 셈이다.

앞으로 여기서 살게 , 아니면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할 지, 아직 모호하다.


확실성과 모호성은 항상 경계에 있다.

삶과 죽음은 순간에 결정된다. 생과 사 처럼 더 명확한 경계는 없다. 

하지만 사실 살아간다는 것은 모호함의 연속이다. 삶이란 시간에 구속 되지 않으면 언제나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시간  지나고 봐야 명확해 진다. 그래서 시간은 과거일 때야 비로소 마음에 와닿게 된다.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은 늘 모호한 경계에 있는 셈이다.

지금, 이라는 순간에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 내가 하는 생각, 모두가 미래로 연결되고 있다. 그 모호함의 경계가 시간을 만나면 확실해 진다.

그래서 현재의 시간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호함을 확실함으로 구분 짓는 시간이란 놈은 희안하게도 실체가 없다. 시간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인데 늘 우리는 시간이라는 허상에 사로 잡혀 있다.  

진짜 오늘이 2025년 11월 13일 일까?

그렇다면 애초부터 확실성과 모호성이란 구분도 허상이 아닐까?

어쩌면 시간은 믿음의 영역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2025년 11월 13일, 18525일, 9443일.

나는 내가 살아왔던 삶을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 올 나의 변화를 믿을 것이다.

확실성과 모호성은 믿음으로 구분되어지는 셈이다.                     

내 근본에 대한 나의 믿음만이 내가 보낸 시간의 의미를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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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16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무한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무한을 유한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달력을 발명했죠. 일년 단위의 반복이 무한에 대한 두려움을 다소 근절시켰죠. 불교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윤회도 그런 두려움에 의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지평선 너머로 지나가는 삶이 영원히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이 윤회를 만들어냈고 그 너머의 삶을 긍정하는 자만이 윤회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초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힐 2025-11-16 22:21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의 무한의 두려움으로 달력을 발명했단 신선한 의견에 무척 공감합니다. ㅎㅎ
사실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 공포, 기쁨, 슬픔이 모두 결국엔 다 ‘생존의 기술‘이 아니였을까요? 불교에서 버리라고 하는 오욕칠정 조차도 사실은 그냥 결함이 아니라 그 또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진화의 동력이 아니였을까요?
그렇게 바라보면 윤회든 종교든 사상이라는 것도 그 감정들의 확장판인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우리 모두는 감정으로 진화했고 앞으로도 진화할 피곤한 생명체인 거죠. ㅎㅎ

2025-11-26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26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 1017

관노트: 화양연화(花樣年華), 그 비극적 선율에 담긴 캄보디아.



치파오를 입은 여인의 허리 선이 움직일 때마다 울리는 구두소리, 말끔한 슈트를 입은 남자의 손 끝에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그 둘의 공간에서 흐르는 왈츠로 시작되는 선율. 그 뒤를 따라오는 현의 음에는 슬픔이 담긴 애절함이 있다. 왈츠의 음률과 닿을 듯 말 듯한 현의 음은 마치 두 남녀가 서로 닿을 듯 말 듯한 선을 지키듯, 한 음 한 음에는 서로 다른 감정이 돌고 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 즉, 일생에서 가장 눈부신 한때를 말한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의 침묵 속에 담긴 절제된 눈빛만큼 보이지 않는 감정은 오히려 애절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양조위는 앙코르 와트를 찾아간다. 무너지고 폐허가 된 앙코르 와트 벽의 구멍에다 양조위는 무언가를 남기고 속삭인 후 흙으로 막아버린다.

고대 사람들은 비밀이 생기면 산속 나무나 바위에 뚫린 구멍에 비밀을 속삭이고 봉인을 했다고 한다. 양조위가 앙코르 와트에서 봉인한 것은 화양연화라 여긴 사랑의 봉인(封印)이었을 것이다.



캄보디아, 지금은 범죄 집단 소굴이 되어 버린 나라. 한 때는 앙코르 와트를 만든 크메르 제국 문명을 지녔던 나라였다. 9세기에서 15세기까지 그 시절 크메르 제국은 동아시아의 강력한 제국이었다. 앙코르 와트는 단지 불교 사원이 아니었다. 힌두교와 불교가 융합된 석조 문화로 우주를 재현하고자 했던 곳이다.

영원할 것 같은 크메르 제국은 서쪽의 시암왕국(태국)에게 전쟁에서 짓밟히고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기고야 만다. 이때부터 크메르 제국은 멸망하고 서쪽엔 태국, 동쪽에는 베트남에 끼인 샌드위치 국가로 전락하고야 만다.

그 나라가 바로 오늘날 캄보디아이다.


캄보디아 국기에는 예전의 강성했던 흔적인 앙코르 와트 건물을 집어넣었다

전 세계 국가 중 유일하게 건물을 넣은 나라인 셈이다.19세기에 이르자 캄보디아는 태국의 내정간섭과 베트남의 군사적 압박에 못 이겨 왕실은 프랑스에게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즉 캄보디아는 외세 침략에 의한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닌 스스로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캄보디아는 주위의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의 주권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어쩌면 우리의 구한 말과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우리와 많은 차이가 나게 되었을까?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 후 캄보디아는 베트남 공산당의 지원으로 1951년에 크메르 인민 혁명당(KPRP)가 세워진다. 이때 급진 좌파인 폴 포트(Pol Pot 본명: 살로트 사로)에 의해서 크메르 루즈를 조직하게 된다. 크메르 루즈는 크메르 붉은 조직으로 캄보디아 무장 공산당 세력이란 뜻이다.

바로 그 유명한 킬링필드가 크메르 루즈 조직에 의해 잔인하게 진행된다.

폴 포트는 1960년대 프랑스 유학 시절 마르크스 레닌과 마오이즘에 심취한 후 자신의 사상을 정립한 후 중국의 문화 대혁명을 캄보디아에서 바로 실현한 것이었다.

농민만 순수하고 지식인과 종교인은 타락했다고 여기며 도시인들을 모조리 인종 청소를 한 것이다. 죽이는 데 총알이 아깝다며 몽둥이로 쳐 죽이고 안경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지식인이라 몰아 죽이기도 했다. 그렇게 1975~1978년까지 크메르 루즈는 프놈펜을 장악해서 약 200만 명의 캄보디아 국민을 무참히 학살했다.

 


현재 캄보디아는 아직도 이때의 사건을 역사에서 지워 버리고 어떠한 성찰과 반성도 언급하지 않는다. 캄보디아인 모든 국민의 가족 중에 이때 죽지 않는 가정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다

나라 전체가 PTSD에 걸려 있는 것이다.

크메르 루즈는 이 과정 중 베트남 공산당과는 거리를 두고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게 된다. 폴 포트는 마오쩌둥을 숭배하였고 스스로가 그렇게 되길 바랬던 것이다.

캄보디아 무자비한 크메르 루즈 정부를 중국은 유엔에서 합법 정부로 인정할 만큼 지원을 했다.

왜 중국은 캄보디아를 지원할까?


중국이 캄보디아를 지원한 이유는 당시엔 소련과 베트남을 캄보디아를 이용하여 견제하려는 목적과 지리적 이점을 챙기려는 내막이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1979년 크메르 루즈는 베트남과 국경 문제로 충돌하고 만다. 이때 베트남 공산당은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크메르 루즈를 쫓아내고야 만다.

그 강력했던 크메르 루즈는 무너지고 친 베트남계 세력인 현재 총리 집안의 훈센 전 총리가 집권하게 된다. 훈센 전 총리는 1985년부터 2023년까지 무려 38 7개월의 장기 독재 정치를 하게 된다. 지금은 자기 아들에게까지 총리를 세습한 사실상 북한과 같은 왕조를 만들고 있다. 사실 캄보디아에도 태국처럼 국왕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캄보디아 왕실은 아무런 힘도 없는 들러리에 불과 하다.


38년의 장기 집권 중에 친 베트남계와 친 중국계의 정치인들은 서로 카르텔을 만들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캄보디아를 만들어 낸 것이다.

특히 중국의 일대일로에 적극적 참여로 중국 정부의 항만 도로 공항 같은 건설부터 카지노 관광까지 막대한 중국 자본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때 중국에서 삼합회 같은 흑사회 조직이 캄보디아로 넘어와 합법적인 사업 투자로 꾸며서 사업을 벌이게 된다. 그게 바로 스캠 컴파운드(Scam Compound) 사기 범죄 복합단지”를 만든 것이다.




스캠은 이제 단순한 사기가 아니다.

이들은 메스컴에 알려진 대로 강력한 카르텔로 이루어져 캄보디아 정계까지 장악하여 지하 경제를 주무르고 있다. 중국의 범죄 단체는 캄보디아를 기점으로 미얀마, 베트남, 태국까지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 국민에게도 이미 이들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최근 중국은 이 범죄 단체를 단속하고자 미얀마에 경찰을 파견하여 조직을 소탕하는데 그 규모는 일반 조직폭력배 소탕 수준이 아니다. 몇 만 명 단위로 조직에 얽힌 사람들을 잡아오는데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 국민이 아직도 캄보디아 스캠에 연루되어 감금되어 있다고 추산하는 인원이 300명이 넘는다고 들었다. 얼마나 감금되어 조직에 이용되고 있는지 정확한 숫자도 없다.

무엇이 이들을 캄보디아로 오게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잘 이해가 안 된다.


캄보디아에서 화양연화를 이루려는 꿈을 꾼 것인가?

캄보디아의 화양연화는 이미 끝났다.

앙코르 와트의 벽 구멍에 봉인된 비밀을 혹시라도 누가 해제를 하는 날이 오게 될까?



🖋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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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0-17 2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캄보디아가 아닌 한국에서의 화양연화를 이루려는 욕망이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캄보디아로 향하게 만든게 아닐까요. 뉴스를 보면 사람이 얼마나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게 되는지 느끼게 되더군요. 참 안타깝고 씁쓸한 현실입니다.

마힐 2025-10-17 22:3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너무 안타깝고 씁씁한 현실입니다. 캄보디아란 나라도 참 불쌍한 역사를 겪었더라구요.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모호해 짐을 느꼈어요. 잉크냄새님 말씀대로 뭐든 문제의 원인은 욕심과 욕망입니다.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우린 자주 놓치는 것 같아요. 캄보디아를 바라보면서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알게 되었네요.
 
유리알 유희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4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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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16

제목: 유리알 유희/ 잡문의 시대를 향한 헤세의 외침

 

 

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에서> 그리고 <싯다르타> 읽으며 받은 감동은 정말 대단했다. 뒤늦게 읽었기에 오히려 그 깊이를 체감할 수 있었 같다. 만약 나의 20대에 이 책들을 접했다면 아마도 감동의 울림은 없었을 것이다. 독서는 결국 경험치와 함께 숙성되는 법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유리알 유희> 내게 다른 충격이었다.

 

작품은 전작들과 달리 훨씬 난해하다. 서문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스콜라 철학, 바흐, 베네딕스 수도회, 여씨 춘추, 우파니샤드 수많은 이름과 학문이 등장한다.

읽다 보면 내가 난독증이 아닌가 의심이 정도다. 그러나 이때 정신 차려야 한다. 사실 맥락을 잡고 보면 단순하다. 결국 《유리알 유희》는 고도의 정신적 놀이를 말한다. 음악과 수학, 철학과 언어학, 종교와 천문학까지 인류가 쌓아온 모든 지혜를 유리알이라는 상징에 담아 조합하는 유희 였다.

 

작품은 전설적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로 서술된다. 그는 카스탈리엔이라 불리는 수도원적 교육 공동체에서 성장한다. 최고의 영재들이 모여 순수 학문을 익히고 명상으로 완성하는 곳. 크네히트는 여기서 정신적 정점에 이르러 명인이 된다. 그러나 결말은 뜻밖이다. 그는 명인의 자리를 내려놓고 속세로 돌아가려 한다. 아무리 숭고한 정신의 세계도 무상하며, 진정한 깨달음은 중생 속에서 완성된다는 자각 때문이다.

지점은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와 겹친다.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심우에서 시작해, 발자국을 발견하고(견적), 소를 얻고(득우), 소를 기르고(목우),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기우귀가), 마침내 소와 나를 모두 잊는(인우구망) 경지를 거쳐 마지막엔 세상으로 돌아와 중생을 제도하는 입전수수에 이른다.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을 떠나는 결단은 바로 입전수수의 경지와도 같다.

깨달음은 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현실과 함께해야 한다는 통찰이다.

 

나는 헤세가 전하고자 이러한 메시지 변증법적 구조로 .

(): 잡문의 시대. 무책임하게 쏟아지는 단편적 지식과 강연, 언어의 가치 상실. 헤세는 이것을 정신적 침체라 불렀다.

 

그날그날의 모든 사건에 대해서 급하게 성의 없이 쓴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이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서 가려내고 기사화하는 일은 급속도로 무책임하게 대량 생산되는 상품과 완전히 같은 길을 밟고 있었다.” (1p.26)

 

“2곱하기 2가 무엇인지 권력자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자는 비겁자이며 배신자입니다. 진리에 대한 지조, 지적 성실성을 다른 이익을 위해 희생시키는 일은, 설혹 그것이 조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해도 배신입니다.” (2p.61)

                           

놀라운 , 헤세가 그린 잡문의 시대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유튜브와 SNS, 인터넷 매체에서 매일같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글과 영상들, 자극과 가짜뉴스의 홍수 속에 언어는 이미 가치 잃고 있다. 지식인들은 정치화 되었고,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헤세가 진리에 대한 배신자라고 경고했던 모습이 지금 우리 눈앞에 있 것이다.

 

(): 정신의 시대. 잡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류는 유리알 유희와 같은 정신 문명으로 향한다. 진리에 대한 배신을 거부하고, 지식을 초월한 정신적 승화를 갈망한다.

유리알 유희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인류가 가진 모든 학문,  수학, 철학, 음악, 종교  하나의 언어로 종합하는 정신적 연금술이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명상과 깨달음의 경지를 통해 완전성에 다가가는 길이다.

 

유희는 유희자에게 완전한 것을 찾아가는 어떤 상징적인 형식을, 숭고한 연금술을, 모든 형상이나 다양성을 넘어서 내면의 고유한 정신세계로, 즉 신에게 다가가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1p.50)

 

 

(): 그러나 정신의 시대조차 무상하다. 유리알 유희도 결국 사라진다.

아무리 고결한 정신도 무상(無常)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역사가 되고 지상의 한 현상이 되는 즉시 무상한 것이 되기 마련입니다.” (2p.64)

 

결국 지고한 정신의 성과도 속세로 돌아가야 한다. 깨달음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와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네히트는 명인의 자리를 내려놓고 카스탈리엔을 떠난 것이.

정신의 성소가 무너지는 순간, 그가 택한 길은 세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유리알은 둥근 결정체다. 동양에서 영단(靈丹)이라 불렸던 불사의 환처럼, 모든 학문과 지혜가 응축된 상징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리는 쉽게 깨질 수 있다. 정신 세계의 성취도 무상하다. 그렇기에 크네히트는 그것을 붙잡는 대신 놓아버리고, 속세로 향한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헤세는 정신의 시대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것조차도 덧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 메시지는 분명하다. 깨달음은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깨달음은 동서양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불교의 공(), 도가의 도(), 기독교의 복음(福音). 이름 붙일 수 없지만 반드시 전해야 하는 그것. 헤세는 바로 그 무명(無名)’의 메시지를 유리알 유희라는 장치를 통해 보여주려 했다.

 

오늘날 우리는 헤세가 예측한 잡문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의 극단화, 국제 질서의 패권주의, 정보의 과잉과 언어의 퇴락 대한 헤세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희망도 남겼다. 잡문을 넘어선 정신의 시대, 그리고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오는 순환. 그 길이 바로 인류가 가야 할 길이라고 이미 유리알 유희를 통해 예측했다,

 

독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알 껍질에 금을 내는 일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금이 넓어지고, 마침내 껍질이 깨져 세상 밖으로 비상한다.

<유리알 유희> 껍질을 깨부수는 망치 같은 책이다.

헤세는 잡문 시대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너는 어디로 갈 것인가?”

 

by Dharma & Maheal 

 

 

 

 

어떻게 보면, 경박한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보다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더 쉽고 책임이 덜 느껴질지 모른다. - P12

자네는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완성을 바라야 하네.신성은 개념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안에 있어.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 - P107

이윽고 전신 운동을 하면서 감격에 찬 춤으로 하루의 시작을 찬미하고,주변의 물결치며 빛나는 자연과 자신이 한마음으로 이어져 있음을 표현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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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0-17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이 여물기 전 너무 일찍 읽혀진 책은 오히려 소화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말씀처럼 삶의 경험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가치를 발하는 책이 있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유리알 유희>는 헤세의 책중 읽어보지 못한 책인데,,,제목은 순정 소설 같은 것이 꽤나 난해해 보이는군요. ㅎㅎ

마힐 2025-10-17 23:10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 제목만 보고 유리 구슬로 하는 구슬 치기 하는 내용이 아닐까 싶었어요. 책은 첫 부분만 난이도가 높고 실제는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으니 꼭 읽어 보세요. ㅅ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