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3월15일
오늘의정진: 眞不立妄本空/ 진불립망본공/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 100일 정진, 8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일곱 번째와 여든
여덟 번째 구절은
<法東流入此土/ 법동류입차토/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菩提達磨委初祖/ 보리달마위초조/ 보리달마가 첫 조사가 되었도다.
六代傳衣天下聞/ 육대전의천하문/ 육대가 의발을 전한 일 천하에 소문
났고
後人得道何窮數/후인득도하궁수/ 뒷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라> 였다.
불법이라는 씨앗을 달마조사가 인도에서 가지고 와서 중국의 땅에 옮겨 심었다. 그 후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을 거치면서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혜능 이전의 선은 땅 밑에서 자라기 시작한 묘목에 불과 했다. 혜능 이전 조사들이 잘 가꾸지 않았다면 진작에 자라다 죽어 버리고 말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혜능대사에 이르러 묘목은 나무로 자라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증도가를
지은 영가현각 스님도 법의 나무 가지에서 열린 가장 큰 열매 중의 하나였었다. 이제 6조의 의발 전수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선불교라는 나무에서 이제는
무성하게 많은 열매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은여든 아홉 번째와 아흔 번째 구절
眞不立妄本空/ 진불립망본공/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有無俱遣不空空/ 유무구견불공공/ 있음과 없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
二十空門元不着/이십공문원불착/ 이십공문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一性如來體自同/일성여래체자동/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다.
불교는 중도(中道)를 강조한다. 참된
것을 추구하지만 참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망상을 싫어 하지만 망상을 또 버리지도 않는다. 참됨과 망상이란 양극단에 치우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쩡쩡한 가운데를 고수하는 것은 중도가 아니다. 중도는
양변이 모두 공(空)함을 알기에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중도란 무척 어렵다. 분명히 다시 말하지만 중도는 가운데로 가는 길이
아니다. 가운데 중(中)과
길 도(道)가 합쳐진 단어가 중도라 하여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 중도는 양극단이 공함을 알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참되면서도
참되지 않으며, 망상을 꺼리지만 또한 버리지도 않는다.
공(空)은 비어 있지만 꽉 찬, 텅
빈 충만이다. 무엇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인연에 따라 형성될
뿐이다. 마치 원자와 전자가 만나서 하나의 분자를 이루고, 그
분자가 모여 물질로 형성되었다가 다시 인연에 따라 흩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한 것을 성품의 작용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성품의 작용이 바로 여래의 본체, 즉
불성이라고 영가스님은 밝혔다.
<일일 소견>
집착은 왜 생기나요? 알지 못하니까 생기지. 그럼 왜 알지 못하나요? 스스로가 업식에 끄달리니까 알지 못하지. 그럼 왜 업식에 끄달리나요? 생사에 메이니까 그렇지. 그럼 생사는 어떻게 벗어나는 건가요? 그래, 생사를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를 참구해야 한다. 생사가 어디에
있는가? 이 자리에 있다. 숨을 쉬면 생이고 숨이 끊어지면
사다. 생명이 있는 한 생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업을 짓는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럼 먹고 사는
것을 벗어나려면. 죽어야 하는가? 그래서 옛 선사들은 무문관(無門關)에 들어섰다. 문
없는 문으로 들어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