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4년 12월28일
오늘의정진: 無明實性卽佛性 (무명실성즉불성) 무명의 참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u 100일 정진, 3일차
어제 증도가와 신심명의 가장 핵심 구절을 살폈다,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절학무위휴도인 , 부제망상불구진
배움이 끊어진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버리지도 않고 진심을 구하지도 않네. (증도가)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하는 마음만 꺼리면 된다.(신심명)
깨달음의 경지는 분별이 끊어진 자리를 뜻 한다고 했다.
이는 즉 분별의 사라짐은 곧 불이(不二) 이다,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 바로 둘이 아닌 도리를 얻는 것이다.
분별이 사라지는 불이문(不二门) 에 들어서는 것이야 말로 깨달음의 세계로 입장하는 셈이다.
오늘은
無明實性卽佛性 (없을 무, 밝을 명, 참 실, 성품 성, 바로 즉, 부처 불, 성품 성)
(무명실성즉불성)
무명의 실제 성품이 그대로 부처님 성품이요,
幻化空身卽法身 (환영 환, 변할 화, 빌 공, 몸 신, 바로 즉, 법 법, 몸 신)
(환화공신즉법신)
환영 같은 허망한 육신이 그대로 법신이네.
無明무명이란 업식으로 인해 가리워지고 어두운 상태를 뜻한다.
즉 ‘마음 자리가 밝지 않는 상태’ 인 것이다.
유교에서 대학의 첫 구절이 明明德(명명덕)이다.
‘밝은 덕을 밝힌다’ 는 뜻으로 풀이한다. 유교의 도는 덕을 최고로 친다.
德덕은 불교의 佛性불성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학에서 덕을 본래 밝은 상태로 보고 있다. 하지만 증도가에서는 무명의 상태, 즉 어두운 상태 또한 우리의 본성이요, 부처의 성품이란 것이다.
밝은 성품만이 부처님 성품이 아니고 어둡다, 밝다 하는 분별 없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의 성품이란 뜻이다.
또한 우리의 육체는 유한하다. 그래서 생노병사를 피할 수 없는 육체를 두고 허망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 죽는 이 육신 그대로가 바로 법신, 즉 부처의 몸이라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고, 우리의 몸이 곧 부처의 법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부처라는 뜻과 다름 없다.
일반적으로 불교를 공부하면 無我무아라는 개념을 접하게 된다.
무아는 말 그대로 ‘내가 없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서 우리의 本性본성이 바로 부처라고 하는 참나, 真我진아의 개념이 있다.
이 무아의 개념과 참나의 개념은 불교를 教学교학으로 공부하다 보면 항상 상충하는 부분이 생긴다.
‘내가 없는데 어찌 참나가 있냐’ 고 불교를 공부하면서 서로 모순 되는 도리에 도무지 납득이 안 가게 된다.
이는 나 역시 참구 중이며 얼핏 이해는 가지만 아직은 확연하지 않다.
다만 부처님 법은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진리임은 안다.
진리는 어느 한가지 고정된 법은 없다는 것이다.
무아와 참나는 근기에 따라 고정되지 않는 진리의 한 모습이다.
그래서 불법은 팔만사천 법문이 천차만별 사람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설해진다고 했다.
증도가에서는 이러한 참 진리의 오케스트라를 들려주고 있다.
오직 깨달음의 눈으로 보여져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아직 들리지 않는다고 속상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선을 깊이 공부하신 선지식의 지도가 필요하다.
교학으로만 아는 것은 지혜가 아닌 지식이고 알음알이에 가깝다..
무아든 진아든 모두 단박에 깨고 들어가는 禅선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이 또한 분별 없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다.
심즉시불心即是佛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