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레바퀴 아래서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최신 원전 완역본 ㅣ 코너스톤 착한 고전 시리즈 2
헤르만 헤세 지음, 박지희 옮김, 김선형 해설 / 코너스톤 / 2017년 1월
평점 :

책 제목: 수레바퀴 아래서
지은이: 헤르만 헤세
제 목:
방황, 그 순수한 몸부림, 새로운 세계의 시작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소설에는 헤세 본인의 방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헤세의 소설은 자전적 성장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세가 중점을 둔 성장은 어린이 시절에서
청소년으로 다시 청년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려 내고 있다.
시간을 달리하며 내놓은 그의 소설에는 자신의
성장 과정을 조금씩 변주해 나간다.
유년 시절의 천진난만하고 순수했던 마음과
청소년기의 질풍노도의 감정, 그리고 그시기 폭풍우를 견뎌낸 뒤 어느덧 불쑥 성장한 어른이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헤세 본인의 어린 시절에서 어른이 되는
경험이 단순히 보면 극히 개인적인 것 같지만 방황과 성장 이란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경험 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헤세는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을 받은게 아닌가 싶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내가 읽은 헤세의 작품중 읽었던 순서로 치면 <데미안>을
먼저 읽었고 다음으로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에 이어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이다.
헤세가 이 소설들을 출간한 시점으로 보면
<수레바퀴 아래서>는
1906년 헤세가 29살 때, <데미안> 1919년 42살에 , <싯다르타> 1922년 45살에, <유리알 유희> 1943년 66살에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이 작품들을 각각 읽을때는 미처 알아
채지 못했지만 이들을 전부 읽고 난 후 이 작품들 사이에는 연결점과 공통된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소설 작품들을 묶어 '헤세의
세계관' 이라 부르기로 했다.
헤세의 세계관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배움과
성장' 이라는 주제의식을 올곧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헤세 세계관의 출발은
<수레바퀴 아래서> 에서
시작하고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거쳐 <유리알
유희> 에서 완성을 이룬것으로 보인다.
헤세의 세계관을 분석한 공통된 구조는 이렇다.
첫째,
세계관 속의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은 순수하고 행복 했다.
둘째,
세계관 속의 주인공은 배움의 공동체(학교)에
들어가고 그 안에서 사춘기를 맞이 한다.
셋째,
주인공은 공동체 안에서 정신적 힘든 방황을 격하게 겪는다.
넷째,
그 모든 방황의 중심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주인공의 성향과는 완전히 다르다.
다섯째,
결국 친구를 통해 힘겨운 방황을 끝내고
성장하게 된다. 즉 어른이 된다. 또는
깨달음을 얻는다.
세계관의 틀에 대해서는 지극히 개인적 생각이니
당연히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구조가 내가 본 4개의 소설에만 해당 되는 것이니 다른 헤세의
소설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수레바퀴
아래서>에 이에 어울리는 표현이 나온다.
Differendum est inter
et inter(같아 보여도 속은 다른 법이다.) 의
문구 처럼 헤세 세계관의 작품은 뭔가 다 비슷하게 닮아 있지만 다른점도 분명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관 속엔 헤세의
자전적 경험이 강하게 투영 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계관 속에 주인공과 관계된 친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처음엔 친구와의 갈등으로 주인공은 방황하지만 결국 그 친구를
통해 배움과 성장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밴라트 와 헤르만 하일너,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와 데미안, <싯다르타>의
싯다르타와 고빈다 , <유리알 유희> 의 요제프 크네히트와 플리니오 데시노리 등의 관계가 그렇다.
내가 보기엔 실제 헤세가 경험한 자신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소설화 하는 과정에서 본인과 친구의 관계를 좀더 극적으로 그려 내지
않았나 싶다.
즉 소설속의 주인공과 친구는 현실속의 헤세와
그 시절 헤세가 사귀었던 실제 친구 를 반영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소설은
소설 이기 때문에 어쩌면 친구는 허상의 존재이고 본인의 또 다른 자아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주인공과 갈등하는 친구는
주인공 본인의 또 다른 자아 혹은 헤세가 이상화 시킨 또 다른 자기 분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실의 우리는 한가지 고정된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
우리의 자아는 고정된 하나가 아니라는것이다.
항상 변한다.
현실의 나와 내가 추구하는 이상형의 나는
내 안에 공존하는 셈이다.
어쩌면 비록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에 나는 도달하지 못 할 수도 있지만 그 둘의 존재는 본래 하나 라는 것이다.
이게 심리학인지 소설적 장치인지는 모르겠다.
분명 헤세가 추구하는 완벽한 인물상은 주인공
혹은 본인의 반쪽 자리 성향과 소설속에 나오는 반쪽 짜리 친구의 성향이 합쳐져야 완성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현실과 이상의 대립은 결국
둘은 하나 라는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소설속에 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한 과정중에 배움과 성장은 딱 맞는 주제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출발하여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거쳐 <유리알 유희>로 완성 됐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헤세 본인이 나이를 먹어가며 실제로도
성장하고 깨달아 가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수레바퀴
아래서> 는 헤세가 29살에 쓴 작품으로 본인의 실제 경험했던 청춘의 시절과 시간적으로 무척 가까운 시기이다.
그래서 헤세 본인의 자전적 경험이 소설속에
가장 많이 녹아져 있다.
실제로 신학교에 진학했고,
시인이 되고 싶었고, 자살
시도를 했으며 , 정신 치료를 받아야 했고, 또
기계공이 되야만 했던 자신의 모든 경험이 온전히 들어가 있다.
특히 헤세가 가장 예민했던 시기에 고민했던
죽음에 대한 성찰이 가장 진지했다.
그래서
<수레바퀴 아래서>는
수레바퀴의 상징으로 표현 되는 '바퀴 아래에 깔리면 죽는다' 는
표현이 복선으로 나온 것이다.
사실 수레바퀴에는 위 아래가 없다.
바퀴는 지면에 닿아야만 위 아래가 존재하게
된다.
소설에는 모두
3개의 바퀴가 언급되어진다.
물레바퀴,
수레바퀴, 톱니바퀴.
이들 바퀴 모두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레바퀴는 순수한 어린시절의 동심,
수레바퀴는 죽음을 사색하는 고뇌, 톱니바퀴는
현실적인 삶과 타협을 해야 하는 심정을 상징 한다고 볼 수 있다.
한스 기벤라트는
3개의 바퀴를 순서대로 접하며 성장했고 이는 곧 헤세 본인의 상처 받은 그 시절의 아픔을 상징한 것이라
생각 된다.
결국 세계관 초기 작품인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 본인이 회상하는 아픔을 가장 많이 담아 냈고 42살에 나온 <데미안>에서는 그 시절 아픔을 치유 하는 시도로 풀이가 된다.
사실 <데미안>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이 시기의 헤세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시도를
한다.
소설 속의
'아프락삭스' 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이미 헤세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승화 시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후
3년뒤에 나온<싯다르타> 에서 헤세는 정신적 방황을 끝내고 '붓다'
라는 인간 완성자를 향한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설정 한다.
싯다르타의 여정을 통해 헤세는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서기를 통해 결국 붓다가 깨달은 경지를 본인도 이루겠다는 의지를 표현 했다.
그리고 말년의
<유리알 유희> 에서는 앞서 경험한 모든 과정을 유리알 하나에 응축 시킨 경지를 보여준다.
<유리알
유희> 는 미래의 시점으로 동서양 모든 정신 문명의 최고 경지에 오른 인물 유리알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 의 전기를 쓴
것이다.
여기서 요제프 크네히트의 결말과 <수레바퀴
아래서> 의 한스 기벤라트의 결말을 비교 하면 참으로 Differendum
est inter et inter하다. 즉 같으면서도 다르다.
겉으로 볼 때 주인공이 모두 물속에서 최후를
맞는 것은 같다.
그런데 한스 기벤트를 떠올리면 많이 아쉽고
동정심에 측은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크네히트는 아쉬운 마음 보다는 이뤄야
할 것을 이미 다 이룬 성자의 모습으로 승화가 되었다.
결국 헤세 본인이
방황 뒤에 오는 성장의 완성을 말년의 작품속에 이렇게 이루어 낸 셈이다.
방황을 통해 배움과 성장을 하고 결국 깨달음이란 가장 이상적인 경지로 승화 시킨 것이다.
우리가 경험 했던 모든 방황은 순수 했다.
방황속에서 순수는 때묻고 오염 되어지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오염이 아닌 순수의 또 다른 형태 였던 것이다.
그 모든 방황은 결국 우리가 성장하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 이었던 것이다.
새가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날아
가듯이, 방황은 알을 깨는 과정 이었고, 수레
바퀴가 굴러가는 과정이었다.
멈춰진 수레바퀴 아래에 있지 말고 바퀴는
계속 굴려야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윤회의 바퀴를 결국엔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방황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순수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이제 방황은 기대가 된다.
또 어떤 세계를 맞이 하게 될 지...
헤세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로 들어 가는
문을 알려줬다.
방황,
순수한 몸부림, 그
끝에 새로운 세계가 기다린다.

Per aspera ad astra(시련을 거쳐야 성공 하리라)! - P109
Differendum est inter et inter(같아 보여도 속은 다른 법이다) - P123
마치 수레바퀴에 치인 길가의 달팽이 처럼 한스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약간 상처를 입은 채 촉수를 집어넣고 몸을 웅크렸다. - P175
어휴, 그만합시다. 당신이나 나나, 어쩌면 우리 모두 저 아이를 너무 소홀히 대했던 것 같지 않습니까? - P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