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5

제목: 시름겹지만 찬란했던-이어령 교수의 사유를 사유하다가


존재가 가장 정점에 이를 , 그림자는 사라진다. 이어령 교수는 이를정오의 통찰이라 불렀다

분수는 가장 높이 치솟은 순간,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떨어지듯, 인생도 가장 빛나는 순간이 쇠락의 시작임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절정은 슬프다.
죽음을 삶의 절정으로 보았던 이어령의 시선은, 마치 두보의 시구와도 맞닿는다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은 깎인다 一片花飛減卻春 했던 시인처럼, 우리는 찬란한 순간에 슬픔을 예감하고, 무너짐을 직감한다.
그의 마지막 수업을 읽으며 역시 문득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젊을 때는 관심이 중요했고, 중년에는 관찰이 중요했고, 이제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깊이 남는다. 컵에 손잡이가 달렸다는 것은, 관계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관계의 손잡이를 잡는 것에 여전히 서툴기만 하다.


이어령 교수는 스스로를지성인이라 했지만, 민아를 통해 '영성' 문을 엿봤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 부족했던 어떤 , 스스로를 미끄러져 떨어진 존재로 자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삶의 정점이자, 죽음을 향한 가장 인간적인 발돋움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또한 안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찬란함 뒤에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내려놓고 다시 움켜쥐기를 반복하며 진화해간다는 .
죽음은 끝이 아니며, 슬픔은 후퇴가 아니며, 믿음과 의심은 모순이 아닌 진실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알겠다. 이어령 교수의 사유는 안에도 이미 있었음을. 그가 건넨 마지막 수업은 단지 지성의 유산이 아니라, 안의 사유를 비추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사유한다.
나의 찬란한 오후는 언제쯤일까? 나는 지금 찬란함으로 가는 여정에 있다

이제 존재의 파동이 차차 울리는 알아챘고, 찬란함 속에서 위대한 모순을 보기 시작했다. 삶의 의미는 여정에 있고, 여정의 울림은 점차 안을 채워 가고 있다.


일년 전 썼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리뷰를 다시 사유하며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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